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11) 7/25/04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동전의 양면 같은 믿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했다. 마가복음 11장에선 이 보다 한 칸 더 나간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기도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2-24절) 본문에서도 혈루증 여인을 고쳐 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믿음을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시고 성경에는 그런 예가 수 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막상 예수를 믿는 신자의 삶에선 믿음이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문제를 두고 정말 굳건한 믿음으로 간절하게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거나 현실에선 반대로 사정이 더 악화된다. 반면에 어떤 일은 겨우 한두 번 그것도 간단하게 기도했을 뿐인데 너무 쉽게 해결되고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더 선하고 깨끗하게 결말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신자로선 어떤 문제가 생겨도 꼭 기도를 절실히 해야 할 필요성에 의심이 가고 과연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일까 당혹감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문제가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대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약4:3) 것도 아니다. 물론 신자가 된 후에도 간혹 그럴 수 있긴 하지만 기도할 때마다 내 욕심을 앞세우진 않는다. 오히려 궁핍할 정도로 간절하게 필요하고 너무나 큰 고통 중에 있는 문제거나 심지어 내 주위 사람이 잘 되기만 바라는 기도임에도 그렇다. 결국 우리의 믿음이 성경 속의 인물이나 예수님이 약속하신 만큼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대부분의 신자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실제 신앙 생활하면서 항상 하나만 적용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히11:6) 한다.
믿음의 또 다른 요소는 그것과 정 반대다. 인간은 완전히 무지무능(無智無能)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다. 바꾸어 말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인정이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다 알고 있는 상식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신앙 생활에는 왜 힘이 없는가? 이 둘은 두 개중 하나만 있어선 안 된다. 또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도 아니다. 동전의 앞 뒷면처럼 반드시 동시에 함께 있어야 유효하다는 것을 신자들이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포기한 믿음
혈루증이란 출혈이 멈추지 않는 병이다. 본문의 여인은 아마 자궁 벽에 혹이 생겨 항상 피가 흐른 것으로 추정된다. 12년간 그 병으로 고생했으니 본인의 낫고자 하는 소망과 열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율법에선 부정한 것으로 정죄하고 남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믿음이 대단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여인처럼 병이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고 예수님이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간다. 맞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따져서 병자가 병 낫기를 소원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불신자라도 암에 걸리면 전도하지 않아도 교회로 나온다. 또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믿음을 이 정도 차원에서 그쳐 버리면 동전의 한 면만 본 것에 불과하다.
동일한 사건을 더 자세히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의 5:26절로 가보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12년간 세상에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갔고 효험 있다는 처방은 다 써보느라 전 재산을 탕진했다는 뜻이다. 그녀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더 이상 없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다.
또 회당장 야이로(본문에선 직원으로 설명했지만 누가와 마가는 회당장이라고 기록했다)의 딸을 살려낸 경우는 이 보다 더하다. 수단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 간혹 예수님이 완전히 죽지 않고 가사(假死)상태에 빠진 자를 다시 살려 준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을 더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에서 치르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대신 곡(哭)해 주는 자를 고용한다. 23절의 피리부는 자와 훤화(한자 말로 시끄럽게 떠든다는 뜻)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돈을 주고 고용하면서 심장 박동과 호흡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부를 리 없다. 또 그들은 장의 전문가로 사람의 죽음만 보고 다니는 자다. 그런 자들이 볼 때 완전히 죽었는데도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24절)고 하니까 살짝 미친 사람이 아닌가 하고 비웃은 것이다. 인간이 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조금 있다 장례 절차만 마치면 이 땅에서 그 존재마저 완전히 사라진다.
본문의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경우 둘 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수단은 전무했다. 무엇인가 고치고 되살릴 노력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다. 나를 고치고 내 딸을 살리실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만 믿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무능 함도 철두철미 인식했다.
인간 쪽에 무엇인가 수단이나 미련이 남아 있으면서 따르는 것은 항복이 아니다. 그것은 타협, 중재, 조정, 계약 혹은 조건부 항복이거나 아니면 굴종이나 맹종이다. 믿음이란 일본이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터지자 완전히 속수무책이 되어 무조건 두 손 두 발 다 든 것과 같아야 한다. 원자탄의 가공할 위력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자기들 재래식 무기가 얼마나 허약한지도 함께 보았기에 항복한 것이다.
믿음이란 무조건 하나님만 먼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하며 어리석고 연약한지 그 모습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내 모습을 완전히 발가벗겨 보니까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 도저히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기에 갈급한 심령을 갖고 스스로 찾아 나와 하나님만 바라 볼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다.
일기를 거꾸로 기록하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 갈급함, 공허함, 슬픔, 눌림, 메임, 분노, 죄악을 도저히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만 해결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실 그 인정도 내 죽음으로 그 모든 고통에서 탈출하는 것뿐이지 궁극적인 내 존재의 용서와 구원은 죽음으로도 얻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그런 인간적 절망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그 둘을 다 해결 시켰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용서 받았고 세상의 절망 가운데서 구원되었다.
그래서 신자는 이젠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이라도 주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여전히 동전의 한 쪽면에 불과하다.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 분께 내 생명, 내 존재, 내 인생, 내 삶 전부를 내어드려야 한다. “주여! 오직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가 반드시 함께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이 수첩(Daily Planner)을 특이한 방식으로 적었다. 보통은 한 달, 일주일 전이나 최소한 아침에 그 날 할 일의 목록을 기록하고 저녁에 돌아 와 한 일 하지 못한 일을 확인하며 지워 나간다. 그러나 이 분은 반대로 아침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고 대신 저녁에 와서 그 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해 나갔다.
그렇다고 전기세, 렌트비 내는 날까지 잊거나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여 동(東)으로 가고 서(西)로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는 뜻이 아니다. 일상적인 활동과 자기 직업에 관한 일은 성실히 했다. 그러나 아침에 출근하면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저를 불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갔다.
저녁에 집에 와 하루를 되돌아보며 오랜 만에 만난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이웃에게 라면 한 박스 사 들고 찾아 갔다, 오늘 어떤 급한 일이 생겨 불안하고 염려되었지만 아침에 큐티하면서 본 성경 구절로 위로와 힘을 얻어 이겨냈다는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록되어졌다. 매일매일을 주님에게 먼저 내어드리고 자기의 전 존재와 삶을 하나님에게 항복하였더니 오직 그 분의 능력으로만 인도 받은 은혜의 기록들이 자연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신자의 전 존재와 인생을 주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이 꼭 선교사로 가거나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절대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필연임을 믿는 것이다. 그 어떤 일에라도 하나님의 선하고 영원하신 목적과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믿는 것이다.
벼랑 끝에서 시작하는 기독교 신앙
기독교 신앙은 항상 벼랑 끝 절벽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죽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는 원리다. 인간의 개인적 욕구가 완전히 고갈되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고 싶은 일, 계획하고 있는 일,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없애고자 하는 소원까지 다 없애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일들을 이룰 수단과 방법이 내 쪽에는 단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능력, 위로, 은총을 베푸실 이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인디아나 존스 3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장면이 나온 것을 기억하는가? 성배를 찾으러 주인공이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이제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싶어 문을 열어 제치자 절벽이 나타났다. 도달해야 할 마지막 문은 저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천길 낭떠러지에 사다리, 줄, 계단, 다리 등 건너 갈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도 없이 캄캄한 허공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이 어떻게 했는가? 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믿음으로 천길 낭떠러지 앞 허공에다 한 발자국을 내딛자 ‘쨘’ 하고 발 밑에 다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지는 것들은 누구라도 믿을 수 있다. 훤하게 보이는 것들 안에서는 어린아이도 얼마든지 뛰어 다닐 수 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은 신자라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며 심지어 불신자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훤히 보이는 것들이 끝난 곳 -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암흑 천지가 기다리고 있는 그 가장자리에 도달 했을 때 뛸 수 있어야 신자다. 환난과 고통과 상처가 성난 파도처럼 우리를 삼키려 덮칠 때에 그 앞에 담대하게 맞서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과 눌림이 계속해서 겹쳐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붙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더 내 디딜 수 있어야만 참 믿음이다.
그렇다고 눈을 찔끔 감고 막무가내로 절벽 밑으로 뛰어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보험 들듯이,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믿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곁에서 등을 떠밀어 할 수 없이 한 발 더 나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허공 속으로 한 발 더 내디디면 갑자기 발 밑에 다리나 하늘을 나는 담요가 나타나 하나도 안 다치도록 우리를 기적적으로 바쳐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점프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가운데 그 정도 믿음의 실력을 갖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대신에 내 생명과 인생을 이미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것으로 완전히 바쳤으므로 뛰어 내리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나를 사랑하고 복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이 그 어딘가에 함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방이 막혀 완전히 캄캄해진 속을 담대하게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현실적 주소
그런데 솔직히 우리가 오랜 동안 기도한 것이 해결 안 되고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일이 하나도 변화가 없으면 어떤 생각부터 드는가? “하나님은 절대로 이 일을 못하실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안 해 주신다는 뜻인가? 내 믿음이 약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이처럼 온갖 열심과 정성과 믿음을 다 바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상기하며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왜 이루어 주시지 않는가?” 의심 아니면 불평 둘 중 하나다. 오로지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한 부분이 전혀 없다.
기도하는 그 문제 하나하나에서 마저 인간의 무지무능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일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저는 항복하고 순종하겠습니다가 먼저 있어야 한다.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겠다는 바울의 믿음이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결단이나, 주가 우리를 살려주리라 믿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기꺼이 죽겠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헌신이 전혀 없다. 우리의 믿음에는 그저 빨리 응답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해 달라는 보챔과 떼씀만 있을 뿐이다.
본문에서 혈루증의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다고 한다. 한복에 다는 노리개나 매듭 같은 장식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의 가운 같은 겉 옷의 가장자리나 끝에 달아 놓는다. 마가복음 5장에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27절)라고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제자들을 비롯해 어떻게 하든 병을 고치고 복을 받아 보려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다. 남들은 부정하다고 접촉도 하지 않으려는 한 병자 여인이 재산을 탕진한 거렁뱅이 모습으로 그 남정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장식이 옷 끝 맨 밑에 달렸으므로 아마 틀림 없이 유대 광야의 그 척박한 먼지 길에 꿇어 엎드려서 만졌을 것이다.
“내 몸과 마음과 영혼과 존재 전부를 오직 주님의 뜻과 처분에 맡깁니다.저는 세상에서 고립무원(孤立無援) 된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했습니다. 만약 주님마저 저를 외면하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천부여 정말 세상에는 의지 없어서 두 손 들고 나왔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주님의 자비와 긍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며 기적적인 치유가 이뤄진다. 믿음이 믿음으로서 능력이 발휘된다.
양면이 다 없는 동전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자들을 주로 만나 치유와 이적을 베푸셨는가? 잘 아시는 대로 세리, 죄인, 과부, 고아, 봉사, 문둥병자, 중풍병자, 본문의 혈루증의 여인, 죽은 야이로의 딸 같은 자들이었다. 단순히 그들이 가난하고 핍박 받아 고난 가운데 있어 불쌍해서 도와주고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 어느 누구도 도와 주지 않은 자들이었고 스스로의 능력으로도 자기들 처지를 단 한치도 좋게 변화시킬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야 말로 사방팔방으로 도움의 손길이 완전히 끊긴 자(Helpless)로 하나님이 아니고는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바로 설 수 조차 없었던 자들이었다.
우릴 향하신 주님의 뜻은 절대로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희락과 구원이다. 신자가 환난과 상처와 병환 중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주님은 안타까워 하시고 우리보다 더 민망하게 생각해 속으로 통분히 여기고 계신다. 그럼에도 구원이 더딘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거나 그분의 손이 짧아서도 절대 아니다. 신자가 완전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성만 바라 보지 말고 신자의 무지무능함을 먼저 확인하여 주님께 완전히 항복하기를 말이다.
신자에게서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합니다. 주님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절로 나오길 바라신다. 주님은 그 고백만이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됨을 잘 알고 계신다. 우리의 체질이 진토 같고 너무 연약하여 주님의 사랑과 은총 없이는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우리를 지으신 분말고 누가 더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신자가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기 전까지는 주님은 우리를 관망 하고 계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항복하는 순간 주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서 우리를 위해 활동 하기 시작한다.
앞면만 있고 뒷면이 없는 동전의 모습이 어떠하겠는가? 볼품 없는 정도가 아니라 기형(奇型)으로 동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신자가 세상에서 왕 노릇하며 천 일을 지내는 것보다 여호와의 궁전에서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앞면 뒷면 양쪽 다 없는 믿음도 있다. 세상에서 왕 노릇 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는 것이다. 양면이 다 없는 것은 아예 동전이 아니듯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이런 믿음은 절대 없다.
동전이 양면이 있어야 제 구실 하듯이 믿음도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인간의 무지무능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고 신자는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며 구한 것을 받은 줄로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무엇을 구하든 그 구하는 것에 자기 전 인생을 걸어 주님께 항복함이 먼저 있지 않으면 주님은 항상 침묵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셔야 한다.
무수히 많았습니다. ㅠㅠ
철저히 아주 처절히 무능한 자가 바로 자신이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
볼 수 밖엔 없는데 그나마 아직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여겨질 때, 그 것을 가지고
또 재산입네 하면서 하나님께 보여드렸던 그 무지함을 깨닫기까진..
상황 속에서 왕따도 당하도록 만드셨고, 정말 바보 천치가 바로 나임을 심중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되게 하심도, 그리고 어린시절부터 생겨진 상처들로 인한 모난 성격까지
다 보여 주시며 고쳐주시는 그 신비하신 사랑 앞에 항~~복, 항~~복 할 때의 그 행~~복이란,
물론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들 너무 너무 많지만 이 미흡한 것들, 이 실수들,
이 죄악들까지도 온통 다 선으로 인도하시어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실 우리 주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련하디 미련한 저를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 귀한 말씀을 이 곳에
심어 놓아 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