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조회 수 2033 추천 수 91 2004.10.05 05:41:28

마태복음 강해 (121) 10/3/04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앙 생활

본문은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앞에 나온 내용을 배경 삼아 말씀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그럼 앞에 나온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한 마디로 말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신자답게 살면 핍박이 대단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견뎌야 하고 도저히 힘들면 맞상대하지 말고 차라리 피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신자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 특별히 끝까지 참아야 할 근거를 밝히셨다. 말하자면 신자가 핍박에 대처해 가져야 할 정신 자세와 각오에 관한 말씀이다. 쉽게 말해 어떻게 하면 핍박을 이길 수 있는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핍박이란 지난 주에 배운 대로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을 굴절 시키거나 타협하게 하거나 포기케 하는 모든 외부적 자극이다. 세상 풍조나 유행일 수 있고, 권세와 돈과 명예의 시험일 수 있고, 쾌락과 죄악으로 인한 유혹일 수 있고, 사탄의 궤계와 훼방일 수 있다. 나아가 외부에서 뿐 아니라 신자 자신의 내부에서도 올 수 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나 아직도 덜 성숙된 성품이나 기질에서 비롯될 수 있다.

핍박이 미치는 영향은 신자의 삶의 모든 부분이다. 심지어 아무 일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신자의 생각과 영혼에 까지 파고들어 썩게 만든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이며 무시(無時)로 생긴다. 여러분은 핍박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핍박이라고 하니까 자꾸 종교적 박해만 연상해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 같다. 시험, 유혹, 시련, 환난, 박해, 조롱, 멸시 무엇이든 신앙 생활하는데 방해되는 그 모든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신자는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기도하고 말씀 보며 믿음으로 이긴다고 대답한다. 솔직히 이 대답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 많다. 대답 자체는 정답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신자가 실제로는 그 말이 뜻하는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나아가 현실에 적용하는 모습에선 전혀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닌 신자의 가장 큰 고민과 갈등이 무엇인가? 왜 나는 아직도 시험과 유혹에 이렇게 약한가? 아무리 믿음으로 이기려 해도 왜 승리한 감사보다 져서 회개한 기억이 더 많은가? 이런 후회와 패배감은 도덕적 영적인 부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현실 삶의 문제에 들어가면 더 심각하다.

지난 금요일 한 집사님이 사업 관계로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해서 점심을 함께 했다. 제가 상과 출신이라 그런지 신앙 상담보다 비즈니스 상담 요청이 더 많다. 어쨌든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그 후 두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둘째 딸이 갑자기 유아 당뇨병으로 위독해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병원으로 찾아 갔더니 그 집사님이 “왜 이리 문제가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정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는데 며칠 전에 겨우 해결해 날아갈 듯 신나 숨을 좀 돌리나 했더니 더 큰 문제가 또 닥쳤다”며 한숨을 쉬었다. 목사로서도 위로할 말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 무턱대고 믿음으로 이기세요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인생살이에 아무리 노력해도 화끈한 대박은 없다. 노력한 만큼 개선하거나 스스로 세워 놓은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는 자도 거의 없다. 50, 60대에 들어서 20, 30대 때에 생각하고 꿈꿨던 모습으로 바뀐 자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20대 젊은이마저도 어렸을 때의 희망과는 달라져 있다. 인생이 그것만으로 그쳐도 다행이다. 때때로 불행과 고난과 핍박이 찾아 온다. 순서와 질서도 없다. 도저히 내 쪽의 사정, 여유, 능력,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들이 닥친다.

그러면 신자는 하나님을 향해 슬픔과 의심과 불평과 분노를 토로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핍박을 허락하십니까?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입니까?” 다른 한 편으로는 신자니까 당연히 기도하고 말씀 보며 믿음으로 이겨내려 노력해 본다. 그러나 사정은 단 하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신앙 생활에 승리와 기쁨은 찾아 볼래야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으로 시련과 믿음이 맞붙는 힘겨운 싸움이 계속될 뿐이다.
        
핍박을 이기는 첫걸음

대부분의 신자가 핍박을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을 바로 알지 못한다.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스승을 핍박한다면 그 제자인 신자는 더 센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24.25절) 예수 믿었기에 형통할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이 생각을 없애지 않는다면 아무리 제자 훈련 전코스를 수료하고 특별 새벽기도 40일을 참여해도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새벽기도 40일이 끝나는 날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과 고난이 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신자가 40일간 신앙 훈련을 받고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있다면 세상과 죄악을 조종하는 사탄이 가만 두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가 믿음이 세어질수록 사탄은 더 강하고 더 교묘하고 더 화려하고 더 고차원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자가 믿음을 가지면 태풍, 지진, 토네이도가 전혀 없는 안전한 무풍지대에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큰 착각은 없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오래 해도 이상하리만큼 이 부분에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법은 절대 없으니 아예 그 생각을 머리 속에서 완전히 뽑아내 버려야 한다.

믿음이란 태풍, 지진, 토네이도가 시도 때도 없이 몰려 오는 한 복판에 그 어떤 것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5) 신자가 지을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집이지 창수와 바람이 없는 곳에 짓는다고 하지 않았다.

마치 태풍의 눈이 태풍 한 복판에 있으면서 비 바람 하나 없이 고요하듯이 신자 또한 세상의 한 복판에 있으되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아야 한다. 태풍의 눈이 항상 태풍과 함께 움직이지 태풍 밖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신자 또한 세상을 떠나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핍박이 언제 어디서나 당연히 있다고 해서 “기도해서 해결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겠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일도 많은데…”라고 반쯤 단념해 버려선 안 된다. 핍박이란 머리 속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누구에게나 언제나 닥친다. 따라서 핍박을 인정한다는 것은  핍박을 자꾸 당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끝도 없이 닥치는 시험과 핍박을 겪으면서 자신의 힘으로 손을 댄 것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람직하게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심지어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보아도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음을 절감해야 한다. 사방팔방으로 완전히 막혀 도저히 꼼짝 달싹 못해 탈진한 체험이 쌓아져야 한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주실 해결책마저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조차 멈추어야 한다.

아니 목사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을 하는가 이상하게 여길것이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중단하라고 했지 신앙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해결책을 포기하라고 했지 하나님 당신을 기대하지 말아라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어떤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신자의 생각은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겹치게 하는가?”로 자연히 옮겨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갈등하고 고민하며 씨름 하는 초점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인가 탐구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동기와 목적도 하나님의 해결책을 얻어내려는 것에서 하나님 당신과 사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내 인생 여정을 이끌어가는 당신의 원칙과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전체적이고도 장기적인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도대체 어느 지점까지 이끌고 가시려는가? 어떤 사람으로 빚기를 원하시는가?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당신의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등등 신자 주위에 있는 모든 사건 모든 사람 모든 환경을 통해 이 잡듯이 샅샅이 훑으며 살펴서 그 해답을 찾아 내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하기 위해선 신자가 갖고 있는 선입관, 편견, 고정 관념, 상식, 지성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것은 다 버려야 한다. 바울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여 모든 세상 지식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3:8) 역으로 말하자면 세상 지식을 다 버려야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닥친 환난 중에 겉으로 보이는 현상, 진행 과정, 또 그것들이 이뤄낼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에 대한 기대, 분석, 어림짐작, 희망 등을 몽땅 버려야 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해결 가능성을 완전히 제로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신자의 눈 앞에 펼쳐진 그 일들이 절대 전부도 아니요, 실체도 아니며,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이큐 200의 세상 최고 전문가가 주는 조언과도 아무 연관 없는 전혀 엉뚱한 해결책이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100% 인정해야 한다.

기적과 대박을 바라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 이뤄진다는 무조건적 신앙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자 자신이 신령해지고 초월적 능력을 얻어 앞 일을 꿰뚫어 보라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그 정 반대다. 시험과 환난에 수도 없이 쓰러지고 넘어지며 계속 실패를 맛보더라도 문제 해결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당신과 씨름 하라는 것이다. 신자의 입에서 “왜 저에게(Why me?), 왜 또 이런 일이(Why this?)”가 수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져 나와야 한다.

신자를 납득시키고야 마는 하나님

그러면 언젠가는 그 핍박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순간이 반드시 닥친다. 그 순간이 핍박의 와중일 수 있고 아니면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 난 이후일 수도 있다.(대개의 경우 환난이 끝난 이후다.) 하나님은 그런 시련 가운데도 신자가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꿈도 못 꾸며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이미 예비해놓으셨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가장 선하고 유익하며 합당하여 완전한 것임을 깨닫고 소름 끼치도록 감탄하며 놀라게 된다.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때에 그럴 수도 있다. 힘들고 지쳐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염려 불안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에는 출처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평강과 안도감이 스며들고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또 시련이 끝나고 나면 그 동안에 모르고 지나쳤던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다 그 결과를 맺기 위해 반드시 있었어야만 했던 한결 같은 준비 과정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런 시련이 없었다면 그런 좋은 결과를 절대로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당신을 탐구하는 신자에게는 자비와 긍휼에 가득 찬 미소를 머금은 당신의 얼굴을 꼭 보여 주신다.

꼼짝도 못할 정도로 사방이 꽉 막혀 견디기조차 힘들어 하나님에게 의심과 불평에 가득찬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었던 그런 순간들조차도 당신의 은혜가 넘치지 않았던 적이 한 순간도 없었음을 뒤늦게야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과 권능 앞에 신자로 하여금 완전히 두 손 들고 무릎 꿇어 항복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는 자신의 자신 되심을 반드시 납득시키고야 만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핍박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으니 끝까지 견디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진리와 권능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당시는 어떤 핍박이 있더라도 십자가 복음이 진리라는 것이 판명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제자들더러 핍박에 굴하지 않고 집 위에서(27절)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복음을 선포하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시고 오순절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당신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확증하셨다.    

본문이 오늘 날의 신자에게 주는 의미도 같은 뜻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어떤 시련과 시험과 핍박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은 절대로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이다.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한 후 보호하고 인도하는 당신의 계획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진짜로 믿어져야 믿음이다

미국에 미라벨 몰간이라는 유명한 여류 작가가 있다. 그녀는 대학 시절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감격을 맛보고 자신의 일생을 주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기로 헌신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그녀를 변호사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주부의 생활을 20년간 계속하게 했다. 남편과 자식과 이웃과 부대끼며 늘상 반복되는 일의 스트레스와 함께 보냈다. 변호사의 아내였으니 오죽 바빴겠는가? 신앙의 승리도 없었고 자기를 그렇게 이끈 하나님께 의심과 불평으로 지샜다.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하나님은 결국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하면 여성들만의 문제점을 다루는 전문 작가로 탈바꿈 시켰다. 그녀의 글은 단순한 교리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체험에 기준 하여 성경적 시각으로 해석했으므로 수 많은 여성들이 생생한 감동을 받아 주께로 돌아 왔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를 공부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세상에 나가 핍박과 당당히 맞서지 않으면 성숙하지 못한다. 믿음은 현실의 삶 속에서 시련과 핍박이라는 자양분을 먹어야만 자란다.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해서 의지력이 강해지고 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서 무슨 문제나 이길 수 있는 배짱과 담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감나무 밑에 드러누워 감이 익어 홍시가 되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도하고 말씀 보았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기대하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수단과 방법처럼 더 훈련하면 능력이 늘어나거나 지식이나 교양처럼 더 많이 쌓으면 성숙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란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서 어떤 의심도 없이 정말로 믿어져야만 믿음이다. 진리가 진리로써 힘을 발휘하려면 본인이 보고 듣고 만져 직접 체험하는 것만큼 확실한 길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그 외의 어느 것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어지는 상태가 믿음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으며 현실적으로 형통하는 것이 전무해도 그 분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기쁘고 즐겁고 신나야 한다. 그 분이 주시는 성령으로 호홉하고 신령한 생명력으로 활력이 넘쳐야 한다. 비록 현실적 여건은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고 시련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 짜증과 불평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신다는 것만은 죽어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 분은 절대 나를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완전히 붙들려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를 통해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며 또 그 분의 진리는 절대로 감출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해 신자가 진짜로 핍박을 이겨야 이기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이 실제 신나고 즐거우며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 나와야 한다.  

신자란 핍박이 닥쳐 와야만 그때 가서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선 핍박을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신자란 진리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당연히 따르지만 더 이상 그 핍박이 내 삶과 인생과 존재에 추호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 자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인생인 것이다. 모든 가치관과 사고 방식과 삶의 태도(Life Style)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진 자다.  

저는 몇 년 전의 큰 수술 이후로 왼손 팔목에 커다란 흉터 자국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 달리 손목 시계를 오른 손에 찬다. 남들 보기에는 이상하고 어색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습관이라 저 자신은 아무 불편이 없다. 대신에 이제 그 흉터 때문에 왼손으로 옮겨 찰 수는 도저히 없다.

신자란 바로 그런 존재다. 예수 믿기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래야 돌아 갈 수 없다. 이전의 삶을 회상하면 할수록 온갖 죄와 실패한 자국이 너무 흉측하다. 이제 예수 안에 들어 와 있는 삶이 완전히 몸에 배여 세상 사람이 아무리 조롱하고 핍박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핍박을 아무렇게도 않게 여기게 된 것이다.

기생 라합이 받은 영광      

모세의 초반기 40년 인생은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세계 최강국 애굽의 왕자로 지냈기에 세상 사람이나 본인이나 최고로 성공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살인자요 도망자 신세가 되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중반 40년 인생은 미디안 광야의 목동으로 보냈다. 당시 목동은 어린아이나 하는 일이었는데 40이 넘은 어른이 그것도 80 노인이 될 때까지 했다. 본인으로선 최고의 수치요 어쩌면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로 지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이나 본인에게나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바로의 궁정에서나 미디안 광야에서나 모세 자신에게는 실패요 허송 세월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완전한 성공이었고 당신의 은혜와 사랑이 그를 떠난 적도 없었다. 종반 40년에 걸쳐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준비시키는 기간이었다. 그런 실패를 거치지 않았다면 모세는 홍해를 가르는 모세가 절대 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기생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창녀였다. 여자로선 최고 밑바닥까지 내려간 비참한 인생이었다. 전 평생을 걸쳐 눈물과 한숨과 비탄과 절망뿐이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랬는가? 어느 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 준 그날까지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 중에 유일하게 구원을 받고 나아가 믿음의 위인으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히11:31)도 얻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 정탐꾼들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신 계획 속에 신자의 삶과 인생은 완전히 붙잡혀 있다. 그래서 아무리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출구가 없어 보일 때라도 그 사방에 둘러 싼 벽들의 실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의 벽이며 그 분이 예비하신 축복과 사랑과 은혜로 둘러싸여 있음을 아는 자다.

구체적으로 그 권능이 어떻게 진행되며 무슨 결과를 맺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 초라하고 볼품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기 일생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비록 하루에도 몇 번씩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온전하신 계획에 참여 시키려 훈련하고 준비하고 끌고 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하는 자다.

신자가 생각과 소원은 자꾸 세상 쪽으로 향하면서 당장 눈 앞의 어려운 문제만 해결하려고 기도하고 말씀 보아 믿음으로 이기려 해선 절대 승리가 없다. 종교적 시늉만 낸 것이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짜증과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빈 껍데기 신앙만 붙들고 있는 꼴이다. 교회 생활 10년 20년이 지나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앙을 탈피하지 못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 신자 자신의 힘을 비축하고 실력을 쌓아가는 싸움이 결코 아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다.(호4:6) 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당신을 아는 지식을 쌓는 수 뿐이다.

신자는 태풍의 눈처럼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눈이 되어야 한다. 태풍은 그 눈이 가는 대로 따라 간다. 신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한 영향력과 신령한 능력으로 앞장서서 세상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세상의 시련과 핍박에 지거나 두려워 하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사라의 웃음

2011.09.24 12:12:14
*.169.30.48

신자들이 당하는 핍박, 참 다양한 모양의 핍박들이 있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현실의 고난과 어려움 보다 신자 자체를 바라보며 세상이
맘대로 잣대로 재고 재단하여 맘대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며 그 것을
가지고 그 신자라 생각할 때, 그런 것이 현실의 고난 보다 더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함과 도무지 견디기
어려울 때는 차라리 피하는 지혜도 필요함을 배웁니다. ^^

날마다순종

2020.10.01 16:05:27
*.14.99.253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에겐 주님께서 늘 함께해 주시며 지금도 선으로 이끄시고 계심에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건 형통하고 편하건 상관없이 나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쁘고 즐거워 오직 주님만을 더욱 의지하며 감사할뿐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고 또 그보다 더 좋은 주님의 말씀을 늘 부어주심에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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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33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80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8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3] 운영자 2004-09-14 2417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614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51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28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2] 운영자 2004-08-17 2315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202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9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508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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