말씀이 보약인가 치료제인가?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33-37)
한국 신자들은 기도는 아주 뜨겁게 열심히 잘 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최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면에선 그리 우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점수로 치면 어쩌면 낙제 수준일 것입니다. 그 원인을 여러모로 따져볼 수 있겠지만 말씀의 본질과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한국뿐 아니라) 설교를 듣고 나선 그 내용을 금방 다 잊어버립니다. 성경 구절도 특별히 암송 대회에 나가려고 준비하지 않는 한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인간 자체에 힘을 주는 양식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인간을 바꾸는 책입니다.
비유컨대 우리가 식사 때마다 다른 음식을 먹지만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몸에 이미 영양분으로 흡수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건성으로 훑어보지 않는 한 읽고 기억은 잘 못해도 영혼의 영양분으로 흡수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지정의가 아닌 영혼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 잘 기억하지 못하며 그러기에 더더욱 말씀을 계속해서 접해야 합니다.
그럼 말씀이 영의 양식으로 신자에게 어떤 효력을 나타냅니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치료약이 아닌 보약의 효과를 나타냅니다. 보약은 몸을 평소에 강건하게 만들고 체질 자체를 변화시켜 병에 걸리지 않게 합니다. 병균 자체를 당장 물리치는 치료약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보약이란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체를 건강하게 하며 그 결과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지만 알지 못하기는 여전합니다. 병에 안 걸린 상태가 계속 되니까 즉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없으니까 그것이 보약 때문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분명히 보약 때문에 병에 안 걸린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효과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선 직접적으로는 지정의를 올바로 서게 만들고 그 간접적 영향력으로 건전한 육체가 되도록 이끕니다. 갑자기 지성적 능력이 높아지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지정의의 활동이 흐르게 합니다. 본인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게 만들어 줍니다. 최소한도 타락한 세상이 특별한 이유 없이 자꾸 싫어지게 됩니다.
나아가 신자의 영혼이 자꾸 갈급해지도록 합니다. 이전 불신자 시절처럼 세상적인 것에서 부족해 갈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의 신성에 참예하고, 주님을 닮아가며, 그분의 긍휼과 은총을 더 많이 받고 싶어집니다. 자기 영혼에 하늘의 좋은 것으로 더 채우기를 소원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에 관심이 돌아가며 하나님의 일을 자원해서 하고자 하는 열정과 소망이 생깁니다.
나아가 어떤 핍박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그 영혼이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말씀이 견고한 반석이 되어 있기에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다시 떠오르며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게 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만들어 줍니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말씀은 신자의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고, 탐욕을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보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주의 도에 다시 소성케 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말씀을 계속해서 접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경의 본질이 항상 복용해야할 보약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껏 자기의 위급한 상황에 문자적으로도 딱 들어맞는 구절을 발견해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주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까지 했는데도 왜 해결이 되지 않는지 불평합니다. 말씀을 치료제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신자들마저 효과가 금방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일만 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하는 이유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평소 때에 기도는 잘하는데 말씀을 보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앞의 문제는 해결 받아야 하고 또 기도하면 그런대로 응답이 되니까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해도 잘 안 되지만 도무지 가시적인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으니까 잘 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병이 들어서 그 때야 치료제를 먹는 것보다는 평소 때에 보약을 먹어 병에 안 걸리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보약을 잘 먹지 않는 이유는 금지하는 음식이 있고 꾸준히 먹어야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히 읽어야 하고 또 말씀대로 따르려면 세상을 따르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도 게으르고 세상을 쫓는 본성 때문에 말씀을 멀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 또한 자가당착입니다. 세상을 쫓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현실의 눈에 보이는 일을 처리하려니까 기도는 잘 하는데,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의 양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생각하여 먹고 마시는 것만 구하는 이방인의 기도와 신자의 그것이 거의 다를 것이 없습니다.(마6:31,32) 또 어려운 일이 생겨서 뭔가 마음에 위로가 되거나 좋은 해결책이 되는 구절이 있는지 찾으려고 성경을 뒤적거리는 것도 동일한 수준입니다.
신앙을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길은 기도와 말씀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든든한 기초를 두지 않는 기도는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경 말씀을 기도 중에 인용하거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꾸준히 먼저 읽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을 바꾸어가는 과정이 기도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그 마음을 먼저 옥토 밭으로 바꾸고 자기 존재를 반석 위에 든든하게 올려 놓아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말씀이 자신에게 그런 효력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나아가 아무리 옥토에서 싹이 나도 병충해와 악천후에 잘 견디어 열매가 풍성히 맺히고 반석 위에 지은 집도 폭풍우를 만나 손상이 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평소에 꾸준히 말씀과 기도로 자기 존재를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녀로, 삶을 그분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인생을 오직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은혜에만 잠기도록 붙들어 매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거나 일시적으로 사단에 넘어간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 나머지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므로 기도나 말씀을 치료제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기도든 말씀이든 치료제로만 사용하려 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역으로 그것들을 치료제로 사용해야 할 일을 더 많이 겪게 해 주실지 모릅니다. 알기 쉽게 말해 병이 더 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술을 부려 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제만 믿고 평소에 운동하지 않거나 보약을 먹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병에 더 자주 걸리지 않습니까? 믿을 것은 치료제가 아니라 자신의 체질입니다. 그 체질은 평소 운동과 보약으로 다지지 않고는 건강해질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말씀이 영혼의 양식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그것도 치료제가 아니라 보약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을 접하지 않고는 영혼이 피폐해지며 나아가 삶과 인생 전부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실제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분과 등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습니까? 최소한도 당신의 게으름과 세상을 향한 본성을 충분히 이겨낼 만큼 말씀이 주는 눈에 안 보이는 효력을 실감하고 있습니까?
3/2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