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받고도 구원이 취소되는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3:3-5)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대로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에 넘어가려는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그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과연, 헛되이, 어리석다, 등의 말을 반복해 가며 “너희가 진짜로 복음을 헛되게 만들 것이냐?”고 힐문했습니다. 힐문이란 대답을 듣고자 하거나. 생판 모르는 사실을 새로 가르쳐 주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제발 정신 차려 이미 알고 믿은 것을 다시 제대로 붙들라는 권고였습니다. 말하자면 본문이 성령으로 시작한 자가 잠시 미혹되어 흔들릴 수 있다고는 인정했지만 육체로 마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인 율법과 복음, 행위와 믿음, 육체와 성령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 평가하는 것이지만 완전 반대 의미로 설명하면 반드시 둘 중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율법에 따른 행위를 해선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도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심어주시는 십자가 복음이 아니고선 어떤 인간도 아무 소망 없이 영원한 진노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체는 인간의 신체나, 죄악과 정욕을 추구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성령과 대비되었다고 악령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구원 받는 것과 대비되어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재하지 않은 인간,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히 육체로 마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됩니다. 바로 유대주의자들은 육체대로 마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주목할 사실은 그들도 창조주이자 유일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십자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원죄로 타락했어도 선에 대한 소망이 남아 있고 때로는 제법 잘 실천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자기나 타인의 의로운 행위에 관대한 점수를 주게 마련입니다. 또 어떤 종교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결국은 선행입니다. 그만큼 성령을 받은 자마저 예수와 함께 인간의 선행도 강조하는 다른 복음의 오류를 깨닫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들더러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 그 후 신앙여정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라고 촉구했습니다. 참 복음이 진리임을 확신하면 절대 다른 복음에 미혹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선 구원은 반드시 성령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어 예수 믿는 자들을 비정상으로 보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자기 노력이 아닌, 그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많은 괴로움”은 문자적으로는 "많은 것들"(many things)이란 뜻입니다. 앞뒤 문맥을 따져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은 외부적 핍박과 환난보다는 복음 안에서 겪게 된 많은 영적 체험들을 뜻합니다. 그런 영적 체험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일어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이전에 예수를 모른 채 율법의 행위에만 열심을 내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영적 체험을 겪어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열심히 선행을 했을 때는 사실상 하나님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선 그분을 믿었을지 몰라도 하나님 쪽에선, 그러는 인간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아무 은혜도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 공로 자격이 없어도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순전하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그 분이 알아봐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일방적으로 그분이 먼저 찾아와서 은혜를 주셔서 받은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체험이라고 해서 방언 신유 같은 은사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가장 먼저 성령이 아니었다면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라면 이단 내지 저주할 이름이다가 이제는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저 좋고 가슴이 충만해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예수를 모르는 사람을 보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져 어서 빨리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반대로 뒤집어지는 것은 스스로의 지정의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확실히 구원을 받은 자라야 그분의 은혜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진노 가운데 죽었을 것이라는 진리가, 은혜 안에 들어와서 은혜 밖에 있었을 때의 자신의 영적 상태와 비교해 보면 비로소 확실해집니다. 물론 여전히 은혜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단적 종교일 뿐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허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며 선행을 하고 심지어 믿고자 노력하는 것마저 그렇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나서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무엇이든 인간에게 온전한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은혜로 알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인간의 허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환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옛사람의 껍질을 깨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의인이며 더 의로워질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 때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죽는다는 것은 죽기까지 싫을 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받아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놀랍고 신기합니다. 아주 착해져 죄와는 담을 쌓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하든 나만 잘 되면 그만이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면에서만 필요했습니다. 현실의 형통 같은 형이하학적 부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품성과 행동을 바꾸려는 형이상학적인 면에서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먼저 의롭고 선해져야만 했지 남들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까지 흘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분명히 살아 계셔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게 됩니다. 나부터 거룩하고 신령하게 바뀌도록 범사를 섭리하고 있음을 실제 삶에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의, 생명, 거룩, 영원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 아팠습니다. 그분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고 혹시 있다고 어렴풋이 짐작되어도 나를 형통케 해주거나 무사무탈 하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자 그 좋던 죄악, 정욕, 쾌락, 등이 갑자기 너무나 싫고 추해졌고 오직 죽음으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보혈이 나를 씻겼고 그분의 의로 나를 두르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또 그분께서 나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도 알기에 그 뜻에 순종하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들이 내 지성과 사상으로 심지어 하나님을 믿었던 열성으로 이뤄낼 수 있었던 일인지 아무리 따져 봐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두 가지 뿐입니다. 먼저 인간이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면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인간을 평가만 하면 됩니다. 인간 중에 선하고 악한 자의 구별이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단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 없다면 그분이 먼저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성령을 받은 자는 자기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자백이 믿음의 출발이자 평생 신앙의 시금석이 됩니다. 인간의 노력은 아무리 의로워보여도 허사뿐임을 확신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십자가 안에서 소원하게 됩니다. 설령 자기 노력을 보태어도 그럴 때마다 오히려 그분의 긍휼이 줄어듦을 확인하기에 다른 복음에 잠시는 미혹되더라도 완전히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이고 성령까지 주셔 놓고 그러도록 방치하겠습니까?
5/2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