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분리적이어야 한다. (마10:34-38)

조회 수 2044 추천 수 101 2004.10.26 04:30:20
마태복음 강해 (124) 10/24/0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신자가 받는 네 가지 보상  

지난 몇 주간 신자가 복음 안에 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면 반드시 시련과 핍박이 따른다는 문제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믿음이란 그런 시련을 없애는데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여 고난 중에도 그것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다. 다른 목사님들처럼 잘 믿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신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니 아마 당황 되고 괜히 좀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유별나게 해석하거나 개인적 고집을 피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전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본문 34절에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을 시작했으며 39절에선 어떻게 마치는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라고 하셨다. 신자가 핍박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형통, 축복, 은혜, 능력, 성공 같은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에 예수님은 신자가 받을 보상 네 가지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34절에 세상과 화평 하는 대신 분쟁을, 35-37절에 가족간 화목 대신에 불화를, 38절에 평안 대신 고통을, 급기야 39절에는 생명 대신에 죽음이라고 하셨다. 신자가 기대하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정 반대의 것들 뿐이다.

혹시라도 이 말씀을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전도하다 박해 받은 일만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34절에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과 그 목적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38절에 나를 좇는 자가 겪을 것에 관해 말씀 하셨다. 모든 시대 모든 신자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간혹 신자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가족들이 교회 일만 최우선 하는 것을 싫어하면 아예 무시하는 자가 있다. 심지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원수처럼 취급하는 데 아주 잘못된 것이다.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신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살 때에 가족들이 반대하고 핍박하면 가족보다는 예수님의 뜻을 따라라는 것이다. 가족을 이전보다 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나아가 34절에서 분명히 신자에게가 아니라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불신자가 신자를 먼저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자가 나서서 불신자나 가족과 불화를 조장해선 안 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

그런데 최근 세상 돌아 가는 상황은 이 말씀대로가 아니고 거꾸로 되어 가는 것 같다. 기독교 밖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자, 화목하자, 종교간에 관용을 베풀자”이다. 반면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두고 부시 대통령의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이 일으킨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비난 받고 있다. 또 눈 앞에 닥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미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나라를 완전히 둘로 나누었다고 난리다. 모든 종교인들이 전인류가 서로 화합하자고 하는데 유독 기독교만이 배타적 독선주의를 고집하는 앞뒤가 꽉 막힌 분리주의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에 맹세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고 또 제가 그런 성격이 아니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하나님 앞에 목사라는 직분을 걸고 한 마디 해야겠다. 그 모든 비난은 사탄의 아주 교묘한 속임수이니 절대 속아 넘어가거나 조금이라도 흔들려선 안 된다.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이 사탄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도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된 피해자들로 사탄에게 속고 있다. 어떻게 속고 있는가 하면 종교인끼리는 당연히 서로 화목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종교 교리와 체계는 서로 관용할 문제가 아니다. 사탄이 인류 화합이라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워서 불신자로 이 둘을 뭉뚱그려 같은 문제인양 생각하게 해 정확한 구별을 못 하게 했다.  

진리란 그 본질상 절대적으로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진리란 뜻이 무엇인가? 쉽게 말해 어떤 사실이 분명히 100% 맞다는 것이다. 산수로 따지면 9 곱하기 9는 81이 답이 되듯이 진리란 딱 하나뿐이어야 한다. 아무리 80이나 82가 정답과 비교해 거의 99% 비슷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땅에서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며 서로 사랑하는 부분에선 종교간에 큰 차이가 없다. 점수로 치면 90점 80점 대동소이하다. 아무리 예수님이 산상 수훈을 통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적 계명을 주셨다고 해도 그것으로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가 종교로서 가치를 가지는 가장 근본 핵심이 무엇인가? 죽은 이후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느냐 하는 문제다. 이 부분에선 진리는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현존하는 종교의 숫자만큼 수천 수만 가지 구원의 길을 제시해 놓고 인간더러 알아서 믿어라고 하실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모든 종교가 가는 길이 다 옳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 종교 가운데는 통일교처럼 인간 교주를 숭배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미신, 심지어 사탄을 믿는 것까지 온갖 이단 종교가 많다. 어느 누가 봐도 분명히 잘못된 종교가 많다는 것은 벌써 모든 길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 반드시 그 중에 옳은 것을 골라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종교라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다. 불교는 사람이 죽은 후에 생전에 쌓은 ‘업(業)’에 따라 다시 쥐나 황소나 되어 이땅에 되살아 난다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죽은 후 반드시 지옥이나 천국 둘 중 하나로 영원한 운명이 나눠진다고 한다. 그럼 이 둘 중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응당 틀려야 한다.

또 이슬람은 알라 신을 포교하다가 믿지 않으면 칼을 들어 죽이라고 했다. 칼을 든 자는 신자이고 죽어야 할 자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더러 똑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다가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는가? 세상이 칼을 들고 신자는 그 칼에 맞아 죽어라고 했다. 이 두 가르침이 동일한 하나님에게서 나왔을 리는 절대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 신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에 가고 기독교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천국에 간다고 하면 말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논리적 궤변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한 분 동일하지만 종교마다 가는 길만 다르다고 주장해놓고 끝에 와선 각 종교가  믿는 하나님이 달라져버렸다.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되었다. 신이 여럿 있으면 벌써 그 신들은 절대자가 아니다. 절대자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오직 한 분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길

그 하나님은 가뜩이나 짧고 한 번 뿐인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평생토록 어느 길이 진리인지 찾고 헤매다 죽어라고 방치하실 분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그 분은 인간의 경배를 받을 가치가 없다.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당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하나로 인간이 알 수 있도록 명백하게 제시해 놓으셔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당신으로 이땅에 직접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 알게 하셨다. 모든 인류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구원에 관한한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 아무도 없다.

십자가가 아닌 다른 모든 길은 인간 스스로 구원의 진리가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착각하고 더듬어 찾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탄의 미혹하는 영에 속아 계속해서 더듬고 있는 중이라 어느 것이 진리라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종교간에 관용하자는 핑계만 대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도 바로 그런 뜻이다.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핵심 단어가 하나 있는데 34절의 ‘불화’가 그것이다. 그 뜻이 단순히 서로 사이가 좀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3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원수 사이가 되는 것이다. 언뜻 보면 가족간에 원수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이 과장을 심하게 했거나 잘못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가족간에도 서로 경쟁하여 시기하고 미워하지만 원수까지 되는 법은 좀체 없다. 형제들끼리 매일 서로 싸우다가도 다른 집 아이에게는 힘을 합해 대항한다. 물론 간혹 부모 자식 간에도 의절하고 형제끼리 완전히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가 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항상 죄책감이 들고 상대에 대한 관심은 갖고 있는 법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불화’나 ‘원수’는 좋고 싫어하는 감정이나 태도가 극단적으로 흐른다는 뜻이 아니다.

불화라는 헬라 원어의 뜻이 둘로 완전히 나눈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인 되시며 또 그 분이 인류 구원의 길로 제시해 놓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100% 절대적 진리임을 믿는 신앙과 그 외의 다른 모든 사상과 종교는 물과 기름같이 분명하게 따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결코 서로 타협, 보완, 수정, 포용 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쪽이 맞으면 다른 쪽은 틀려야 한다. 가족들 중에도 그 진리 편에 서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 둘로 명확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든지 아예 믿지 말아라

언젠가 말씀 드린 대로 절대자 하나님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있으면 100%의 확률로 분명히 있고 없으면 0%의 확률로 아예 없다. 아무리 인간의 고차원적인 과학, 심오한 사상, 고매한 도덕, 신령한 종교적 수사로 구원의 길을 수만 가지로 제시해도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성과는 아무 상관 없다. 인간이 인정하든 안 하든, 믿고 싶던 안 믿고 싶던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가 있으면 분명히 있고 없으면 분명히 없는 것 둘 중 하나는 엄연한 진리다.

인간이 이땅에 존재하게 된 유래는 창조든 진화든 둘 중 하나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것은 당연히 틀린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태도, 사고 방식, 인생에 대한 목적과 가치관이 이 둘 중 하나에 바탕을 두고 형성해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살겠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조가 맞다면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은 있고 구원과 심판의 둘 중 하나로 영원한 운명이 갈라질 수 밖에 없다. 그 때 인간은 과연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어느 길이 진리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탐구해야 한다. 진화가 맞다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며 심판도 지옥도 없으니 이땅에서 배불리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따라서 인간이 절대자에게 아니 신자가 하나님에게 취할 태도는 오직 100%의 완전한 순종과 경배뿐이다. 시쳇말로 믿으려면 화끈하게 확실히 믿어야 한다. 어정쩡하게 혹시 하나님이 있으면 어쩌나, 천국과 지옥이 있을지도 모르니 밑져야 본전인데 보험 든 셈치고 믿어보자, 그래도 나중에 하나님이 열심히 교회 나온 것만은 잘 봐주시겠지, 예수님이 구원의 길이 유일한 진리인지 아닌지 골치 아파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하나님께 빌면 고달픈 현실에 좀 도움은 되겠지 뭐, 이 모든 것은 결단코 믿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40% 50% 쯤의 확률로 믿을 수는 없다. 그 분은 100%의 절대적 하나님이라 그런 어정쩡한 믿음으로는 그 분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던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던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신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점검할 수 있는 키는 간단하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 보면 된다. 그리고 그 확신의 근거가 자신 쪽에는 단 하나도 없으며 오직 예수님이 자기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임을 믿고 감사하는가 확인해 보면 된다.  

예수님이 39절에 당신을 좇으려면 목숨까지 잃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화끈하게 믿으라고 겁주기 위해 과장한 말씀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십자가 진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사탄의 흑암의 세계에서 종 노릇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두 곳을 나누는 경계선이 골고다 언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종교간 관용하자는 진짜 속마음

현재 불신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관용과 화합을 요구하고 그것을 거절하면 분리주의자로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혹시 착각할까 미리 말씀 드리는데 신자가 진리 가운데 굳건하게 서 있어서 세상으로 핍박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종교간 화목과 인류간의 화합이라는 명분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겠다는 속셈이다. 죄에 남아 있고 싶고 죄 짓는 것이 더 좋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표시다. 절대자 하나님에게 항복하기 싫다는 것이다. 죄를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서로 사랑하자는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

간단한 예로 불신자들은 최근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애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문제지 죄가 아니므로 종교가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간음과 마약과 온갖 죄악을 동성애와 도매금으로 같이 처리해 함께 즐기기 위한 핑계다. 저들에게는 절대적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미 절대적 죄가 없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없다. 혹시 있더라도 인간이 제 마음대로 하는 일에 제발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자라 해도 그들보다 별로 나은 것 같지 않다. 왜 그런지 아는가? 신자도 자기 코가 석자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으며 그 사랑해야 할 이웃에 동성애자까지 포함시키는 것이 싫다. 그런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무엇이든 옳은가 틀렸는가 선악의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기독교를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퇴색시키고 윤리와 도덕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죄를 강조해서  죄인인 이웃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핑계로 삼았다.

신자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과 죄악 앞에 당당하게 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이 세대와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은 없이 크리스챤 대통령을 뽑기만 하면 동성애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모순과 죄악을 불신자와 다른 종교인들의 책임으로 전가하려 한다.  이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자는 그들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다. 또 그 책임이 목사 선교사 기독교 대통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더 크게 있다.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지 않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종교간에 화목하자고 주장한다.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들키기 싫어 종교간에 화목하자는 주장 속에 얼마나 교묘한 사탄의 속임수가 있는지 도무지 알아 볼 생각도 않고 주눅부터 든다. 최근 교계의 지도자들마저 십자가 외에 인간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지경에 까지 가버렸다.  

인간의 입장으로는 구원의 진리와 종교간의 우월성을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지 않는 한 종교간의 화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방금 따져 보았듯이 불신자나 신자나 모든 인간이 과연 하나님 앞에 구원을 당당히 요구할 만큼 제대로 설 수 있는 자 있겠는가? 모든 인간은 그 분 앞에선 다 버러지 같은 존재요 어리석고 무지하며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이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다. 당신만은 인간이 얼마나 체질이 진토이며 이 땅에서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아래 눌려 있음을 아신다. 아무리 위대한 선각자나 철학자나 종교가나 부모나 심지어 자신마저 자신이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는 알지 못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 스스로 더듬다 보면 진리도 찾고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 착각하고 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한가지 분명한 원칙을 세우셨다. 죄는 원수같이 미워하시되 죄인은 자식같이 사랑하신다.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리는 가장 저주스런 모습으로 죽이실 만큼 끝까지 철저하게 미워하신다. 죄인은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독생자 예수님을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끝까지 인내와 자비를 베푸신다.

비기독교인들은 죄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인을 사랑하자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죄를 미워한다고 한다. 인간의 종교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셔야만 한다.      

최소한 갈릴레오는 되어야 한다.

신앙이 무엇인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과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리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셔야만 했던 그 엄숙하고 신비한 진리 앞에 자신을 비춰보면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는 지점에서만 신앙이 시작된다.

하나님 당신이 절대적 진리이며 궁극적인 진선미다. 그 분만이 100% 완전하게 옳고 선하며 아름답다. 그 진선미가 인간에게 완전하게 계시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시험과 유혹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한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시련과 핍박이 분쟁과 불화와 고통과 죽음을 몰고 올지라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십자가 진리를 세상의 어떤 유행, 사조, 사상, 철학, 종교, 세력과도 굴절, 변경, 조정, 타협, 굴복,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여 우상에 절하지 않으려고 극렬한 풀무 불에 생명을 던진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종교 재판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자 중얼거린 갈릴레오처럼 누가 뭐래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진리라고 자신에게 만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예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알기 전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그에 비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소속과 특권이 얼마나 귀한지, 또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천국의 면류관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되새겨 봐야 한다.        

신자가 자신의 열심과 치성을 동원해 현재 겪고 있는 시련과 핍박만 없애려 드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십자가 복음 안에서 제대로 된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십자가 밖에 있는 세상이 얼마나 헛되고 추하며 더럽고 온갖 죄악이 만연하고 있는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아니 불신자 쪽에서 먼저 우리 속에 감추인 보배 되시는 예수님의 빛을 발견한다. 그러나 저들은 빛이 싫고 어둠이 더 좋아 당연히 신자를 외면하고 부인하며 저주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된 후에 혹시라도 세상과 동화 되어 그 속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체면과 위신을 지키려 들면 세상은 환영한다. 같은 동료로 취급해 주고 종교간 화해가 드디어 이루어졌다고 좋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부터 하나님이 이상하게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자꾸 잊고 싶고 의심, 불만, 불평, 불신이 싹트며 급기야 그 분을 외면하게 된다.

그런 결과를 신자가 의도하거나 노력하거나 좋아하거나 원한 것이 절대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 쪽을 향해 서서 빛 속에 있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그 반대편에선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된다.  

기독교는 십자가 진리의 절대적 배타성이 근본이 되는 종교다. 예수님이 처음이자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다.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분리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십자가가 사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을 나누는 절대적 경계선이기 때문에 복음 안에 진실로 거하고 있으면 세상과 자연히 구분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그 진리에 있어서 분리주의인 것이지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자더러 세상이나 불신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하여 분리주의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십자가라는 매개체를 통해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구분이 필연적이라는 뜻은 신자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며 일상적 생활이며 평생 계속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신자더러 모든 재산을 팔고 검소하게 살며 세상을 초월하라는 것이 아니며 이슬람 선교 가서 순교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100% 확실히 살아 계시는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자신을 비춰보아 자기 속에 사람이 아니라 그 분께 자랑할만한 선과 의와 거룩이 있는가 살펴 보라는 것이다. 만약 없다면 십자가 앞에 조용히 나와 겸손하게 무릎 꿇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생한 이런 음성을 듣게 된다.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평생을 동행해 주겠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나를 좇으라.”

김순희

2009.12.05 11:28:29
*.254.209.141

"비기독교인들은 죄는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인을 사랑하자고 한다. 기도교인들은 죄인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죄는 미워한다고 한다."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습니다.

오직 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날마다순종

2020.10.04 17:23:29
*.14.99.253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가는길이 좁고 협착해도 주님이 함께 걸어주시니 그길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위한 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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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1] 운영자 2004-10-19 2170
79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1] 운영자 2004-10-13 1807
78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33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80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8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3] 운영자 2004-09-14 2417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614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51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28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2] 운영자 2004-08-17 2315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202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9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508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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