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3:18)
모든 인간이 명시적 구체적으로 모르거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지 구원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하고 풍요로워도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뭔지는 몰라도 여전히 부족해!”라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 탐욕이 끝이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심령에 충분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또 개중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존재 또한 참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합니다.
꼭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에 관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현실의 삶에서부터도 이런저런 모양으로 온전한 자유, 해방, 만족, 행복, 보람, 의미, 가치 등을 추구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태생적으로 평생을 두고 채워야 할 어떤 빈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멍을 채워 없애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그런데 평생을 두고도 채워지지 않았거나 않을 것 같으니까 필연적으로 죽음 이후에 맞을 상황도 염려됩니다. 이렇게 평생을 두고 참 만족을 구하거나 죽음 이후를 조금이라도 염려하는 것이, 본인은 의식했든 못했든, 종교적으로 따지면 바로 구원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구원을 이룰 방도는 오직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그 빈 구멍을 채우는 것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교의 종류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궁극적으로는 이 둘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고 가장 먼저 내세우고도 사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인간의 노력도 보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많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협력하여 구원을 함께 이뤄내는 것입니다. 아주 모양새도 좋고 가르침의 내용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기독교에도 그런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골고다의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협력관계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께서 완전히 죽기까지 하셨는데 인간이 거기에 보탰거나 보탤 것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반대로 아무 죄 없으신 분을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죽인 것이 바로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그분과 협력하여 구원을 이뤄낸다는 것입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 모든 고난과 시험을 체휼하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되어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비로소 유효해집니다. 또 인간 대신에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믿음만 요구됩니다.
본문도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고 확정적으로 선언합니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의미의 다른 것이지 단순히 여러 개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아님, 당연히 틀렸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여 베푸시는 구원은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요컨대 인간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면 그분의 은혜는 무용지물이며 십자가도 그분의 실패작이자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가슴에 난 구멍을 자기가 메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십자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도저히 그 구멍을 메울 자신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그런 수단도 없다고 깨달아야 비로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자기를 영원토록 살리는 보혈(寶血)로 변모됩니다. 처음 구원 받을 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슴에 난 구멍은 구원 받았다고 절대 단번에 매워지지 않습니다. 아니 평생을 두고도 매워지지 않는데 오히려 그것이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내가 도무지 매울 수 없으니 주님께 날마다 순간마다 그 구멍을 내어드리면 온전하신 당신의 보혈로 채워줄 것 아닙니까? 상처와 환난이 은혜로 가는 지름길이지 형통과 안락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가슴의 구멍만 키울 뿐입니다.
6/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