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조회 수 1517 추천 수 85 2004.08.31 02:29:35

마태복음 강해(116) 8/29/04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전도하면서 생기는 이상한 일

신자가 전도를 하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 저 사람은 꼭 금방 믿을 것 같은데 무슨 수를 써도 안 믿는다. 밥을 사주고 급하다고 하면 돈도 빌려 주고 어려운 일은 도맡아 처리 해주며 정말 그 집의 집사 노릇 하는데도 막상 마지막 단계에 가선 노(No)다. 그 동안 공들였던 시간과 경비가 아깝고 본전 생각이 나게 만든다. 반면에 자기 의가 강하고 고집이 세어 전혀 교회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슴 조려가며 권한 한두 마디 말에 선뜻 믿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복음의 진리를 전한 것도 아니고 단지 교회 한 번 나오시지요라는 말만 했는데도 그렇다.  

본문은 바로 그런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택해 천국 복음으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파송 하면서 전도에 관해 구체적으로 가르친 내용이다. 지난 주 배운 1-4절은 제자를 택한 것 말하자면 사도의 임명장을 주는 장면이었고 본문(5-10절)은 사역지로 출발하기 전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또 11-15절은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며 16절 이하 나머지는 전도하면서 어떤 일들을 겪을 것인지 또 그런 일의 의미에 관해 복음과 연결하여 설명 한 것이다.    

주님은 출발 전에 어떤 준비를 하라고 하셨는가? 한 마디로 줄여 아무 준비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공급해 주고 천사를 보내어 보호해 준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세상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세상의 오해와 멸시와 핍박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심한 경우는 순교까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그 일이 얼마나 고귀하며 가치가 있는 일인 줄 확신하여 기꺼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 행사를 한 것에 불과하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이유가 주님이 신비하고 초월적 능력으로  공급해 주기 때문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못 살았지만 나그네를 대접하는 인심은 후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구제에 열심이라 여행객을 잘 보살펴 주었다. 나아가 10절 끝에 예수님이 설명하신 대로 선한 일을 해준 일군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기 때문이다. 귀신이 쫓겨 가고 병이 낫고 천국 복음 앞에 진심으로 항복한 자라면 당연히 감사하며 보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을 사심 없이 하면 성도간에 반드시 이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제자더러 체험케 하려는 것이다.

전도 여행에 준비할 것은 하나도 없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준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상거래나 관광 휴식을 위한 여행이라면 당연히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 만큼은 지금껏 해온 여느 여행과는 그 목적과 하는 일이 달랐다. 전도는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이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과 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밥 사주고 돈도 빌려 주는 등 온갖 수를 써도 믿지 않더라는 것은 그 모든 방법이 안 먹혔다는 것이다. 또 한두 마디 말만으로 전도된 것도 사실은 전도에 특별히 좋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전도도 하기 전에 믿은 것이니까 방법 때문에 전도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를 믿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영혼이 거듭나 나라는 존재 전체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생생한 체험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일 대 일 개인적으로 만나 그 분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야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알 수 있다.(고전2:11,12) 성령의 거듭남이 없이는 구원과 영생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이 준비할 것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전도한다. 인간의 영혼 구원의 문제만큼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된다”고 믿는 믿음이다. 전도란 지혜의 권하는 말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5)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확신하는 믿음만 준비하면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본전 생각이 나다 못해 얄미울 정도로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싱겁게 믿어 스릴이 없거나(?) 하는 것은 심각하게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하다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선 그런 일에 신경이 쓰이면 잘못된 믿음이 될 수 있다.

전도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전도의 계획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전도의 과정도 그 분이 진행시키며 마땅히 그 결과도 당신이 책임진다는 의미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행13;48)했듯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예정한 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믿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게 하신다고 해서 신자가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하는 자가 없다면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자는 반드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전도하신다는 의미는 전도 대상이 최종적으로 믿어 신자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책임이지 신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신자의 책임은 어떤 영혼을 구원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도구로 기꺼이 쓰임 받을 것인가 아닌가 뿐이다. 신자가 전도할 때에 가장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은 다 좋은데 그것이 지나쳐 불신자의 구원까지 책임지려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고 했다. 자칫 이 말씀을 오해하여 만원 버스 속에서도 고함지르고 길 가다가도 아무나 붙들고 무조건 전도하거나 불신자 한 명을 만나면 오밤중에라도 불쑥 찾아가 대뜸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신자는 누구를 만나든 그리스도를 그 여건에서 가장 적합하고 유용한 방법으로 증거만 하면 되고 구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맡기라는 것이다. 꼭 교회로 끌고 와야 자기 직성이 풀리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 전도가 아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살아 난다.

대부분의 신자가 신앙 상에 아주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뭔가 일을 해 드려야 하고 그렇게 열심을 내어야만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치적인 실적이 드러나야 하고 외적 성장이 따라야 하며 가시적으로 거창한 일을 진행시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변함이 없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단 한치의 가감 없이 동일하다. 하나님은 당신 외의 어떤 힘이나 존재로부터 절대 영향 받지 않는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보다 못했겠는가? 또 여러분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쇠퇴해지겠는가? 올바로 된 믿음이라면 오히려 바로 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줄지나 않을까 염려해야 하지 않는가?        

좋은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주 간단하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하나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을 가장 잘 하실 수 있도록 내 자신과 주위를 잘 준비하는 일이다.

신자는 매일 매 순간을 내 자신을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비어 완전하게 내어 드리느냐의 싸움을 해야 한다. 두 손 두 발 다 묶어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잘 일어날 수 있도록 내 영혼과 삶 속에 있는 정욕, 죄악, 탐심, 방탕, 나태, 고집, 편견, 선입관, 자존심, 체면, 위신 등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부셔나가며 없애야 한다.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그것들로 인해 영향 받지 않게 하고 대신에 성령님의 선한 영향력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것들로 얽매이고 서로 상처주고 고통 받고 있다면 신자가 먼저 나서서 씻어주고 감당해야 한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최종적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이 일하실 몫이다. 신자는 구원이 잘 일어나도록 준비하는 부분까지만 하면 된다.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마음 문이 열리게 하고 복음에 관심을 갖도록 하며 우주의 주인되시는 창조주 절대자를 만나고 그 분에게 자기 인생을 의탁하고 싶은 소망이  생기도록 해주면 된다. 전도란 하나님의 구원이 이뤄지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다. 문자 그대로 진리만 전하면(傳道) 되지 실적까지 신자가 관심을 가질 필요 없다.

왜 이렇게까지 정성과 열심을 바쳤는데도 안 믿지라고 불만을 가지는 것은 꼭 믿게 해야겠다는 인간적 욕심이다. 심하게 말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일 수 있다. 도저히 안 믿겠지만 찔러나 보자라는 것도 결국 어차피 안 믿을 것인데라는 선입관이 앞선 것이다. 실적을 먼저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실적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일단 전도 했으니 무조건 신자의 책임을 다했다는 식이 되어서도 안 된다. 상대가 쉽게 믿거나 아무리 해도 안 믿거나 간에 전도자는 동일하게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 어떤 타입의 사람을 만나도 때를 얻거나 못 얻거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꼭 심어 주어야겠다는 전도자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앞서야 한다.  

유대인을 편애한(?) 예수님

본문의 5,6절에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마치 차별하는 것 같다. 왜 사마리아인과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을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자들이 영적인 문제만 나오면 아이큐가 갑자기 세 자리에서 두 자리로 낮아지는 것 같다. 주님이 이스라엘에게만 가라고 했다면 차별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차라리’라는 접두사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도 가긴 가야 하는데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아직은 가지 말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다.

이는 인종차별도 아니요 이스라엘을 편애한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대로 전도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열 두 제자 모두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부터 전도하라는 것이다. 거창해 보이는 실적을 올리려  힘들게 문화, 언어, 관습이 다른 먼 곳으로 구태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부터 가라는 것이 자칫 손 쉬운 사람부터 전도해 어떡하든 실적을 많이 올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는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도와 선교를 할 때에 물자와 시간과 노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아무리 최종적 구원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신다고 하지만 전도의 대상도 인간이요 그를 상대하는 것도 인간이요 전도의 전 과정이 이뤄지는 곳도 인간 세상인지라 효율성을 따져야 한다. 그렇지만 실적을 많이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원의 낭비를 막자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이미 알고 믿고 있는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하나님께 많은 징계를 받았고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 제국에 수탈 당하고 거짓 목자들에게 종교적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내실 구세주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장 강하게 아니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민족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준비해 놓은 백성이다. 하나님이 계획 해 놓으신 전도인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는 교제도 하지 않고 특별히 민족을 배반하고 앗시리아와 혼혈 족속이 된 사마리아인과는 아예 상종도 않으며 멸시했다. 열 두 제자도 유대인들인지라 이들을 만나면 자기들도 모르게 인간적, 종교적, 문화적 편견과 선입관이 작동 될 것이니까 주님이 그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실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기까지 그들에 대한 전도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 계시를 받은 후에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해 바울에게 꾸지람까지 들었다.(갈2:11-14)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먼저 가라는 것은 편애나 차별의 문제도 아니요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도할 때에 사람의 외적 조건에 구애 받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에 좌우되어 전도의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직 거기까지는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유대인에게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실 따로 있다. 목자가 없어 길을 잃고 헤매며 고생하는 불쌍한 양 떼가 신자들 바로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9:37에서 한탄하신 대로 신자들이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나가면 추수할 거리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추수할 일군이었지 추수할 거리가 아니었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에 눌려 신음하는 추수할 거리는 항상 흘러 넘쳤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백성은 눈을 닦고 찾아 보아도 없구나라는 것이 주님이 그 때만 하신 탄식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토록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실 유일한 불만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전도자가 불신자를 꼭 교회로 끌고 와야 되겠다고 하는 그 열정과 순수한 마음은 좋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앞서면 반드시 인간적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개인적인 욕심이 앞서게 된다. 마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간 투수가 오히려 폭투하는 것과 같아진다. 전도자는 불신자의 마음 문만 하나님께로 열어주면 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가?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중의 하나는 몰몬교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들의 선교전략이 좋은 것이다.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에게 선교본부에선 단 한 푼도 선교비를 후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비로 가게 한다. 자연히 선교에 헌신 된 자만 가게 된다. 또 선교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를 자기 돈으로 충당하다 보니 절약 해야 하니까 현지의 빈민촌부터 먼저 찾는다.

예를 들자면  한국 구로동의 공장 직공들이 모여 사는 닭장 집 같은 곳으로 찾아 들어간다. 된장찌개나 라면을 직접 같이 끓여 먹으며 전도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부모가 변호사, 의사, 회사 사장 같이 어마어마한 부자다. 선교사들이 착하고 성실한데다 부잣집 아들이 사서 고생하며 자기들을 위해주니까 정말 우리를 사랑하나보다 이들이 믿는 종교야말로 진짜 종교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일단 마음 문을 열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전도자 자신의 인격을 드러낸 것이지 참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아니다. 광명한 천사로도 위장하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이단의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의 선교전략은 본 받을 만하다. 그러나 따로 배울 것이 없다. 바로 본문에 나온 원리가 그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실천하지 않는 원리를 오히려 그들이 실천하고 있다. 전도자가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원리가 본문 가운데 있다. 몰몬교인처럼 금은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9절) 그보다는 8절 끝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신자의 무엇을 보고 마음 문을 열겠는가? 기독교 구원의 진리일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기적과 신유의 능력을 보이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다. 병이 나으면 그들은 더 신이 나서 세상 재미를 향해 달려간다. 오직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진실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상, 철학, 윤리, 도덕, 종교 등을 기독교의 그것으로 교육해 무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탄에 조종당해 부패된 영혼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 일은 오직 사랑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사랑만이 해낼 수 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전도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전도를 위해 세상의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이 사랑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사랑을 거저 나눠주고 싶은 소망과 열정만 있으면 전도 준비는 완벽하게 끝난 셈이다.

전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지금 전도 폭발 훈련을 시켜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설립코자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가서 보라는 것이다. 정치적 종교적 멍에에 매여 있고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생들이 갈급하고 허황된 채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자기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고 세상으로 내 보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비참한 모습과 대비해 제자들이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와 능력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아라는 것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사기와 궤휼 아래 있었기에 예수를 모르는 모든 인생들이 목자 잃은 양 떼라는 것을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한 번이라도 맛본 자가 세상에 나가면  그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의 삶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다 보면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될 것이라고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면서 주신 권능이란 특별히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그들 속에 심어 준 바로 이 긍휼한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습을 시키러 보냈다. 불신자의 구원도 구원이지만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려 하신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신자는 전도해 보지 않는 한 제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도와 줄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그 영혼을 사랑할 수는 없다.  

아무리 모든 수를 다 써도 믿지 않는 사람을 두고 신자는 “어유! 병신 이렇게 쉽고도 간단한 복음도 못 믿나?”라고 멸시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다. “저 사람 정말 지옥의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질 텐데… 저 인생의 앞 날에는 오직 실패 뿐인데… 아무리 세상에서 형통해도 참 행복과 가치는 그 속에 단 한 톨도 발견하지 못할 텐데…” 그 사람을 보면 볼수록 가슴이 답답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한다. 반면에 나도 이전에는 사실 저 사람보다 더 하면 더 했지 하나 나을 것이 없었는데 어찌 나 같은 자에게도 주님이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저절로 감사와 경배가 나와야 한다.  

또 한 두 마디 말로 쉽게 전도 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영적으로 신령하고 똑똑해” 혹은 “내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전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도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야”라고 해서도 안 된다. “저렇게 강하고 의로워 보이는 사람도 그 동안 내가 전혀 짐작도 못하는 갈등과 고민과 상처와 눈물과 슬픔 속에 있었구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라는 한 마디 말에 교회에 출석할까. 정말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참 사랑이 필요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이 세상에 없구나”라고 깨달아야 한다.  

신자가 모든 세상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고 온갖 인간적인 열심으로 도와 주었는데도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실패하고서야 그 영혼의 깊은 내면에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이 인간의 지정의적 수단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이 따로 있고 그곳에는 예수님의 영이 아니고는 변화받게 할 수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예수를 모르는 그 영혼이 별로 안타깝거나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또 한두 마디 권유에 믿기 시작하는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살고 죽음이 세상적인 도움과 인간적인 섬김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것을 역으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떤 인간의 심령도 온전해 질 수 없다. 전도를 하며 인간적 방법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을 절감할 때 비로소 사람을 그 외모가 아닌 영혼으로 사랑하게 된다. 전도하는 자만이 주님 앞에 눈물로 그 영혼을 끌어 안고 엎드릴 수 있는 것이다.    

전도의 본질

전도는 살아 계신 주님만이 하신다. 그러나 반드시 신자를 통해서만 하신다. 그것도 신자가 거저 받은 사랑을 거저 나눠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하신다. 신자가 자기와는 아무 이해 타산이나 개인적 친밀도가 전혀 없고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만 일어난다.

전도란 신자는 거저 주기만 하고 불신자는 거저 받기만 하는 것이다.  불신자가 받는 것은 거룩과 의와 생명과 영원한 빛이 넘치는 신자의 사랑과 섬김이다. 그 속에는 거짓과 위선과 가식과 사기와 자존심과 질투와 시기와 체면과 위신은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다. 대신에 불신자의 모든 더럽고 추하고 눌리고 메인 것들은 신자가 대신 감당하고 받아가 준다.

정확하게 따지면 인간인 신자가 그것들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신자가 전해 주는 십자가 복음과 함께 하는 성령의 기름 부음과 예수님의 보혈의 씻음으로 그런 역사가 불신자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전해준 주님의 사랑이 불쌍한 영혼들 사이에 역동적인 모습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이 전도다.  

그런데도 신자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눠주고 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가 믿을 때에 거저 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는 성실히 교리 공부하고 죄 안 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단단히 결단하여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불신자에게도 자꾸 노력해서 너 스스로 믿어 보라고 재촉할 뿐이다. 왜 성경 공부하지 않느냐 따지고 기독교를 가르치려고만 한다. 아직 본인조차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는 신자다.

거저 받은 은혜를 독차지 하려는 자도 전도하지 않는다. 은혜를 받고도 나누지 않으려는 것은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아직도 주님의 사랑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서 그렇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십자가 앞에 어찌 내 같은 자도 용서해 주셨는지 눈물로 감사하며 항복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믿어서 복만 받으려는 자이기에 자기 복 받아 챙기기도 바쁜데 남에게 나눠 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신자가 하는 전도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 앞에 항복한 적이 있고 그래서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능력과 위로가 넘치는 줄 체험해 본 자가  주위를 둘러 보면 추수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 줄 발견하고  바로 그 추수를 위해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문 밖에 한 발자국이라도 내 딛는 것이 전도의 시작이자 전부다.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세상으로 영혼을 구원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신자의 영혼을 사랑하러 가기만 하면 된다.   


사라의 웃음

2011.09.18 11:35:51
*.161.100.136

거저 받은 것 거저 주라심인데, 자주 아주 자주 자신의 넘어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끄러워서 입을 열 수가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파묻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함이 문제임을 배웁니다.
십자가 사랑의 그 힘과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점점 더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너무도 신기하고 감사하기만 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9.26 18:18:13
*.14.99.253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또 심어주신 긍휼의 마음으로 불신자를 포함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또 다른 이름 '전도'임을 깨닫습니다. 

 

'신자는 세상으로 영혼을 구원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신자의 영혼을 사랑하러 가기만 하면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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