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1)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열흘이나 흘렀습니다. 어쩌면 연말연시에 단단히 결단했던 계획 중에는 이미 작심삼일 단계로 접어든 것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도무지 못 말리는 게으름과 의지 약함을 때 이르게 탓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이미 한 달의 1/3이 지났으니 정말 시간이 날아가는 것 같으며 우리 날 계수함에 대한 온전한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짧고 한 번뿐인 인생이라면 한탄해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하루가 바로 인생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날 꼭 해야만 할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해 한탄하거나 내일 일을 염려하는 만큼, 아니 나중에는 그 몇 배로 손해 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는 믿음이 전혀 없는 자라도 다 갖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모세가 말하는 지혜에는 그런 의미도 결과적으로는 포함하지만 원래 의도했던 바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성에 인생의 찰나성을 비추어서 범사에 겸손해져야 한다는 지혜만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저자가 얻고 싶은 지혜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듯이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주의 노의 능력과 주의 진노를 정말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알아야만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 앞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강건하여 팔십 수를 누렸다고 해도 그 년수의 자랑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생이 찰나처럼, 그것도 수고와 슬픔으로 지나가는 이유가 바로 주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각자가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슬픔과 수고를 비례해서 겪으며 그 벌로 수명마저 짧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8,9절) 모든 인간의 평생이 하나님 보시기엔 죄로만 점철된 것이라고 합니다. 요절하든 장수하든 죄에서 자유로운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는 날아갈듯이 짧은 인생마저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너무 많은 죄를 지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죄 짓지 말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주를 주답게 온전히 인정하며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본인은 물론 후손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안락과 기쁨으로만 넘쳐야할 인생이 거꾸로 수고와 슬픔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 죄의 삯으로 사망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천 년씩이나 살 수 있는 장수의 복은 주셨습니다. 그러다 인류의 죄악이 어려서부터 이 땅에 관영하는 바람에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족만 빼고는 홍수로 멸망당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수명은 백이십 년으로 줄어버렸습니다.(창6:3)
역으로 따지면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은 인생들이 그 짧은 기간만이라도 제발 죄 안 짓고 거룩하게 살라고 소원한 것입니다. 모세도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5절)라고 인생을 표현했습니다. 그 일차적인 뜻은 이어지는 설명대로 “아침에 돋는 풀”처럼 모든 인생이 금방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면의 뜻은 그렇게 금방 시드는 까닭이 바로 홍수 심판 이후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현생 인류는 홍수 심판에서 살아난 자의 후손이기에 더더욱 죄를 두렵고 심각하게 여겨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시의 저자가 바로 모세라는 것이 참 오묘하지 않습니까? 그는 노아 이후에 인간에게 허락된 수명 120 년을 Full 로 채웠습니다. 말하자면 구태여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없었던 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인생이 강건해야 80이라고 한탄했을까요? 물론 그가 이 시를 저작한 시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 것이라면 80 살 이전 즉,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 일생의 소명을 받기 전입니다. 그럼 아무리 인생을 죄 안 짓고 선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은 자의 일생은 주의 진노 아래에서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평생을 두고 실천하는 자만이 그 수명의 장단 여부와 상관없이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학계의 통설로는 이 시의 저작시기를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야의 반역사건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광야에서 방황할 때로 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그 인생(민족)의 비참함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광야를 방황하는 중에도 여전히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기에 주의 분노 중에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했다”(9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인생을 계수하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같아집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 인생의 수고와 슬픔이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오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상태와는 관계없이 원죄로 이미 저주 받은 모든 인생과 세상에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겪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만이 인생의 참 슬픔이, 또 그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참 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평생을 주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있기에 세상의 수고와 슬픔은 전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84:10-12)
이 시편 저자인 고라 자손의 고백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의 장막에 거한다고 해서 하나님 잘 믿으면 복된 인생이 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주의 궁정에 거하지 않으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임을 온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서 허락된 수명 120년을 다 채우며 사는 것보다는 주의 뜻대로 그분의 일을 하며 살되 그분의 진노를 온전히 두려워할 줄 아는 하루라도 사는 것이 분명히 더 좋아야 합니다. 그것도 신자 자신은 주님의 일을 함에 이름과 빛도 없이 겉모습이 후패할 대로 후패해져도 실제로 신나고 즐거워야 합니다.
해가 바뀌고 벌써 열흘이나 흐른 뒤에 “나는 왜 올해에도 내 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까? 내 믿음은 왜 이리 약할까?” 한탄하며 이 시를 읽는다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아마도 십중팔구 이럴 것입니다. “누가 주의 형통케 하는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두려워하야야 할 대로 주의 전능성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주께 간절히 기도하여 올해만큼은 내 계획과 소원대로 이뤄내는 믿음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재차 말하지만 원저자 모세는 분명히 주의 노의 능력과, 주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을 계수하는 지혜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강건해 80 넘게 장수해도 하나님이 허락한 120년이 채워지지 않았기에 수고와 슬픔의 즉, 죄로 찌든 부족하고도 추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인간 수명은 120년으로 짧아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짧지 않습니다. 현대 첨단 의학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나아가 언제 이뤄질지 모를 만큼 긴 인생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홍수 이전보다 근 1/10로 줄여 인생이 날아가게끔 만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단 하루라도 여호와의 궁정의 온전한 문지기로 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처럼 작심삼일의 연례행사에 빠졌다는 한탄만 하고 있다면 여호와의 궁정에 거하는 것보다 그 계획이 이뤄내는 결과에만 모든 믿음의 초점이 모아졌다는 반증입니다. 정작 되돌아보아야 할 사항은 새해로 바뀌어선 단 하루라도 온전한 여호와 궁정의 문지기가 되었는지 여부여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수명을 꽉 채웠지만 그 전반, 중반부 80년까지는 문자 그대로 수고와 슬픔뿐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종으로 쓰임 받자 슬픔과 수고를 되돌아 볼 여유가 전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에게 수고와 슬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수고와 슬픔에 파묻힐 생각이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살같이 날아가는 인생의 짧음으로 인해 그분의 궁정의 문지기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된 것을 더 한탄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막상 꿈에 그리던 가나안 입경은 못하고 느보 산에서 먼발치로 바라보며 외롭게, 그러나 오직 감사함으로 눈을 감았지 않겠습니까?
오늘로 이제 겨우 열흘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벌써 열흘이나 지났나?” 한탄하기보다는 “아직도 355일이나 남았어. 작심삼일은 잊어버리고 더 열심히 다시 시작하지.”라고 다짐하는 것이 신자의 인생 계수 지혜가 아닙니다. 모세는 80 년이나 지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서야 인생계수의 온전한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 지난 80년도 하나님의 관점에선 결코 실패, 허송, 게으름, 주저의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모세도 120년의 생을 채웠을 즈음에는 그 80년이 없었다면 주의 궁정의 문지기 40년이 불가능했으리라 절감했을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의 성공여부는 그 수명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슬픔과 수고 없이 얼마나 일생을 안락하고 기쁘게 지내는 지와도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에서 신자가 어떤 큰 업적을 쌓았는지도 괘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가 어떤 일이 닥쳐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또 그렇게 그분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는 데 120년이, 아니 강건치 못한 70, 60의 인생도 전혀 짧지 않습니다. 여호와 궁정의 문지기로 단 하루라도 족한 자가 이미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자기 생의 첫날과 마지막 날로 삼아 최선을 다하자는 것은 불신자들의 모토일 뿐입니다. 매일 매일을 여호와 궁정의 문지기로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신자의 일생의 구호여야 합니다. 열흘이 이미 덧없이 흐른 것 같은 시점에서라도 우리 모두가 올 한해, 아니 평생을 살아가는 매일 아침의 각오, 헌신, 계획이어야 합니다. 평범한 70 인생으로, 혹은 강건한 80으로 이끄실 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지만, 날마다 겪을 수밖에 없는 수고와 슬픔이 그분의 위로와 기쁨으로 변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1/1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