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완전하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3:10,11)
신자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에 너무 집착(?)하여 율법을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율법은 복음에 비해 열등한 하나님의 실패작인 것처럼 여깁니다. 심지어 십자가 복음 안에선 앞으로 지을 죄까지 포함해 모든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율법적 행위를 하는 자를 오히려 믿음이 덜 성숙하고 신령하지 못하다고까지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모두가 완전합니다. 오직 그분의 절대적인 선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의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자체가 저주 아래 있거나, 나쁘거나, 심지어 부족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의 온전한 공의와 사랑이 모든 율법 조항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풍성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자라거나 나쁜 것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신자에게 미치는 효용과 결과 또한 결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율법의 근본적 기능은 죄의 저주를 깨달아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더욱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선생이 되며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절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 자체는 완벽하게 달성된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은 죄이지 죄를 깨닫는 것은 긍정적이자 좋은 것입니다.
율법의 전체적 기능뿐 아니라 조항 하나하나도 완벽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제의적 형식과 문자적 적용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 없어진 형식들이 표상하는 의미도 여전히 신약에 반영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그런 계시는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율법 조항을 하나님이 주신 의미에 따라 오늘날 신자가 삶에 적용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그것도 신구약을 망라하여 전 세대에 걸친, 온전하게 드러내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따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인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율법과 복음의 구원 방법 중에 복음이 옳고 율법이 그르다는 종교적 원리를 나타내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이 진짜 무엇인지, 그에 대비해서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닌 “율법 행위에 속한 자”가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대로 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야만 구원이 되거나,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종교, 즉 구원관을 택할 수 있지 않느냐고 포용심을 베풀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 비 기독교인을 거부, 정죄, 심지어 저주할 문제도 전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가 필요 없다고 끝까지 주장하기 때문에 당신께서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시는 것뿐입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결과, 즉 저주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심판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로 인생을 끝냈기에 그 상태는 죽은 후에도 지속되는 것입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과 그 외아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없어도 자신은 이 땅에서나 죽은 후에나 스스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잘 살 자신이 있다는 고집입니다. 율법은 그 생각이 도무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이 맞고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가 틀렸습니다. 반대로 그럴 수 없다면 그 생각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율법 행위에 속한 자였습니다.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자신하여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기는커녕 만족과 행복도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내 인생에 나 외의 존재가 개입하는 것은 죽어도 싫어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몰라 안 믿은 정도가 아니라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바꿔 말해 그냥 그대로 두어 그 상태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율법 행위에 속해 있는 것이 안타까워 당신의 독생자로 우리를 대신해 죄의 모든 형벌을 감당케 하시고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새 생명의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인치시어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려 주었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의로워졌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일 하나 없이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였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로 충족하고도 완전하게 이뤄졌습니다. 당연히 다른 정죄와 심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율법의 행위를 더 보태야 구원이 완성되는 양 주장한 유대주의자들은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더 선하게 행했으니 하나님도 점수를 더 주겠거니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유치한 아니 사악한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구원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한 번도 충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스스로의 선택과 결심에 따라 종교적 의무감으로 예수를 입술로만 주라고 시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자기에겐 조금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는, 다른 말로 자신이 죽고 거듭날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조금 못 미치는 허물, 약점, 죄 된 습성 등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따라 없애려 한 것뿐입니다. 남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이 필요한지는 몰라도 나는 그럴 정도까지 악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은혜도 모르는 유대주의자 같은 교인들이 오늘날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자기가 의롭다고 경쟁하고 자랑하며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여서 결국은 파당과 분쟁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심지어 이미 복음 안에 들어 온 자도 스스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남들의 잘못이나 실패를 끝까지 참고 기다려 줄 줄 아는 것입니다. 최소한 같은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을 정죄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만든 정죄의 기준입니다. 즉 한 죄인이 자기를 정죄하여 당신의 구원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끼리 서로 정죄할 기준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을 정죄할 권리는 인간을 만드셨음에도 그 인간이 지은 죄로 피해 입은 하나님 한분뿐이며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정죄하십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조차 의로움을 경쟁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아니지만 종교적 계명과 인간적 도덕 같은 규율로 남을 정죄할 구실로 삼는 것은, 아직도 율법 행위에 속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남아 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5/29/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