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해야 할 네 가지 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는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126:1,2)
정보통신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평균 타자로 20면 정도를 채울 정도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한 달이면 책 2권, 일 년이면 24권, 50년이면 무려 1200권의 분량이 됩니다. 벙어리나 특별히 과묵한 사람이 아니고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아주 다작(多作)하는 작가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강령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가장 많이 강조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신구약을 통 털어 가장 많이 나오는 첫 번째 경구(警句)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대신에 말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조심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실패하면 이웃 사랑도 실패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웃과 접촉하는 가장 첫 번째의 과정 내지 수단이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타자 20면 정도면 설교를 해도 몇 편을 할 수 있는 양인데 그 수다한 말이 주위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여파, 부작용 등은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만약 하루 동안에 쏟아 놓은 말 전부를 자동으로 녹음해 기록하는 장치가 있어서 자기 전에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말이 과연 그 가운데 얼마나 차지하고 있을까요? 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 반대되는 말이 더 많지 않을까요? 최소한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말이 그 반대의 말보다 적지는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입에 웃음과 찬양이 가득 찼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꿈꾸는 듯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인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랬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생각의 반영입니다. 생각은 또 인생의 가치관과 목표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 대신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하는 말 중에선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가장 많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가 무엇을 먹으나 마시나 주를 위해서 해야 한다면 말은 더더욱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입을 열면 근본적으로 세 가지 종류의 말만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웃을 살리는 사랑,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매사를 간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 증거해야 합니다. 또 이웃을 주께 하듯이 섬기려면 먹고 마시는 것과 함께 말로서도 위로와 권면이 따르고 함께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경건의 훈련을 쌓은 일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말로 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 음해, 시기, 질투, 저주, 분노, 의심, 불신의 말을 할 필요도 겨를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야 합니다. 신자가 지켜야 할 강령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이 따른다고 염려할 것까지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이미 그런 생각에 묶여 있다는 증거이며 또 말을 뱉어냄으로써 그런 생각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로 벌을 받는 것이자 신자 자신에게 부정적 효과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수치스런 말이 일단 입 밖에 나왔다 하면 도로 주어 담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주위에 부정적 영향을 다 끼친 후입니다. 입 밖으로 나왔을 때에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 어떤 생각도 마음속에서부터 담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생각은 ‘취중진담’ 혹은 ‘농담 반 진담 반’이라고 언젠가는, 그것도 스스로 의식과 통제를 전혀 못하는 사이에 반드시 튀어나오게 됩니다.
오죽 하면 침묵이 금이라는 경구가 생겼겠습니까? 그러나 살다보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또 신자는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기에 오히려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하기 전에 잠간 마음속으로나마 기도해야 합니다. 최소한 기도하는 심정으로 즉 상대를 향해 주님을 대하는 마음을 갖고 말을 해야 합니다.
직접 대화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도 동일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과 귀는 누워 잘 때를 빼고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던 자동으로 다 들리고 어떤 행동을 해도 다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음(口音)으로 하는 말보다 행동, 태도, 손짓 발짓, 눈빛으로 하는 대화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지라 이쪽에선 아무 말과 행동을 하지 않고 저쪽에선 눈과 귀를 감고 있어도 서로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부터 영혼을 성령으로 깨끗케 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온전히 사랑하여야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의 말도 자동으로 따라 나오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의 입에 언제 어디서나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붙어 있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바로 “Thank you!”와 “Excuse me!”입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남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자신은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기에 당연히 “Praise God!” 하나를 더 보태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자가 말해야 할 세 가지 내용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므로 인간끼리는 자연히 “Thank you!”와 “Excuse me!” 두 가지 말만 하면 됩니다.
요컨대 무슨 말을 하던 기도 하면서 해야 합니다. 아니 말하는 것 자체가 기도여야 합니다. 말로 이뤄내는 것도 기도요, 말의 결과를 정리하는 것도 기도여야 합니다. 대화의 형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로 마음을 주님 안에서 바로 잡고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는 자는 평생을 두고 아름다운 자서전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개그도 되지 않는 아무 쓸모없는 잡담, 비난, 불평, 욕설, 다툼으로만 자기 인생의 책을 적어내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1,200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을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따르면 신자의 말에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내용 외에 더 보충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열방더러 여호와의 행사를 찬양 내지 증거케 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히 증거하여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하는 말을 불신자가 그대로 본받을 수 있을 정도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우선 작금 세상 사람으로부터 흔히 비난 받듯이 말만 앞서는 예수쟁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만 앞선다는 것은 행동과 다르다는 것인데 결국 그 생각마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신자가 하나님을 신자처럼 증거하고 찬양하는 말을 따라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거의 드문 경우이지만 행동으로는 잘 섬겨놓고 말로서 그 모든 것을 무산 내지 더 악화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생각의 반영이라면 이 또한 참된 사랑의 발로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이 감정적인 존재인지라 사소한 일로 기분이 틀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와 사랑의 말이 안 나오면 차라리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다른 말로 자꾸 섭섭하거나 불만이 생기는 그 마음에까지 재갈을 물리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선 “Praise God!”, 이웃 앞에선 “Thank you!”와 “Excuse me!”, 이 세 가지 내용의 말만 하면 이웃도 똑 같이 그런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와질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이치 아닙니까? 지금 당신의 자서전을 아름다운 말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까? 혹시 그 반대는 아닙니까?
4/4/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