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되어버린 율법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5:3)
갈라디아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지금 왜 할례만 지켜야 하느냐 율법의 요구 전부를 행해야 논리에 맞지 않느냐고 반론합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다른 율법을 못 지키면 그 할례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할례만 받으면 다른 모든 것은 안 지켜도 구원 받는다는 이상한 결론에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 여러 구원의 방도를 덧붙이거나 대체한 이단들은 바울의 이런 논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변증의 구실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런 추가, 보완, 대체된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만큼 인간이 더 경건해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외에 할례까지 받으면 금상첨화이고 최소한 나쁠 것은 없다는 투입니다. 구원의 길을 인간 스스로 고안해내거나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종교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눈다고 보편적으로 가르치긴 합니다. 비록 인간이 만든 계명일지라도 더 많이 지켜 경건해지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뜻도 심판주로 그분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길은 반드시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죄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것이라면 당연히 그분이 직접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죄가 하나님과 아무 연관 없이 인간의 객관적 하자 내지 잘못에 불과하다면 그분이 직접 구원의 길을 제시해줄 필요 없이 단순히 점수를 매겨서 커트라인만 정하면 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자들의 생각이 바로 어떤 길을 통하든 인간이 더 선해지려 노력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평가 점수도 높아질 것이기에 구원의 찬스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랑의 하나님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하나님께 지었다거나, 그분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끼리 누가 선하지 경쟁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하고도 진정한 회개는 없고 나는 다른 이보다 훨씬 선하니까 하나님은 단지 그 사실만 판단해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철두철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당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역으로 예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죄인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의 죄만 따지는 셈입니다. 당연히 인간이 고안한 방안이라면 모두가 나름대로 효력이 있게 됩니다.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냐는 반박도 그들로선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율법을 많이 지키면 지킬수록 결과적으로 좋기는 하지만, 그 지킴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께 죄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 죄인이 된 셈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아니 할례를 구원의 길로 제시한 인간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어찌 감히 인간의 할례 지킴을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비교합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자리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모두다 말로는 사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곳에서마저 하나님을 자기 선함을 확인해주는 종으로 부려먹으려는 짓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의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외면, 부인, 배반한 결과는 완악함과 추함과 어리석음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것은 인간이 진정으로 당신과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는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죄인이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 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소망이 없다는 심령 깊숙한 곳에서 토해내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7/1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