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8) 3/16/2003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사단 같은 목사 사모
1970년대 중동의 오일달러를 벌러 한국의 건설 회사들이 몰려 갔던 초반에 현지 사정에 어두운 한국 노무자들이 실수를 가끔 했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모스크 사원에 가서 멋 모르고 담배 피우다 끌려가 손목이 잘리거나 길거리에서 여자를 희롱하다 태장을 맞았다는 등의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이슬람교는 지금도 죄를 지으면 본문처럼 그 죄를 지은 해당 신체 부위를 절단하거나 형벌을 가한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기독교 신자들도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엄격하게 적용하기도 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하면 눈을 빼 버려라고 하시면서 또 지옥과 천국의 문제와 결부 시키고 있다. 그 까닭은 지난 주에 얘기한 대로 신자란 죽음보다 죄를 더 두려워 하고 싫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예수님의 말씀은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은가? 양귀비 같은 천하 절색이 바로 눈 앞에 일대일로 마주 보고 있다면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 남자가 세상 천지에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찌감치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간혹 신자들 가운데 성욕 자체를 부정하고 죄악시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어떤 목사 사모님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남편 되는 목사님이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 부부 관계를 맺고 나면 꼭 회개 기도를 해서 미치겠다는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의 즐거움을 평생 맛 본 적도 없고 이제 기대도 하지 않지만 회개 기도하면 자기 입장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기가 마치 남편을 죄악에 빠트린 사단 같고 아니면 최소한도 그 죄악에 동참한 공범자라는 기분을 떨 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이 성 관계를 갖기만 하면 회개 기도를 하는 이유는 아주 보수적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시작해 종족 보존 목적 외 성 관계를 갖는 것을 죄로 배웠기 때문이다. 연세가 많아 아이들이 다 컸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으니까 자기의 음란한 욕심에 넘어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일부 교단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을 허락하신 뜻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고 하신 말씀대로 종족 보존과 번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4,25)의 기록대로 부부 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고 아름답게 키워 나가는 수단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성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선물이자 축복이다. 성 자체 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는 즐거움도 절대 죄가 아니다. 성에 즐거움이 동반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 가운데 하나이지 않는가? 만약에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누가 10달씩 고생해 가며 애물 단지 같은 자식을 낳으려 감히 시도하겠는가?
교회 가기 싫은 이유
남자라면 누구나 예쁜 여자를 보고 잠시 야릇한 생각이 들 수 있다. 그것은 건강하다는 증거며 죄도 아니다. 예수님이 생각으로 지은 죄조차 지금 지옥과 연결시켜 강조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가? 본문에서 예수님은 간음이라는 죄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다. 간음을 예로 들어 죄의 본질과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영혼이 부패 된 원죄가 아닌 윤리적인 죄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몇 가지 측면에서 오해를 하는 점이 많다. 가장 초보적인 오해는 물론 행동으로 과실을 범한 것만 죄로 치는 것이다. 불신자에게 죄를 회개하시오라고 전도 했을 때 내가 살인한 적 없고 간음한 적 없는데 왜 죄인이라 하느냐고 반박한다. 순전히 행동으로 지은 잘못만 죄로 취급한다.
행동으로 지은 것만 죄가 아니다. 본문에서처럼 생각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감옥에 들어 있는 죄수들은 한결 같이 자기들이 감옥 밖에 있는 자들보다 절대 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단지 재수 없고 돈이 없었을 따름인데 정 하나 굳이 잘못을 들라면 남들보다 성질이 급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틀림 없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교양과 체면과 자존심으로 겉으로만 치장했지 속으로는 그들 보다 살인이나 간음을 훨씬 더 많이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으로 짓는 죄도 사실은 행동으로 짓는 것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겉으로 어떤 결과가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은 생각하는 것도 사고활동이므로 행동의 일종이다. 행동으로 짓던 말로 짓던 생각으로 짓던 죄가 나타나는 경로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죄의 범주에 속하며 그것 자체가 죄의 본질은 아니다. 어쩌면 죄가 죄 된 모습으로 이미 나타난 결과일 따름이다.
또 다른 죄에 대한 오해는 행동으로 판단을 못하니까 동기가 선하면 죄가 아닌 것으로 취급 한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자주 저지르는 큰 잘못 중의 하나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는데 아무리 전도를 해도 교회라면 죽어도 싫어 한다. 언젠가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친구는 백 가지도 더 꼽을 수 있는 친구다.
그 중에 이런 이유도 있다. 친구 집이 아주 큰 교회 곁인데 주일만 되면 근처 도로가 모두 노상 불법 주차로 아수라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일 주일에 한 번 오는 교회를 버스를 타던지 걸어 오면 되지 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이것 하나만 고쳐도 교회 나가겠다는 데 아직 교회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한가 보다. 하나님의 일이면 동기가 선하므로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식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그 동기가 최고로 선하지만 그 결과는 최대의 죄악으로 드러난 것이 있다. 공산주의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살자는 동기였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그 체제가 산출한 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수백만의 굶어 죽은 무죄한 백성 위에는 김정일 혼자 배에 기름이 낀 채로 군림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안점이 죄를 행동으로 지은 죄에서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그 죄의 범위를 확대 설명해 주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말이나 생각으로 죄를 짓고 나면 따로 안 배워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동기가 옳은가 그른가, 목적과 방법이 선한가 악한가 만으로도 죄를 따질 수 없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죄의 한 부분적 측면이지 죄의 본질 자체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핵심은 따로 있다.
변강쇠와 옹녀
변강쇠와 옹녀가 결혼 했다고 치자. 천하의 정력가들인 이들이 하루에도 열 번씩 성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그것은 간음도 아니요 죄도 아니다. 시쳇말로 말하면 밝히는 것이고 좋게 말하면 금실이 좋고 궁합이 잘 맞은 것 뿐이다.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도 없고 비난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중국소설 금병매의 여주인공 반금련이 약골에 무능한 남편 무대는 괄시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유능한 시동생 무송에게 한 쪽 눈만 살짝 감아도 죄요 천하의 화냥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싸다. 왜 그런가? 간단하다. 부부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선 안 될 사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죄라는 원어적 뜻은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말한다.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 엉뚱한 곳을 맞춘 것이다. 남편에게 가야 할 애교와 윙크가 시동생에게 간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자기 신분, 위치, 임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그런 죄를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여학생하고 데이트만 하고 있으면 죄다. 데이트를 할 때 동기도 순수하고 그 과정도 어떤 탈선이나 심지어 신체 접촉 한번 없이 정말 ‘가을 동화’ 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데이트 하는 것이 죄가 아니다. 그 데이트로 인해 학생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가 된다.
가정 주부가 아이들과 남편의 뒷 바라지는 뒷전이고 하루 종일 교회 일로 싸돌아 다니는 것도 죄다. 교회 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가정주부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일은 주부의 일이지 교회 봉사하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삶이 더 중요하다거나 주일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봉사와 주부로서 책임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주부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너무 잘못 가르치는 것이 주일날 한 시간이 일주일의 나머지 시간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나머지 모든 시간이 그 한 시간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강요한다. 세상에서 신자로서 거룩과 의와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주일 하루가 존재해야지 주일 날 하루 교회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기 위해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폼 잡고 잘난 척하며 승리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서 떳떳하게 싸워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술, 담배의 문제가 불신자에게는 죄가 아니지만 신자에게만은 죄가 된다. 윤리 도덕적인 측면이 아니다. 도덕적인 죄라면 불신자나 신자나 양쪽 다 공통으로 죄가 되어야지 어느 한 쪽만 적용되는 죄가 따로 없다. 불신자에게 술, 담배 자체는 건강상의 문제일 뿐이다.
신자의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술 담배는 주로 어떤 때 하게 되는가? 물론 둘 다 중독성이 있어 시도 때도 없이 하게 되지만, 그래도 주로 외롭고, 골치 아프고, 상처 받고, 불안 초조 하거나, 시련 가운데 있을 때에 주로 하게 된다. 그러면 비록 일시적이지만 스트레스와 세상 만사를 잊게 해주고 조금은 평온하게 해 주는 유익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럴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신자의 위치에 서있지 않기에 죄가 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주님 앞에 그냥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울고 불며 떼를 써도 되고 심지어 억울한 누명과 상처는 주님께 불평하고 그들을 욕해도 되는데 세상의 수단에 의지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고 골치 아파 술, 담배를 찾고 싶을 때에 간절히 무릎 꿇고 주님 앞에 엎드려 보라. 당장 술 담배를 끊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중독이 되어 얼마나 끊기가 힘들며 이미 그것들의 노예가 된 우리의 애처롭고 연약한 모습마저 주님은 잘 아시고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 하신다. 수 십년 된 그 사슬보다 우선 눈 앞에 힘들어 하는 그 문제부터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여 하나하나 해결해 주신다. 환난 가운데 분명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케 해서 신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세상 방법에 의존하고 이전의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얼마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무 쓸모 없으며 일시적인 처방밖에 되지 않는가를 점차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또 다른 시련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먼저 돌리게 하신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술, 담배 뿐 아니라 세상의 향락이 얼마나 쓸모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동안 그것들에 속았고 심지어 악하고 추하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과 멀어진 모습을 발견한다. 이전에는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좋아 했는데 이제는 본성적으로 싫어하게 된다.
교인이 되려면 술 담배를 끊어야 된다든가, 세례나 침례 받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하시오, 혹은 교인이 그것도 직분자가 술, 담배를 하면 마치 천벌이라도 받을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이 정죄해선 안 된다. 그 문제는 구원이나 복음의 진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데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꼭 보면 세상에서는 제대로 승리하는 삶을 산 것 같지 않고 교회에서만 승리하려는 장로들이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 이것은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그 본인이 얼마나 주님을 찾았는가, 주님 쪽으로 서 있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스스로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 나가야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신자로서 비록 일시적인 안정을 찾고자 하거나 중독에 걸려 제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바로 그런 측면에서 더욱 주님을 의뢰하지 않았기에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예쁜 여자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은 마치 모든 여자가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된 밍크 코트나 다이아 반지를 보고 예쁘다,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은 여자는 없다. 혹시 있다면 여자가 아니다. 신자라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외부적 자극에 내 감정이 일차적으로 보인 반응일 뿐이다.
28절의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자. ‘여자를 보고’라고 했다. 분명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말한다. ‘보고’라고 했으니 아직 데이트도 못해 보고 손도 잡지 않은 상태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마음에 음욕을 품는’다고 했다. 우리 말에 품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닭이 병아리가 부화 되어 나올 때까지 달걀을 끝까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밍크 코트를 반드시 사 입고야 말거야. 남편에게 무슨 수를 써도 사 달라고 떼를 써야지. 그 무슨 수 안에는 부정부패, 사기, 절도든 아무 상관 않겠다는뜻 아닌가? 계속해서 그 밍크 코트 사 입을 꿈을 꾸고 온갖 궁리를 하는 것이 마음에 품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죄다.
이 단어의 원어를 문법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면 ‘상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만든다’는 뜻도 있다. 장미를 백송이를 선물할까, 다이아 반지나 밍크 코트를 선물하더라도 어떡하든 저 여자와 데이트라도 한 번 해 봐야지는 잘못이며 죄다. 누가 처음부터 간음을 전제로 해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상대 여자의 생각에 사로 잡히기 시작하면 바로 거기서 죄가 출발한다. 캘빈이 말한 대로 새가 사람 머리 위에 똥을 싸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 분을 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했다. 분을 품어서 마귀가 틈을 타면 죄가 시작 된다.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떡하면 저 예쁜 여자와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나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 아내의 손을 잡아보려는 마음이 다른 여자의 손으로 둔갑한 것이다. 마음이 정작 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가 있다. 자기 마음이 마누라에게 품어져 있는 자는 절대 다른 여자를 보고 잠시 가슴은 울렁거릴 수 있어도 음욕을 품지는 않는다.
아담이 범죄한 후 부끄럽고 두려워 숨었다. 자기 스스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기 벗은 몸을 가렸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불렀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저지른 짓이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은 것이 아니다. 숨바꼭질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앞 8절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은지라”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미 아담의 바로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여호와를 고의로 피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것이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어디 있느냐? 네가 나의 품 안에 있어야만 네의 생명과 힘과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데 왜 나를 떠났느냐? 내가 붙잡고 있는 네의 손을 놓고 떠나가면 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죄악과 방황과 사망밖에 없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이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제발 나의 품 안으로 돌아오너라.”
나는 누구인가?
죄는 아무리 사소하든 크든 공통점이 있다. 죄를 짓고 난 후 절대 우리의 감정이 상쾌하거나 그 결과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다. 항상 부끄럽고 두렵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화살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화살을 쏘았는데 전혀 엉뚱한 데를 맞추었다고 가정해 보라.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그 자리에 자기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페라 극장에 청바지 작업복 차림에 갔거나, 원숭이 우리에 사람이 혼자 들어가 같이 있다고 상상 해보라. 그럼에도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진화가 맞다고 하는 사람들은 원숭이 우리에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원숭이를 자기 할아버지로 숭상한다. 아예 부끄러운 것 조차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도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도 못하는도다.”(사1:3)
있어야 할 자리를 피해서 일부러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죄다. 그래서 죄란 항상 컴컴하고 은밀한 곳에 숨어서 이뤄진다.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띌 뿐 아니라 퀴퀴하고 썩는 시궁창 냄새가 난다. 세상의 죄가 밝은 대명 천지에 이뤄지는 것을 보았는가? 검은 돈은 사과 상자에 넣어져 야밤에 전해진다. 인터넷 채팅으로 이뤄지는 불륜은 서로 누구인지도 모른 채 진행된다. 뒤틀리고 구부러져 있다. 흔히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고 한다. 역사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사건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곳에는 흑암 뿐이다.
그래서 신자가 내가 세상의 죄 중에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은 내가 어디 있는가를 보면 된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있는가 확인하면 된다.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술, 담배를 하는가, 라스베가스에 갔는가, 살인했는가, 간음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불신자들의 죄의 기준이다. 나아가 내 행동의 동기나 목적만 보아서도 모른다.
교회에서 분쟁이 나는 것이 전부 선한 일로 난다. 선교가 먼저다, 성전 건축이 먼저다로 싸우지 누가 봐도 죄인 줄 아는 나쁜 일로 싸우지 않는다. 신자가 죄를 따질 때는 오직 나의 신분, 지위, 임무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를 보아야 한다. 학생이면 학생으로, 주부면 주부로, 남편이면 남편으로, 아내면 아내로, 신자면 신자로 올바른 자리에 서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한 질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이름과 직분을 넣어서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질문은 꼭 도덕적 윤리적 문제만 따질 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의 모든 삶에 다 적용해야 한다. 언제, 어떤 장소와 환경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이 질문을 해야 한다.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특별히 어려운 환난이 있을 때 더 그렇다.
신자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내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혹은 성경을 몇 페이지 읽었는가 이다. 혹시 신앙 행동 상에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시는가 부터 먼저 점검한다. 죄란 행동으로 판별하는 것이 아니다. 혹 믿음이 나은 사람은 기도에 정욕과 죄가 개입되지나 않았는지, 기도의 동기나 목적을 점검한다. 즉 마음으로 죄를 지었는가 따져 보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도 신자가 취할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란 끊임 없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자신의 내면을 점검해 죄악과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가 얼토당토 않는 죄와 욕심에 가득찬 요구를 하나님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느 부분까지 자신의 정욕인지, 소원인지, 필요인지, 하나님 주신 생각인지, 사실은 일일이 구분이 힘들다. 무엇이든 기도하다 보면 혹시라도 정욕과 죄악으로 구한 것이라면 그것마저 깨닫게 해 주신다. 죄의 본질이 행동이나 동기가 아니라 위치라고 했듯이 신앙적으로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따질 때도 신앙의 행동과 동기를 따지기에 앞서 신앙의 위치에서 벗어났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신자가 반드시 자문해 보아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신자가 맞는가? 네 신분과 소속과 위치가 어디인가? 너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 지금 있는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신실하신 은혜 가운데 있는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영원함을 믿는가? 거기에 드러난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변개, 축소, 취소될 수 없음을 확신하는가? 네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가 천지가 개벽이 벌어지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없어지지 않음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음으로 네가 산 것을 믿느냐? 하나님 독생자의 분의 피 값으로 네를 샀기에 하나님이 천하 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아는가? 그래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믿는가? 이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깊음이나, 높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너를 끊어 낼 수 없음을 확신하는가?” 이 부분에 자신이 없으면 바로 그것이 죄다. 왜냐하면 신자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을 알기 쉽게 바꾸면 이렇게 된다. “눈을 달고 지옥 갈래? 아니면 눈 빼고 천국 갈래?” 무슨 말인가? 네 몸을 택할래, 천국을 택할래? 꼭 죽음 이후의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 하는 중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세상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자가 예쁜 여자 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으로 지옥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눈을 빼더라도 천국에 오라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품 안에 있어라는 것이다. 인간이 복을 받고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너는 누구인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