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조회 수 1614 추천 수 85 2004.09.07 06:13:52

마태복음 강해(117) 9/5/04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 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기도도 해주지 않는 이상한 목사

저는 불신자와 함께 식사하거나 어떤 모임을 가지면 기도를 하지 않는다. 물론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받거나 제가 판단해 꼭 해야겠다고 싶은 경우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기도도 하지 않는다고 가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불신자와 함께 있을 때에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에도 분명 몇 가지 장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기독교가 단순히 병이 낫고 돈을 벌어 현실에서 형통을 비는 종교로 저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 주기 싫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목사가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저들의 마음에는 복을 빌어달라는 뜻 뿐이지 거룩과 의와 영원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대뜸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또 믿음 없이 하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기독교의 기도는 전혀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헛수고일 뿐이다. 십자가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고 그 앞에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자의 기도는 주문이요 염불이다.

지난 주는 예수님이 전도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제자들이 준비할 것에 관한 말씀이었고 오늘의 본문은 전도 중에 해야 할 일을 가르친 것이다. 불신자를 만나면 가장 먼저 기도해 주라고 했다. 전도의 핵심이 불신자의 평안을 빌어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 제 생각이 틀렸고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목사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라도 평신도의 그것과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목사가 더 거룩하고 고상하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성도도 마찬가지이지만 목사라는 타이틀이 항상 붙어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에게는 목사의 모든 행위는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내용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불신자들 앞에서 복을 비는 기도를 하면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처럼 복을 비는 종교에 불과하다는 착각을 굳어지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의 호감을 사면 전도에 효과가 있지 않겠나 혹시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와는 반대다. 여러분이 전도를 해 보아서 알겠지만 전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불신자들은 목사의 기도를 받으면 색다른 종류의 부적을 그것도 공짜로 얻었다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인생을 걸고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본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그런 내용이다. 평안을 빌어도 안 받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거기다 예수님은 저보다 여러 칸 더 나간 말씀을 하셨다. 불신자가 완악하여 기도 해준 평안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빌어 준 복이 기도한 신자에게 되돌아 온다고까지 했다.

심지어 14절에선 발에 먼지를 떨라고 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겐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는 교제가 금지 되어 있었다. 불가피한 일로 이방인 동네에 다녀오면 유대 땅을 넘어서는 경계에서 신발을 벗어 먼지를 떨었다. 혹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 오염되었을지 모르는 모든 죄악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상징으로 한 일종의 정결례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15절에는 아예 불신자를 저주하는 말씀까지 하셨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보다 더 악하니 유황불에 타 죽는 것보다 더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어떻게 전도 훈련을 시킨 셈인가? 모든 사람이 목자 없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양이므로 불쌍히 여겨라. 그래서 가는 곳 마다 때를 얻든 못 얻든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주며 긍휼한 마음으로 평안을 빌어주라. 전도의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천국 복음을 선포하기만 해라.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 이후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까지 전도했는데도 안 믿으면 내가 대신에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그리고 어차피 그들은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니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식이다. 인애와 자비의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완전히 내 편 네 편으로 편가름을 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지금 이해한 뜻 그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분명히 맞다. 예수님은 나중에 더 노골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고 분명하게 편을 가르셨다.

도리어 신자에게 이런 인식이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이 문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꾸 도덕생활로 대체하려 한다. 특별히 유교적 사고 방식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중용(中庸)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서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다. 무조건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데 엄격히 따져 기독교에는 그런 법이 없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신자 자신의 삶의 태도, 인생의 목표, 모든 사고의 중심을 세상 편에 설 것인가 예수님 편에 설 것인가부터 먼저 확실하게 한 후에 예수님 편에 서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가치관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놓고 말로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자라고 한다. 세상 사람과 같이 어울려 온갖 쾌락과 죄악에 물들어 같이 즐기면서도 핑계로만 그들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한다고 말로 둘러대어선 안 된다.

성경은 오히려 죄악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히12:4) 예수님도 분명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고 했다. 뜨겁게 박수 치며 찬송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세상에 살 때에 과연 진실로 죄인들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죄를 사랑하는지 정확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칼로 두부 모 짜르듯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차 없이 둘로 나누고 그 중 한 편에 붙어 서 계신다. 그 나누는 기준이 인종, 피부, 학벌, 문벌, 재물, 사상, 종교가 아니다. 오직 자기를 믿는가 안 믿는가이다. 세상 사람들은  왜 기독교만 옳다고 주장하여 종교간에 차별을 조장하느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라는 종교체계가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직 예수님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뿐이다.

이래도 돌아 오지 않을래?

예수님의 편가름은 인간적 지식과 종교적 교리로 접근해선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수천 년간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셨다. 차고 넘치도록 주셨다. 만드신 자연 속에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보여 알게끔 계시 해 놓으셔서 핑계치 못하게 했다. 또 택한 백성을 통해 주신 이적과 말씀으로 당신의 당신 되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셨다.

그에 반해 인간은 끊임없이 그 분을 배반했다. 교만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죄악을 쫓았고 심지어 그분에게 대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했고 도저히 그 경고를 듣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자신의 뜻을 밝혀 주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가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의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는데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소수의 백성을 남겨두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다 마지막 단계에 가서 당신의 독생자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시면서 인간더러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의 품 안으로 돌아 오라고 초대하셨다. 알기 쉽게 표현해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나는 너희를 지은 창조주요 너희는 나의 피조물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나의 자녀다. 내가 이렇게까지 완전히 발가벗고 내가 누구라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 주었으니 너희가 내 곁으로 돌아 올 것이냐 말 것이냐?”라고 절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수단으로는 최후의 것이다. 절정의 것이다. 완전한 것이다. 유일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을 베푸실 방법은 이젠 더 이상 없다. 십자가에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로 모든 것을 다 주셨다. 당연히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자 이제 내 편에 붙을래 떨어질래 요구하실 수 있다. 주님이 편가름 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어쩌면 하나님이 너무 늦게 하신 감이 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예수에 대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들마저 몽땅 지옥에 보내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한다. 하나님의 입장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은 항상 실패만 거듭했다. 오직 쾌락과 죄악만 쫓았지 거룩과 의와 영원과는 스스로 완전히 담을 쌓았고 하나님을 알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은 적이 없었다.

인간의 실패는 쌓이고 또 쌓인 반면에 하나님의 인내도 그에 따라 쌓이고 또 쌓였다. 인간의 죄악이 차고 또 찰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도저히 인간 구원의 길이 없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게 하시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당신이 인간을 향해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 참으셨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에도 인간은 실패했고 하나님은 참고 용서해 주셨다.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조차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하고 인간의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이런 예수님께서 자기 편을 모으는 것을 두고 인간이 감히 무슨 차별이니 불공평이니 불평할 수 있는가?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세상의 죄악을 탐하며 제 마음대로 살겠다는 자들이다. 성경을 단 한 줄도 읽어 보지 않고 예수님을 욕한다. 정말 진심으로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고 불평하는 자라면 아마 하나님도 용서하고 구원해 주 실지 모른다. 사실은 정말 제대로 성경을 읽었다면 하나님 앞에 자기 죄의 용서를 구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편 가름의 이유

예수님이 불신자를 향해 평안을 빈 기도가 신자에게 되돌아 오고 또 전도가 씨가 안 먹히면 신발의 먼지를 떨어라는 말씀의 뜻이 바로 하나님은 인간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 모르느냐로만 편가름 하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런 부분에 괜히 주눅이 들거나 미심쩍어 할 필요 없다. 나는 절대로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다는 확신을 당당하게 가져야 한다. 현실의 삶도 그 바탕 위에서 자신 있게 살아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고 부러워 하도록 해야 한다.    

빌어 준 복이 되돌아 오는 것이 전도가 잘 안 되는데도 조롱을 받아가며 하나님을 위해 충성한 수고를 보상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을 위해 복을 비는 선한 행위를 했으니 대신에 복을 주겠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앞에 항복한 자의 기도는 절대로 땅에 단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께 경배 찬양 감사 회개와 함께 입술의 고백을 통해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이 선하신 결과로 응답하고 보응한다. 기도가 슈퍼 마켓에서 쇼핑할 것 적는 리스트처럼 단순히 신자의 필요와 희망 사항을 적어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살아 숨 쉬는 생명 그 자체다. 십자가에 살아 있는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과 은혜가 신자의 기도에 넘치도록 부어지며 그 기도가 이뤄질 때까지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이 하루 종일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 주겠다거나 교회에 가서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되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졸지도 아니하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신자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천하만물의 주인이시자 자비와 긍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신자를 위해 24시간 단 일분 일초도 빠지지 않고 대기 상태로 계신다.  오직 신자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이뤄주시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그 분이 바로 내 편이다.

신발에 먼지를 떨어라는 것이 예수님이 불신자를 미워해서 저주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유황불에 타 죽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그런 심판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으로 가느냐 극과 극으로 딱 부러지게 둘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을 두고 혹시라도 타협하거나 중재하거나 혹은 섞어 희석 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말고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하면서 불신자의 평안을 비는 기도가 그 집 장사 잘 되고 아이들 공부 잘하라는 기도는 아니지 않는가? 참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자녀로 삼아 주셔서 지옥 불에 안 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어야 한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헐어달라고 해야 한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질 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전도자가 진심으로 그런 기도를 하면 모든 사람이 보일 반응은 딱 부러지게 Yes 아니면 No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14절에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먼지를 떨어라고 했다. 그들 앞에서 떨면 차별이자 교만이다. 이 말씀은 신자를 향한 말씀이다. 세상에 딱 둘로 나눠지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음을 신자가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 앞에 항복한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기도는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뤄지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자가 아무리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도 권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영역 둘로 나눠지는 그 경계선이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내가 택한 자는 반드시 경계선 저편으로부터 이쪽으로 구해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반드시 복을 주신다. 자기 백성을 더 이상 더럽고 추하고 죄악과 악령이 지배하는 사탄의 소굴에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꺼내오신다. 그들을 자기 백성과 자녀로 삼아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권세를 주신다.

그래서 하늘 보좌로 금 대접의 향기로 담겨 올라간 성도의 기도는 다시 금 대접에 넘치는 은혜로 담겨져 지상으로 내려와 신자의 삶과 인생을 반드시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 자기 백성을 더 이상 목자 없는 어린 양으로 방치해  세상에서 상처 받고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신다. 자기 자녀들의 삶이 질병, 귀신, 재물, 학벌, 문벌, 권세, 명예, 자존심, 체면, 위신, 눌림, 메임, 사상, 도덕, 종교 등으로 좌우되거나 영향 받지 않게 해 주신다. 거룩과 의와 생명이 충만하게 작동하는 영역 안으로 옮겨 주신다. 비록 신자 쪽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 부족하고 세상에서 여전히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보살핌에는 절대로 실패가 없다. 그런 영역으로 이미 완전히 옮겨진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다.      

미지근하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 어디 어떤 일에서건 반드시 내 편 네 편으로 편을 가르신다. 불신자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죽기 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반면에 죄와 사탄과 사망은 당신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의 본질이 선이요 거룩이요 사랑이시기에 그 반대가 되는 것들과는 절대 공존조차 못하신다. 그 분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선호도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본성상 사악한 세상과는 절대 함께 하지 못하시기에 자연히 편이 갈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끼리는 어느 누구도 세상의 인간적 기준으로 편을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아무리 흉악한 사형수에게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평안을 비는 기도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이라도 주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전도란 또 반면에 하나님 당신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간에 두고 사람을 오직 둘로 나눌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전 우주를 다스리는 유일한 원리이자 수단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다. 그래서 신자더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거든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요구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신자 중에 간혹 순진한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아마 후자일 확률이 크겠지만 전도에 열심을 내고 불신자를 위해 기도해 주면 자기에게 복이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전도란 한 번 찔러 보고 안 되면 내가 대신 복 받지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대단히 심각하고 엄청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영원히 살려내느냐 죽이느냐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합동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 애끓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증거 해야 하고 끝없는 긍휼을 갖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불신자를 위해 신자가 도와 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일은 오직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 뿐이다. 그 외에 어떤 방안도 그 사람이 살고 죽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상대의 전 존재가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신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께 빌어 주어야 한다. 그러다 전도에 실패하는 일이 있을수록 경계선에 서서 내가 소속된 위치와 신분과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그 때마다 새롭게 확인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미지근하신 분이 아니다. 차거나 덥거나 하신다. 불신자에게는 극도로 차갑고 신자에게는 그럴 수 없이 따뜻하다. 그래서 신자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빛과 어두움 둘로 나누신다. 그리고 항상 빛 쪽에만 계신다. 그 분이 빛 자체이기에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으며 그분이 가는 곳에는 어둠이 물러갈 수 밖에 없다. 신자가 분명히 빛 가운데 서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주께 평안을 비는 기도는 절대 단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라의 웃음

2011.09.19 09:46:23
*.161.100.136

추천
1
비추천
0
이 편, 저 편이 너무도 정확하신 하나님이시건만 우리는 인간적인 의를 가지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그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서로 사랑만 하자로 흐르기가
십상임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편과 저 편의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그런 선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칫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랑에
묶일 때가 참 많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사랑이라 착각하면서, 또 가끔
단호한 분들의 태도에 좀 차갑지 않은가 싶어 갸우뚱해 가면서...

진정의 사랑은 십자가 저 편의 사람을 오직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십자가
이 편의 곳으로 옮겨짐의 그 바램, 너무도 애끓는 바램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맘이 바로 아버지의 맘이심을 배웁니다.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다시 한번 곰곰이 묵상하도록 배려해 놓으신 글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6 결혼 지참금 때문에 자살한 세 처녀 (마11:20-24) [1] 운영자 2004-12-07 2382
85 왜 불신자는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가? (마11:13-19) 운영자 2004-11-30 2546
84 하나님 실수하신 것 아니에요? (마11:7-12) [3] 운영자 2004-11-16 3081
83 잘 믿는데도 왜 삶은 자꾸 꼬여 가는가? (마11:1-6) [1] 운영자 2004-11-10 2883
82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졌다. (마10:40-42) [2] 운영자 2004-11-01 2754
81 기독교는 분리적이어야 한다. (마10:34-38) [2] 운영자 2004-10-26 2044
80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1] 운영자 2004-10-19 2170
79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1] 운영자 2004-10-13 1807
78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33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80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8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3] 운영자 2004-09-14 2417
»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614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51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28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2] 운영자 2004-08-17 2315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202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9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508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59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