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조회 수 2315 추천 수 211 2004.08.17 03:20:45
마태복음 강해 (114) 8/15/04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한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당신 자신의 안위와 형통을 위해 투자하거나 노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병든 자, 상처 받은 자, 죄악 중에 있는 자들이 찾아오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든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셨다. 주님은 고되다, 억울하다, 제대로 평가 안 해주니 못해먹겠다고 불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끔 한탄과 분노를 터트리신 적은 몇 번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신세와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죄와 사탄과 사망에 눌려 있는 자기 백성들의 처지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공평을 굽게 하고 부정으로 득세하는 사회와 음란한 우상숭배로 타락한 종교를 향해선 노여움을 발하셨다.  

본문도 주님의 그런 한탄 중의 하나다. 35절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 주셨지만 개인적인 휴식은 전혀 취하지 않으셨다. 보통 사람 같으면 힘들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법한 상황인데도 그러지 않으시고 대신 찾아 오는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탄식을 하셨다. 그들이 목자가 없어 고생하고 유리하는 양 떼 같아 인간 세상에 할 일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일할 사람은 적다고 하셨다.  

그런데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제자들을 자신이 훈련해서 일군으로 세우시면 될 텐데 왜 제자들더러 따로 보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는가?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모세가 수십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소사를 일일이 판결하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짬도 없어 너무 힘들었다. 보다 못한 장인인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중간지도자를 두라고 충고했다. 모세가 그 충고를 따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들에게 맡기고 크고 중요한 일만 처리했더니 훨씬 효율이 오르고 편해졌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면 되었지 않겠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가장 앞선 종교적인 민족이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셨듯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는 열 가정만 모이면 회당을 세웠다. 주로 바리새인들이 회당장이 되어 율법을 가르치고 준수하도록 독려했다. 또 하나님은 단 한명의 신령한 사람으로도 세상을 뒤 엎을 수 있고 예수님께 지금 제자들이 열 두 명이나 있는데도 꼭 더 보내달라고 했어야만 하는가? 물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알다시피 형식적, 가식적, 종교적 멍에로 사람들을 얽어 매었고 자기들은 부귀영화와 권세를 추구하기 바빴다. 그들은 삯군 목자라 도저히 목자로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0:1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이 탄식을 하신 후 곧 바로 제자 훈련을 시키고 처음으로 목자로서 인턴 생활을 겪게 했고 제자들도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렇다면 39절의 성경 표현이 “추수할 것은 많고 일군은 적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훈련시킬 테니 기도로 준비하라”고 되어야 앞뒤 논리가 맞는 것이 아닐까? 바로 옆에 있는 제자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꼭 일군을 더 보내달라고 해야 했는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제자들의 숫자가 당장 모자란다는 것이 아니다. 추수할 주인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 헌신한 목자들이 모자라니까 너희들을 바로 그런 목자로 하나님이 세우게 해달라고 소원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을 많이 동원해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훈련해야 효율성이 높아져 하나님이 제대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생명이다. 사람이 믿으려 이해하고 동의해서 자기 노력과 판단으로 선택 결단 훈련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잘못을 한 두개 고치거나 율법에 규정된 대로 제사를 드리거나 불치병을 고침 받고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한 개인의 존재 전체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른 새 인생을 살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만들어 완전한 새 생명이 돋아난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영혼을 살리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문자 그대로 천국의 복음이다. 그래서 교세를 늘리는 교인 사냥꾼은 인간이 훈련시킬 수 있어도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는 하나님 만이 세울 수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아니면 제대로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본문의 예수님의 탄식은 당시의 열 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자도 동일한 기도를 하라는 요구다. 이 기도는 모든 세대 모든 믿는 자들이 다른 어떤 제목보다 먼저 평생을 걸쳐서 해야 하는 제목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최초 기독교인 120명으로부터 지난 2천년간 이 땅을 거쳐간 믿음의 선조들 모두가 한결 같이 간절히 기도했던 제목이다.

그런데 그 제목이 사실은 전도할 일군을 따로 보내달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신자 자신이 바로 땅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성삼위 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는 간구여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는 혼자 천국 가라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의 뜻이 그것뿐이라면 하나님 입장에선 구원을 주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죽기 직전이나 죽은 후에 구원하시면 그만이다. 구태여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 꾼이 되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신자는 정말 진지하고 엄숙하게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 몇 가지 생긴다. 내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일군이 맞는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가?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근거와 기준은 무엇인가? 또 그런 추수 꾼으로서 제대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한가? 전도 폭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군인가? 아니면 아직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못 받아서 일군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 훈련을 받고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추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하나님이 보낸 일군임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따로 있는데 본문 중에 설명되어 있다. 무엇인지 알겠는가? 힌트를 하나 드리면 36절에 나와 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볼 때처럼 신자가  불신자들을 볼 때 정말 불쌍한 마음이 드는가 아닌가다.

전도란 것이 “우리 목사님 말씀이 들을 만 하니 한 번만 나와 봐?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 나와 지은 죄를 반성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아. 우리 교회 식구들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고 구역 교제하면 너무 재미있어. 기독교에선 구원 받는데 따로 특별한 것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니까 한 번 믿어 보라니까” 정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에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정작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전도다. 그래서 저렇게 사는 것이 절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닌데 싶어 속에서부터 그 사람을 향해 ‘쯧쯧!’하는 탄식이 절로 우러 나오는 것이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도행전 26:28-29로 가보자.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억울한 누명을 쓴 바울이 베스도 로마 총독과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 앞에서 자기 죄에 대한 변호를 하는 장면이다. 특별히 형사적 죄를 지은 것도 없이 단지 성전에서 결례를 드리다 모함으로 잡혀 온 바울로선 자기 변호가 결국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되었다. 본문은 아그립바 왕의 복음에 대한 반응과 그에 대해 바울이 대답한 내용이다.  

적은 말로 권한다고 했는데 원어적 의미로 그 권하는 것이 아주 힘과 열성을 담아 강권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이 강제력, 물리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너 안 믿으면 틀림 없이 지옥 간다, 꼭 믿어야 살고 하나님이 복 준다”는 식은 아니라 인격적 관계에서 상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과 사랑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권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술에 잔뜩 취해 술병을 병 채로 들고 마시면서 낭떠러지 위의 외길로 가고 있는 남편을 지켜 보는 아내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마약을 하고 갱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바라 보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는 정도로는 절대 부족하다. 자기 생명도 아까운 줄 모르고 뛰어 들어가 반드시 끌어내어 오려고 하지 않겠는가?

“제발 그러지 마라. 네가 그렇게 살면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 반드시 죽는다.” 상대가 살고 죽는 문제다. 술 먹고 취한 것이나 갱들과 어울려 나쁜 짓 조금 한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전 존재와 인격이 완전히 파탄이 되고 남은 평생에 실패 뿐인 그 결과가 눈에 빤히 보인다. 그저 좀 안되었고 불쌍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바울이 그런 심정으로 간절히 왕에게 호소했지만 왕의 반응은 한 마디로 ‘말로 장난하지 말라’고 했다. 감히 왕인 자기더러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니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네 꼴을 봐라 누가 살고 누가 죽고 있는가?”라고 반문한 셈이다.

그에 대해 바울이 사슬에 묶인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길 원한다고 호소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다. “왕의 눈에는 제 모습이 아주 형편 없어 보이고 무슨 그런 꼴로 전도하느냐 웃으실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가 볼까요? 솔직히 제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슬에 속박되어 있는 것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그 어떤 부분이라도 왕과 비교해 저는 단 하나도 부족하고 꿇릴 것 없습니다.” 존대말로 표현하니 실감이 좀 덜 나는 것 같다. 표현을 바꾸어 보자.

“네가 내보다 진정 행복하다고 자신하는가? 세상에서 왕으로 군림하여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형통한 것이 과연 너에게 참 평강을 준 적이 있더냐? 네가 자유하냐? 네가 고난 가운데 받는 진정한 위로를 아느냐? 네가 이웃에게 참 사랑을 베푼 적이 있느냐? 네 인생의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붙들고 산 적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을 아느냐? 네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네가 지금 화려한 옷을 입고 왕의 권세를 가지고 보석 박힌 의자에 앉아 모든 사람이 너에게 와서 절하니까 인생으로 최고가 되었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너는 낭떠러지 위에서 술에 취해 제 정신 못 차리는 알코올 중독자에 불과해. 제발 그 자리에서 내려와 내가 있는 이 자리로 건너 와!”

단장의 미아리 고개

한국의 옛날 가요 중에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제목이 있다. 여기서 단장은 화장하여 꾸민다는 말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진다는 ‘단장(斷腸)’이다. 한국 전쟁 때에 북에서 남으로 피난 가면서 미아리 고개를 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생이별을 한 그 슬픔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는 의미였다.

‘민망’으로 번역된 원어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이란 말에서 유래했다. 예수님은 지금 속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 죄악과 고난 가운데 방황하는 인류를 유리하며 고생하는 양 떼를 보는 목자의 심정으로 나아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심정으로 보고 계신 것이다.

부모든 자식이든 차라리 죽고 없어지면 포기하거나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이별은 뻔히 살아 있는 줄 아는데도 못 만나고 있으니 더 미친다. 오늘도 온갖 병에 걸려 이런 저런 약한 모습 가운데 어떤 낭떠러지 위를 걸어가고 있을지 도저히 한 시라도 마음이 놓일 수 없다. 자나깨나 잃어버린 자식 생각뿐이다. 완악하게 하나님을 배반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있는 자식들을 당신께선 차라리 몽땅 죽여버리면 잊어 버리기라도 할 텐데 오직 자기 자식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신자가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일군이라는 증거는 오직 하나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을 바라 볼 때에 단장의 안타까움이 속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는가 이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친 혈육도 아닌 생판 남인데 그냥 한 몇 번 전도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 정말 간절히 기도한 후에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의 진리를 알기 쉽게 최선을 다해 전했는데도 안 믿으면 스스로 자기 복을 걷어 찬 꼴 아닌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자비와 긍휼이 예수님 같이 최고로 고상하고 무한한 경지에까지 다다르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전도 훈련을 받아 연습하거나 도덕적으로 거룩해져 인자한 마음을 갖고 남을 불쌍히 여기라고 한 적이 없다. 종교적 의무감으로 전도에 열심을 내어야 하고 심지어 주님이 마지막 명령으로 주셨으니 무조건 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알코올, 마약, 도박 중독이 되어 패가망신했다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아 새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 나머지 평생을 주로 어떤 일을 하며 보내는가? 자기 시간과 돈을 투자해 가며 아직도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르치며 함께 고통을 나누지 않는가? 그 중독이 생활을 망가지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완전한 죽음으로 내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는 세상에서 럭비공처럼 향방 없는 달음박질을 하고 허공을 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으로 욕심으로 행하였다.(엡4:18,19) 그러나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 새 생명을 부어 주는 순간 그런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영원한 멸망과 죽음으로 가는 지름 길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죄악에 중독된 자가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돈과 쾌락과 권세와 명예와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고자 아무리 노력하고 투자해도 갈급하고 공허한 인생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신자는 이전에 왜 인생을 사는지 어디에 소망을 걸어야 할지 모른 채 전혀 미래가 없이 캄캄한 미궁 속에서 수도 없이 넘어지고 쓰러져 보았기에 지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가슴 전체로 느낄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오직 자기를 증명하고 과시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인생과 삶이 결국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것이며 그 종착역이 눈 앞에 보인다. 지옥 불에 떨어져 끝없이 고통을 받을 모습이 눈에 빤히 보인다.

나아가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항복하여 매일을 그 분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은혜와 권능 속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절감하고 있기에 그들이 더더욱 민망해진다. 비록 바울처럼 겉으로는 사슬에 매인 채 이름도 빛도 없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 단 한 명이 없더라도, 현실적으로 안락한 내일을 기약할 만큼 당장에 먹고 사는 형편이 풍족하지 않고 오히려 궁핍하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아그립바 왕이 전혀 부럽지 않다. 우리에게는 이제 전 우주의 왕이신 주님이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불신자를 볼 때 단장의 슬픔을 느끼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다. 신자 스스로 예수 믿기 전에는 내 삶이 지옥이었지만 예수를 믿고 난 후 내 인생이 천국으로 변한 것을 매순간 확인하고 체험하기에 바로 그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 것뿐이다. 신자가 주위를 바라보면 얼마나 추수할 것이 많은지 가만 있어도 눈에 띤다. 그들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거나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일군

구세군을 창설한 윌리암 부스에게 하루는 한 신자 청년이 찾아 왔다. “사령관님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소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니 아직 한번도 부름 받은 적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선교사든지 선교지이든 둘 중의 하나일 뿐이야. 그 외는 없어”라고 부스 사령관이 대답했다. 선교지라고 해서 사람이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할 전도자이던지 증거 받아야 할 대상 즉 피전도자이던지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의 영원한 가치는 돈이 많든 적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지식이 풍부하든 아니든, 출신이 고귀하든 비천하든, 권력이 많든 적든, 성취한 업적이 위대하든 아니든 그런 것들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 까지나 세상 안에서 불완전한 인간끼리의 상대적 분석일 뿐이다. 그것도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당대에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평가다.  

인간은 우리를 지으시고 지금도 무한한 자비와 긍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 안에서만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평가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 당신의 구속 계획의 열매가 되어 있거나 아직도 당신의 문제로 남아 있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님 나라의 보배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부담이 되어 그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는 자 둘 뿐이다. 그 중간은 없으며 이것 외에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신자는 이미 어느 누구나 각자 처해 있는 시대와 처지에서 선교사로 부름 받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는 최일선 변방의 십자가 군병으로 보냄을 받은 자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추수할 주인이 보내 준 추수꾼이다. 주위를 둘러 보면 추수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가 추수할 대상은 돈이 없고 병 들어 불쌍한 자들이 아니다. 마음에 병이 들어 풍요롭지 못하고 그 영혼에 구멍이 뚫려 있는 자들이다. 현실에서 어렵고 상처 받아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은 차라리 낫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세상살이를 제대로 꾸려갈 수 없음을 깨달아 자아가 부셔나가고 있는 중이라 영원을 향해 자기들 마음 문을 열릴 수 있는 여지가 그나마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십자가 복음에 아예 고의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자들 나아가 사탄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죄의 종으로 붙들고 있는 자들이 더 불쌍하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 더러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라고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 말은 적게 했는데도 이상하게 찔림이 조금은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 실토한 말이다. 어느 정도 자기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또 이렇게 살아선 안 되는 데하며 가끔 회개도 하지만 세상이 주는 안락과 쾌락과 권세와 명예와 부귀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야말로 낭떠러지를 갈 ‘지’(之)자로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을 구원해서 살릴 자는 목사도, 선교사도, 제자 훈련이나 전도 폭발 훈련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종교적 직분과 열심과는 관계 없이 불신자들을 바라 볼 때마다 불신자 자신은 제대로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그 영혼의 공허와 갈급함에 대해 오히려 민망한 슬픔을 대신 느끼고 절로 탄식이 나오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 안고 나와 울어줄 수 있는 자다. 또 자신은 지금 예수님 안에서 천국의 너무나 풍성하고도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있기에 그 신나는 기쁨과 재미를 소개해 주고 싶어 미치는 자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질문 해보자. 당신은 하나님이 보낸 추수할 일군임을 확신하는가? 불신자들을 볼 때에 민망해지는가? 분명히 그렇다면 당신에겐 이미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권세가 함께 하고 있다. 모든 병든 자 약한 자를 찾아가 기독교 교리를 전하기 앞서 속의 그 민망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대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으로 섬겨라. 그럼 추수는 하늘에 계신 추수할 주인이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          

사라의 웃음

2011.09.16 11:40:07
*.169.30.48

전에 참 전도 많이했었습니다. 교회 나오면 병이 나아요, 사업이 흥한답니다, 성도지간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 그 교제로 세상의 괜찮은 사람 많이 만나지요.... 사기꾼 같은 전도
를 얼마나 많이했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웁고 진귀한 광경을 소개해 주는 그 일, 함께 거하여 주시는 울 주님
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안타까와 진땀이 나는 그 일, 이 곳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든 그런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말 정말 존재하는 그 천국이 이 곳의 삶과 공존한다
는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없어 절절 매는 그 일이 전도임을 배웁니다.
그 전도를 위해 추수군의 입에 추수군의 맘에 아버지의 맘이 알알이 송글 송글 스며 있는 상태가
되길 매일 매순간 염원하는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

모루두개

2024.11.30 03:17:26
*.230.44.2

이번 묵상집이 호세아였는데 마침 적절한 글을 읽었어요. 호밀밭의 파수꾼도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6 결혼 지참금 때문에 자살한 세 처녀 (마11:20-24) [1] 운영자 2004-12-07 2382
85 왜 불신자는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가? (마11:13-19) 운영자 2004-11-30 2546
84 하나님 실수하신 것 아니에요? (마11:7-12) [3] 운영자 2004-11-16 3074
83 잘 믿는데도 왜 삶은 자꾸 꼬여 가는가? (마11:1-6) [1] 운영자 2004-11-10 2883
82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졌다. (마10:40-42) [2] 운영자 2004-11-01 2754
81 기독교는 분리적이어야 한다. (마10:34-38) [2] 운영자 2004-10-26 2044
80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1] 운영자 2004-10-19 2170
79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1] 운영자 2004-10-13 1807
78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33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80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8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3] 운영자 2004-09-14 2417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613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517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28
»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2] 운영자 2004-08-17 2315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2020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93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508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59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