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양산하는 교회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는 없는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2:17-19)
하나님은 십자가상의 강도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만 믿으면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예수만 믿는 신자가 있습니다. 교회 출석만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해 주일날만 잠시 기독교라는 종교의 덧옷만 입었다가 평일에는 그 옷을 벗고 세상 사람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삶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선하게 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 도리입니다. 신자라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 유대주의자들을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들과 오늘날의 형식적 신자들의 믿는 모습은 정반대이지만, 즉 전자는 선하게 살았고 후자는 큰 죄의식 없이 아무렇게나 살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복음이란 면에선 괘를 같이 합니다. 온전한 신자가 아니라는 일차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구원관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는 우선 유대주의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는” 자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도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만 의롭게 되는데 부족하므로 율법의 요구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아직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게 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여전히 죄인 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럼 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로 죄를 짓게 만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럴 리는 결코 없습니다. 반어법으로 그들의 오류를 통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의미는 죄의 본질이 무엇이기에 자신이 구원 받은 효과가 어떠한지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래서 죄를 안 짓는 자가 되기에 앞서 자신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의롭게 되었다는, 더 정확히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았다는 확신부터 있어야 합니다. 칭함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은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뜻하는 바는 사법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이 단순히 그렇게 간주해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에 따른 모든 형벌을 면해 준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죄 값을 이미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비유컨대 판사에게 완전 무죄선언을 받았는데도 피의자가 다시 저는 죄인이니까 어떤 형벌이라도 달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더 실감나는 예를 들자면 민사소송에서 피고의 부모가 이미 손해배상금을 넘치도록 다 지불하여 그 송사가 깨끗이 해결되었는데도 본인은 판사에게 그것은 잘못되었으니 자기가 배상금을 더 내겠다고 주장하는 꼴입니다. 그럼 부모의 공로가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죄를 덧입혀서 여전히 죄인으로 남게 만든 셈입니다. 부모가 낸 돈은 휴지 조각에 불과해집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형태로든 아무리 미세한 부분에서라도 부인되면, 즉 그분의 십자가 공로 외에 또 다른 인간 쪽의 의로운 행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완전히 “헐었던 것을 (내가)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려 들었지만 성경은 그것은 오히려 죄인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계명 준수 자체가 죄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무죄 선고한 판결문을 찢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선언은 역으로 말해 인간의 자질, 능력, 조건, 상태, 선행, 공적 그 어떤 것도 구원에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는 그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철저하게 타락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선하게 살겠다는 소원과 결단조차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선하게 사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선행의 전부가 사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내면에 아주 교묘하게 숨어 있는, 때로는 자신도 의식 못할 정도로, 교만과 탐욕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 거부, 배반, 심지어 저주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될 마음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 반대편에 서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안 믿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고의로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악을 즐긴 죄인입니다. 또 스스로 인간의 의를 드러낸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부인한 죄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자신의 지난 죄를 회개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이라는 존재 전부가 완전히 썩어 있음을 철저하게 자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노력으로는 그 죄를 단 한 치도 깨끗케 할 수 없었다고 완전히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없었음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깨끗해질 수 없었기에 그런 모든 자인, 항복, 확신 등도 사실은 성령님이 나를 거듭나게 해주심으로 가능해 졌음을 예수를 믿은 후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죄인이란 말이 저지른 죄의 질과 양이 극한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시체였으므로 가만 놔두면, 바리새인의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세상과 사람들 앞에 인간적인 의를 드러내어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가능성은 아예 제로였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100% 작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베풀어졌다는 뜻입니다.
인간 쪽의 공로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구원에 보태져야 한다는 주장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설령 율법의 요구를 준행하여 아주 의롭고 경건한 모습을 띄어도 하나님 은혜를, 아니 그분을 다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위해 뭐라도 행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구원의 효력은 자연히 상실될 뿐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보면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정죄, 죄책, 형벌 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민사소송에서 부모가 수십 배의 손해 배상을 해준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부모에게 배상을 갚아야 합니까? 그보다는 부모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야 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평일에는 불신자와 똑 같이 살다가 주일만 경건한 척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직히 지난 일주일의 삶이 죄로 얼룩졌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는 뜻 아닙니까? 입술로는 “주여! 주여! 예수를 믿습니다.”하면서 십자가 위에다 교인이 되었다는 인간적 의를 덧붙인 것입니다. 아니 덧붙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 자체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지 않는 것, 즉 그들의 죄를 통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교인들로 죄인으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형통하는 법부터 적극적으로 가르쳐 형식적 신자라도 예배당만 가득 채우려 듭니다. 아무리 기독교라는 덧옷을 입혀주어도 오히려 자기 의를 스스로 세우도록 부추겨 죄인만 더 양산하는 것 아닙니까?
5/1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