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조회 수 1807 추천 수 122 2004.10.13 00:57:52
마태 복음 강해 (122) 10/10/04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사람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

성경을 읽을 때는 한 절씩 떼어서 읽지 말고 반드시 전체 문단 안에서 뜻을 파악해야 한다. 문단은 모든 성경에 작은 동그라미로 구분되어 있는데 최소한 동그라미 하나에서 다음 동그라미까지는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28절 한 절만 택했으므로 이 절이 속한 문단 24절에서 33절까지 문단 전체를 읽고 그 안에서 뜻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럼 그 문단의 내용은 무엇인가? 신자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 거하면 세상으로부터 당연히 핍박을 받게 마련이지만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또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이 26절, 28절, 31절에 세 번 반복되어 나오듯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이유는 지난 주에 배운 대로 신자가 겪는 모든 시련과 핍박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핍박이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준비와 그리로 이끄는 과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은 신자의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이 말씀에 진심으로 전적인 수긍을 하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신자로서 판에 박힌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 성경적으로 틀린 대답을 해도 하나님이 벌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생각과 다른 대답을 하면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실 것이다. 본인의 양심에 비추어 스스로 솔직히 자문해 보라.

사람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모두 몸이 죽는 것이 아닐까? 아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럼 다르게 질문 해보자. 몸이 죽는 것보다 영혼이 죽는 것을 더 두려워 하는가? 진정 그렇다면 왜 성경이 손 때가 묻지 않고 그렇게 깨끗한가? 기도도 그렇게 하지 않을 리 없지 않는가? 인구의 1/4이 신자인 한국이 저처럼 혼란스럽고 부패와 죄악이 설칠 리 없지 않는가?

세상은 두려운 것 투성이다. 단 하루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미국은 세계에서 법 질서와 사회 정의가 가장 바로 잡혀 있는 나라이고 그 생활은 아주 단순한 편이다. 그런데도 아파트 렌트비를 제 때에 낼 수 있을까?, 직장에서 해고는 당하지 않을까?, 이번 달 비즈니스가 적자로 떨어지지 않을까?, 아이는 제대로 원하는 대학에 가고 또 그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을까 등등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일상적인 부분의 온갖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그나마 자신이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 비례해 어느 정도 해결책이 있고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교통사고, 질병, 죽음 같이 예상치도 못한 불시에 찾아 오는 어려움들이 있다. 이 중에 교통사고와 질병은 비록 평생 핸디캡이 될지언정 살아 남을 가능성과 확률은 많다. 그러나 죽음만은 인간이 전혀 예측, 방어, 수정, 연기 시킬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기 때문에 가장 두려울 수 밖에 없다.

혹시라도 “신자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두려워 하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 있는 교리상의 믿음일 뿐이다. 여러분 중에 어서 빨리 천국 가야지 하면서 매일 찬송 부르며 기도만 하고 지내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 한 번 들어 보라. 나이 80넘은 권사님들에게나 통하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 분들도 더 죽기 싫어하고 무서워할지 모른다.

여러분의 믿음을 탓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꼭 이 땅에서 원도 한도 없이 화끈하고 화려하게 살고 싶어서도 아니다. 중증 장애를 갖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의 최고 소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자녀와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든지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저 불쌍한 아이를 누가 돌봐 줄 것인가 생각하면 차라리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 땅에 내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정말 하고 싶은 일들도 많으며, 아직 못해 본 일들이 있다면 누구나 죽기 싫고 두려운 것이다. 그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죽음을 두려워 하며 이 땅에서 열심히 오래 살아야 오히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얼음 눈덩이 투구 철학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 야구 투수 중에 터그 맥그로우라는 선수가 있었다. 공을 던지는 나름대로 자기 철학이 있었는데 스스로 ‘얼음 눈덩이(Frozen Snowball)’이라 표현했는데 그 이유가 재미 있다.

투수로서 가장 두려운 상황이 언제인가? 노 아웃 만루 상황에 베리 본즈 같은 강타자가 타석에 섰을 때다. 아무리 랜디 존슨
같은 최고 투수라도 공을 던지기 싫고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안 던질 수도 없고 노 아웃이라 걸러보낼 수도 없다. 바로 그런 때에 언젠가 지구에 제2의 빙하시대가 오던지 완전히 멸망하여 얼음 눈 덩어리가 되어 우주 공간을 떠 다니고 있는 것을 상상한다고 한다. 그 때에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만루 홈런을 맞은 것을 상관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담대하게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투수의 뜻은 무엇인가? 자기 두려움의 근거가 당장 홈런 맞아 점수 주고 패배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스포츠 신문에 “맥그로우 또 두들겨 맞다!”라고 톱 기사로 오르는 것이 싫었고 세상 사람이 두려웠던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육신밖에 못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라도 질병으로 건강을 잃거나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자식에게 혹시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너희가 갖는 그런 두려움의 진짜 이유와 그 배경과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혹시 뒤쳐지지 않는가? 남이 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 아닌가? 내가 그래도 낸데 절대 이런 취급과 대우를 당하고 있을 수는 없어!”라는 생각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의 근거와 배경이 아닌지?

아니면 인간은 너무 연약하고 무지하며 무능한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항상 겸손하게 인정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 체질이 진토 같아 신자가 되어도 비록 세상의 핍박과 시련이 두렵긴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 분이 내 우편에 항상 좌정해 주셔서 신자의 요동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너희가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외면 당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 하며 사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신자가 자꾸 세상과 교회 양쪽에 한 발씩 두고 이쪽 저쪽으로 들락날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아무리 경건의 훈련을 쌓아도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그냥 확! 옛날 방식으로 살아 말아?”라는 갈등을 하게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열심히 순종하고 헌신했어도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보상을 해주시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특별한 은혜는 놔두고 고달프고 힘든 일만 겹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앙 생활에 별로 열심을 내지 않고 겨우 주일만 건성으로 지키고 인격이 고상해지거나 영적으로 신령해진 부분이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의 따끔한 징계가 없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하나님의 화끈한 사랑이나 철저한 배척 둘 중 하나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외면 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근거가 약해져 실제 현실에서 그 문제가 긴급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니 바로 눈 앞에 있는 염려 불안에만 발을 동동 구르며 매달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의 뜻은 신자의 바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전주에 본 26절에선 신자가 진리 안에 살면 아무리 핍박과 시련이 겹쳐도 신자의 생애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또 금주의 28절에선 간혹 신자가 이 땅에 살아 있는 중에는 모르고 지나 가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절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하셨지 않는가?    

지구만 언젠가 얼음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이 지구상의 삼차원의 시공간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날이 반드시 있다. 그것도 순식간에 닥친다. 그 때 그곳으로 들어가는 서로 다른 출입구가 두 개 있고 모든 사람이 그 둘 중 하나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문으로 결정될지 그 유일한 기준은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 가운데 살았는가 밖에 있었는가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지붕 위에서 전파한 천국 복음에 귀를 기울여 마음 문을 열었는가 아닌가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외면 당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 하며 살았는가로 구별한다.  

“And Then?”의 인생 철학

16세기에 필립 네리라는 한 경건한 크리스찬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영적인 지도자로 존경 받고 있었다. 하루는 야심만만한 한 청년이 찾아와 드디어 자기 부모가 법률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인생 상담을 요청했다. 지금은 서로 법대 못 보내 난리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꽃으로 제대로 된 집안에선 신학부터 공부시켰다.  

청년이 법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네리는 “그래서(And then)?”라고 반문했다. 청년은 공부 열심히 하고 졸업해 유명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네리가 또 “그래서?”라고 물었다. 이들의 대화는 “많은 돈을 벌어 예쁜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낳고 잘 기르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래서?” 식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네리는 결혼이나
인간 관계에 관한 심오한 가르침은 전혀 주지 않고 단 두 마디 “And Then?”만 되풀이 했다.

드디어 그 대화는 청년이 “나도 결국 죽게 될 것이다”라는 단계까지 왔다. 그런데 그것으로 대화의 끝이 아니었다. 네리는 또 “그래서?”라고 물었고 그 청년은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의 모른다는 대답과 함께 그 상담은 끝이 났다.    

청년은 그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죽음 이후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생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에 관해 전혀 고민해 본적이 없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왜 이 땅에 살게 된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할 것인가? 과연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가? 만약 끝이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 때 나는 과연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그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변호사가 되어 부귀영화를 다 차지하고 자식들 다복하게 양육하고 큰 병 앓지 않고 건강하게 은퇴한들 자기가 죽으면 그 뿐이다. 죽음 이후와 현재의 삶을 연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솔로몬의 이런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 나아가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2:16)가 진리가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신앙이 좋고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이 땅과 영원을 어떻게 연결시키며 살 것인가에 관한 분명한 기준이 서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으니 천국 간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이 세상은 더럽고 추하니 세상을 초월해 절대 죄 안 짓고 거룩하고 고상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창한 의미도 아니다.

그 청년의 예를 들면 변호사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변호사 하면서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변호사를 하긴 하되 돈만 벌 목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특정한 세대를 택해 특정한 모습으로 이 땅으로 보내신 그 숭고한 목적을 찾아서 그에 맞추어 살아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현재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목록을 만들어 남김 없이 하나하나 적어 보라. 그 중에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염려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외면 당하는 것이 두려워 염려하는 것을 구별해 표시해 보라. 과연 영원한 가치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그 리스트에 표시 되겠는가?

물론 가족의 안녕을 위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염려하는 것들은 좋은 일이다. 인간이 기본적 생명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숭고한 일이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 세우려 염려하는 것과는 별개다. 우리의 염려의 대부분이 후자에 속하지 전자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리스트에 적었던 염려들이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라. 가장 실감 나게 예를 들자면 여러분의 자식이 일류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해서, 즉 염려하는 대로 사태가 벌어졌다고 해서 여러분 존재와 삶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에 얼마나 손상을 주겠는가? 그 일이 과연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말이다.

제가 미국에 사니까 친구들이 자녀를 대학 보낼 시점에 다다르자 다들 저더러 미국 이민 잘 갔다고 부러워 했다. 그들에게 “지금은 부러워할지 몰라도 금방 세월이 흐른다. 4-5년 후면 자식들이 다 어떤 대학이라도 졸업하고 대학 입시 염려는 언제 있은 양 없어지고 만다. 그 때 가서도 이민 잘 갔다고 할지 나중에 두고 봐야지”라고 대답해주었다. 우리 염려의 거의 전부가 사실은 잠시 잠간 스쳐 지나가는 일들에 관한 것뿐이다. 실제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써주는 것이자 설령 그들이 알아도 금방 다 잊어버릴 것들 뿐이다.

위엣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바울 사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고 했다. 항상 거룩하고 고상하게만 살아라는 것이 아니다. 위엣 것과 땅엣 것 중에 어느 쪽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위엣 것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에 관심을 두면 땅엣 것 일시적인 것은 당연히 생각할 이유나 필요나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산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그 일을 위해 꼭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고 죽을 때까지 꼭 그 일을 하고 싶고 그래서 그 일에 전 인생과 존재를 걸만한 한 가지 일이나 목표를 붙드는 것이다. 만약 그런 목표나 일을 붙들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두렵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젯거리가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또 사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고 권면하고 있다.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것이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말씀보면 마약 먹은 듯이 무엇인가 신령한 기운이 들어와 기분이 좋아지고 아무 걱정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기도할 때에 이미 염려를 없애고 하라는 것이다. 힘들고 고달파서 기도하는 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5절 끝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주께서 가깝다고 한다. 일차적으로는 물론 주님이 신자 곁에서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본문을 쓸 때는 바울은 로마 감옥 생활 말기로 십자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주님이 가깝다는 이차적인 의미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뿐 아니라 모든 신자도 이제 곧 죽어 천국에서 주를 뵙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염려하고 불안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들을 죽음 이후와 연결 시켜 보라는 것이다. 과연 지금 그 문제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와 비교해 볼 때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대비해 보면 참으로 쓸데 없으며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고 있는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불안해 할 필요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그러나 만약 기도하는 문제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원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 신자의 평생을 걸만한 일이라면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 있고 당당하게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일을 해결 안 해주실 리가 없다는 믿음이 기도 중에 당연히 들게 된다. 바로 그것이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 채워 주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장기적인 목표가 분명히 서 있는 사람은 현재의 장애 몇 가지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 반대로 현재의 문제에 매달려 쩔쩔 매는 사람은 절대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일시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영원한 가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는 죽음 이후의 삶을 대비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오직 육신이 죽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만 가장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게 까불지 말라

신자가 신앙이 좋은가 나쁜가의 일차적인 기준이 얼마나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바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느냐 아니냐다. 인생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으며 편안하고 화려하고 풍요롭게 살아야 한다. 괜히 불안해서 형식적으로 교회 나와서 빌 것 전혀 없다. 반면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서 어떻게 사느냐로 인생의 목적이 바뀌게 된다. 또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본다.  

죽음 이후 영원을 대비하라고 하니까 혹시 지옥과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드는가? 몇 주 전에 ‘귀신들의 잔치(?) 올림픽’이라는 제목의 목회 수상을 홈페이지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지옥을 가보지도 않았고 있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으면서 함부로 세치 혀를 놀리지 말라고 반박했다.

지옥이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편안하게 차지할 수 있는가에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경쟁이 생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며 온갖 죄와 부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런 모순들에 전혀 개의치 않고 인생은 으레 그렇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면 지옥은 없는 것이다.

혹시 꼭 죄를 짓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만큼 순진한 생각도 없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완전치 못한 인간들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순전히 가정으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때도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만이 완전한 삶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면 사후 세계의 심판은 없다.

만약에 그런 자신과 믿음이 없다면 반대로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 꼭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와야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 속에 선험적(先驗的)으로 심겨진 양심에 따라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죽어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 간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부자가 지옥의 고통이 너무 심해 하나님에게 천국 가 있는 나사로라도 대신 다시 살려주어 이 땅에 남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돌아가 지옥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고 했다.

오늘 날도 죽었다 되살아났다든지 혹은 입신의 체험을 하여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의 간증을 많이 한다. 성경과 성경에 증거 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런 간증도 아무 소용이 없다. 먹고 마시는 일에 집착하여 살면서 자기 양심에 어떤 큰 찔림이 있어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단지 사람에게 왕따 당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외면 당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기 때문이다. 당장 급한 것만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다 언제 후회하는가 하면 죽기 직전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 한다. 가능한 안 하려 하는데 그 이유가 틀린 말이기 때문이 아니다. 목사가 신자에게 겁주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것이 싫고 더 중요한 이유는 정작 말을 해도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신자가 된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꾸 까불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까분다는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신자가 진리 밖에 서 있거나 세상과 교회를 번갈아 들락거리는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가소로울 것인가라는 뜻이다.

그 까분다는 의미 가운데 여러 수십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도 없고 알아 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 이미 다 잘 알고 있다. “신자로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나 느낌이 드는 바로 그 전부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도 계속해서 고치지 않으면 언제가 때가 차면 하나님의 징계는 반드시 따른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아무리 현실에서 시련과 핍박 가운데 궁핍하고 고달플지라도 낙심치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 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은 드러난다. 믿음이란 기도하여 두려운 일 자체를 없애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신자가 믿음으로 키워 나갈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소망을 자기 육신이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의 최후 승패는 절대 이 땅에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 두 개의 출입문 중 어느 곳으로 들어가느냐로 판별될 뿐이다. 이를 구태여 성경이나 예수님 말씀으로 입증할 필요가 없다. 세상적으로 최고로 성공하고 온갖 풍요와 재미를 누린 후에도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느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는지로 판단해 보면 된다. 또 세상에서 아무리 참담한 실패를 겪고 모든 사람에게 철저히 멸시 당했어도 결국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믿고 주일 날 교회에 나올 마음이 생겼느냐 아니냐로 판단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본문의 뜻이자 신자가 더 이상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다.

날마다순종

2020.10.02 17: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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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오래전 이백이 '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이라며 '천지는 만물이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관이며 세월은 백대를 스쳐 지나가는 과객' 이라고 시를 지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한 것이 그보다 훨씬 앞서 살았던, 허나 하나님을 섬겨 그위치는 정반대편일지라도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로다'의 고백과 동일할진데, 세상은 수백번의 상전벽해를 거쳐 그 모습은 놀랍게 바뀌어도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현대의 노래 가사를 보듯 결국 인간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모두가 헛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어 십자가의 은혜로 찾아오신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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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결혼 지참금 때문에 자살한 세 처녀 (마11:20-24) [1] 운영자 2004-12-07 2382
85 왜 불신자는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가? (마11:13-19) 운영자 2004-11-30 2546
84 하나님 실수하신 것 아니에요? (마11:7-12) [3] 운영자 2004-11-16 3081
83 잘 믿는데도 왜 삶은 자꾸 꼬여 가는가? (마11:1-6) [1] 운영자 2004-11-10 2883
82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졌다. (마10:40-42) [2] 운영자 2004-11-01 2754
81 기독교는 분리적이어야 한다. (마10:34-38) [2] 운영자 2004-10-26 2044
80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1] 운영자 2004-10-19 2170
»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1] 운영자 2004-10-13 1807
78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33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80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8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3] 운영자 2004-09-14 2417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614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51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28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2] 운영자 2004-08-17 2315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202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9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508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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