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8) 7/6/2003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 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
암 환자의 기도
어떤 초신자 아줌마가 어려운 일이 생겨 새벽기도에 나와 간절히 기도했다. 믿은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두서 없이 했던 말 또 하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동원해 기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말이 많은 것 같아 쑥스러워져 이런 한 마디로 그만 기도를 마쳤다. “하나님 아버지 한 번 입장을 바꿔서 생각 해 다 잘 알아서 해 주이소.” 사실 여부는 알 길 없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예수님은 지금 두 종류의 사람들의 기도 습관을 본 받지 말라고 하신다. 첫 째는 전 주에 살펴 본 대로 바리새인의 기도 형태인데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 사람 많은 곳에 가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솔직히 우리에게는 대표기도를 좀 멋지게 해보려는 경우를 빼고는 해당되지 않는다. 대표기도도 서로 하기 싫어 하는 데 사람들 앞에서 기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의 신앙 실력을 과시해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이 정말 순수하게 예배에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하고 성도들이 마음 문을 열어 달라는 마음으로 멋지게 대표 기도 한다면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문제는 오늘 보시는 본문의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기도하는 습관이다. 예의 아줌마처럼 자기가 들어도 쑥스러울 정도로 쓸 데 없는 말을 길게 하거나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며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꼭 기도하는 장소나 형식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기도의 동기의 잘못을 지적한 것과 마찬 가지로,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도 반드시 기도의 길이나 동일한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따지는 말씀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병원에서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말기 암으로 진단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게 하겠는가?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기도원에 들어가 밥 먹고 잠 자는 시간만 빼고, 어쩌면 그 시간 마저 아까워서 하루 종일 그저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라는 말만 골백번 되풀이하지 않겠는가?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를 붙들고 기도하면 자연적으로 중언부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암 환자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우리가 매일 간략하게 하는 식사 기도 중에 어느 것을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두 말할 것 없이 암 환자의 기도다. 하나님은 기도의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 그 무게를 단다. 또 기도의 길이를 재지 않으신다. 그 깊이 만을 잴 뿐이다. 기도를 꼭 짧게 필요한 말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도의 길이나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는 것은 그런 것들에 구애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길거나 같은 말을 많이 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얼마나 갈급한 심령과 진심으로 기도했는가 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래서 다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자기의 정욕과 죄 된 생각이 들어가면 안 되고,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서 자기 계획과 욕심을 성취하려고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해야 하며, 진심으로 가식 없이 전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이 가르침이 너무 지당한 말씀 같지 않은가? 물론 신자는 반드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적 기도 생활에는 정작 별로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누가 기도하면서 일부러 죄와 정욕이 개입된 제목을 붙들고 기도하겠는가? “저 놈의 원수를 제발 망하게 해주시고 저 놈이 갖고 있던 재산 몽땅 내가 차지하게 해주시옵소서” 식의 기도는 신자라면, 아니 정상적인 상식을 갖춘 불신자라도 하지 않는다. 예배 할 때 목사님이 어떤 기도 제목을 꺼내 놓고 “자 합심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할 때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은 별로 실감도 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르지만 남들이 다 하니까 형식적으로 기도할 수 있겠지만 초신자가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가 스스로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응답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 장난 치듯 시험해 보듯 기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도할 때는 최소한 전지전능한 절대자 앞에 아뢴다는 인식은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기도란 일단 하면 진심으로 전심을 다해 기도하게 된다.
문제는 지금 하고 있는 기도 제목들이 내 욕심으로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절대 알 수 없다. 기도를 일단 하면 기도 하는 중에 지금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자기 정욕을 채우려 기도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무슨 마음 가짐을 갖고 어떤 형식으로 기도했던 신자가 기도하는 당시만큼은 자기에게 그 제목들은 시급하고 심각한 것이며 그래서 진심으로 기도한다. 솔직히 대부분의 신자가 암에 걸릴 만큼 위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하는데 중언부언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성경을 고쳐라.
성경은 일점일획도 땅에 버릴 것도 없고 오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 만큼은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었다면 좀 고쳐야 할 것 같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칭찬을 받으려 해도 좋고, 중언부언하든 급할 때만 하든, 하나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고 다 알아서 해주세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해도 상관 안 할 테니 제발 기도 좀 해라”로 말이다.
오래 전에 식구들과 함께 미국 부페 식당에 갔을 때 일이다. 부페는 각 자 음식을 떠 오니까 함께 기도하기도 그렇고 또 불신자도 같이 있어 다들 먼저 음식을 가지러 보내고 혼자 남아 한 1-2분 눈을 감고 기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일어서려는데 어떤 흑인 중년 남자가 가까이 와 웃으며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넸다. 사연인즉 최근에 식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것도 동양 남자가 기도를 하니 너무 반가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흑인 목사였다. 나도 목사라고 화답하며 신자마저 기도하지 않는 풍조에 서로 동감했던 적이 있다.
오늘날의 신자는 어디서든 일부러라도 최소한 남이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끔 분명한 목소리나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부페 식당에서 기도하고 대신에 아이들 조용히 시키며 매너 좋게 식사하고 나와야 한다. 아직도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꽉 막힌 신자가 있는가 조롱을 들어도 좋다. 우리의 경건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어디서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자들은 정말 예의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오히려 바리새인의 기도는 아닐지언정 사람들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
본문을 따로 고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이 이미 이런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그 비슷한 뜻으로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냥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단코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 신자가 기도도 안 하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천국 갈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조건 기도하라는 것이다. “일단 무릎을 꿇어라. 제발 하나님의 전에 나오라. 그러면 그 다음은 내가 책임지마.” 하나님이 오죽 답답하시면 의인 열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지 않는다고 하셨겠는가? 그저 착하게 사는 의인을 찾으신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의인을 찾으셨다. 에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선 “만일 너희가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고 까지 하셨다. 열 명에서 한 명으로 까지 줄었다. 하나님은 그 입장에서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신자가 하나님더러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라. “더 좋은 것, 더 유익한 것, 더 거룩한 것으로 주려고 다 예비해 놓았는데 왜 찾아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하늘의 보물 창고에 먼지가 쌓여 가는 데도 그 보물을 아쉬워 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한탄 하시지 않겠는가?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신자가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 하는 것이 더 문제다. 그런데 그 안 하는 이유를 가만히 따져보면 놀랍게도 이방인이 중언부언하는 이유와 똑 같다.
열왕기 상 18장으로 가보자.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악한 왕이 있었고 그에게 우상을 숭배하는 이세벨이라는 더 악한 왕비가 있어 나라 전체가 죄악에 빠졌다. 그러자 하나님이 징계로 3년간 가뭄을 내렸다.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아는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항상 왕의 잘못을 꾸짖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아합 왕이 엘리야를 불러 이런 일이 생긴 것도 항상 나쁜 일만 예언하는 너 때문이라고 따졌다. 그러자 엘리야가 또 다시 왕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쫓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그 사실을 얼마든지 실제 증명해 보이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 한 명과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의 1:850의 대결이었다.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송아지 제물을 바치고 각각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 제물을 태우는 것으로 어느 신이 정말 옳은 신이지 판별해 보자고 했다.
놀랍게도 엘리야는 850명보고 먼저 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26절에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 뛰놀더라”고 했다. 아무리 말로 중언부언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 나중에는 행동으로라도 자기 신의 응답을 촉구했다.
몇 시간을 기도해도 아무 기별이 없어 엘리야가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27절)라고 조롱할 정도까지 되었다. 소리가 적어 혹시 못 들을 지 모르니 더 큰 소리로 기도해보라고 야유한 것이다. 그러자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28절)까지 했다. 규례대로 했다는 것은 늘 그렇게 하던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 신을 한 번 부르려면 언제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냥 불러서도 안 되고, 큰 소리로, 행동으로, 나중에는 피를 흘리며 불러야 했다는 뜻이다.
여러분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거기에는 분명히 여자 사제도 있었을 것이다. 850명이나 되는 남녀가 송아지 한 마리 복판에 두고 고함지르고 춤추고 칼로 자기들 몸을 찔러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 가히 피의 광란이다. 무당들이 춤추고 작두 위에 올라 춤 추는 꼴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 받치면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치성과 열심과 정성을 바친 것에 비례해서 받을 복이 정해진다고 믿는다. 쉽게 말해 복채를 더 많이 놓으면 점괘가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더 웃기는 것은 더 많은 정성을 바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점괘가 나오지 않는다고 믿는다. 무당에게 찾아가 딸을 낳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아들을 달라 하고 또 그러니까 자연히 굿의 단가는 올라 간다.
우상 숭배의 공통점은 바치는 돈이 적으면 흉사(凶事)와 재앙을 예언하고 많아야 길사(吉事)와 행복을 점쳐준다. 또 돈을 더 많이 받아 내는 수단으로 말로 잘 통하지 않을 때는 이상한 행위로 겁을 준다. 무당이 작두 위에 춤추는 것이나 바알 선지자들이 자해하여 피 흘리는 것이 같은 수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사장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농간이지 거기에 신이 간섭하는 증거는 없다. 간혹 사악한 사단의 무리가 무당을 이용하는 것 빼고는 말이다.
제사장들의 농간이란 그 속에 신이 없다는 뜻이다. 사단도 신이 아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그가 저지르는 모든 짓도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다. 어쩌다 무당들의 예언대로 들어 맞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무당의 요구에 절대자 신이 간섭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응답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가 간절히 요구하던 것이 우연의 일치라도 이루어졌으니 능력이 있는 양 착각하고 속는다.
우연의 일치란 다른 말로 하면 어지간해선 이뤄질 확률이 없다는 뜻이다. 자꾸만 갖다 바치는 이유는 바친 만큼 받겠다는 것 보다 그렇게 까지 바치지 않으면 안 이뤄지더라는 뜻이다. 아무리 갖다 바쳐봐야 우연의 일치니까 이뤄지지 않는다. 갈멜 산의 바알 선지자들도 엘리야가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바쳤다. 하루 종일 자기들 신에게 빌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에서처럼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처럼…
하나님은 어디에 가까이 계신가?
예수님이 본문에서 이방인들이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그렇게 해야만 들을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자기들 신에게 기별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자더러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 기도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이 갖는 그런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이 지금 묵상하시는가? 외출하셨는가? 아니면 주무시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면 자연히 중언부언 말이 많아진다. 정말 절실해서 중언부언한다면 문제 될 것 하나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중언부언 기도한다고 응답을 하지 않거나 간결하게 한다고 복을 더 주시는 분이 아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 필요한 것을 미리 다 아신다고 해서 우리가 “다 알아서 해주이소”로 때우고 기도 안 해도 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 져 주시는 것도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정말 신자의 낮아진 마음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 영향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급한 심령을 다 아신다. 특별히 애통해 하는 심령에 더 가까이 계신다. 통회하는 중심을 보신다. 신자의 눈물을 보고 한숨을 들으신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한 일이며 계획한 일이다. 처음 발단부터 되어지는 과정과 그 결과까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 완전한 결론이 준비되어 있다. 신자가 더 염려할 것 없다. 염려를 계속 붙들고 있을 필요 없이 그 염려를 단지 아뢰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바칠 것은 치성, 열심, 정성이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참 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다.
신자가 도무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시시한 일까지 알고 계실 리가 있는가?” “나 같은 초신자의 기도를 제대로 응답하시겠는가? 차라리 목사님에게 기도부탁하고 말지.” “나도 여러 번 기도해봤지만 도저히 응답되는 일이 없었어.” “어지간해선 기도 응답이 되지 않더라. 이 번 특별 새벽기도 40일 기간에 그 동안 밀린 기도 제목들이나 꺼내 놓으면 혹시 응답될까?” 우리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까지 알고 계셔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지 못한다. 어지간해서는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간주해버렸다. 중언부언하면 혹시라도 응답할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귀찮아서 포기했다. 기껏 치성을 바쳐 보려는 생각만 했지 온전히 믿고 그 앞에 항복하지 않았다. 암에 걸린 자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쳐 매어 달리듯 기도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것이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 꺼내 놓기가 부끄러운 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 기도 제목들을 기도해 봐야 하나님이 안 들어 줄 것 뻔하니까 안 하는 것이다. 또는 아직은 덜 갈급해서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해결이 되는 데 구태여 하나님 앞에 갖고 올 것까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서 능력과 만족과 위로와 기쁨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재미에 빠져서 하나님을 쳐다 볼 겨를이 없다는 말이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
처음 영어 배울 때 누구나 가장 먼저 듣는 영어 학습에 관한 경구가 있다. 영어에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것이다. 손 쉽게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 없다는 말이다. 무조건 단어와 문장을 외우고 미국 사람이 발음 하는 대로 흉내를 내고 말이 되든 안 되든 자꾸 영어로 말해야 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에 규칙, 모범 답안, 지름길이 따로 없다. 아무리 기도 세미나에 많이 참석해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무조건 기도해야 한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내 욕심이 들어가 있든 아니든, 중언부언하든 말든 상관 없다. 응답을 받고 기도에 능력이 따르는가는 오직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주 무릎을 꿇는가에 달렸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가 우리의 가는 길을 지도하신다.
진정으로 기도를 하면 어떤 형태든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어 있고 응답을 받으면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난다.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으면 자연히 자주 기도하게 된다. 꼭 시급한 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중언부언 할 필요가 없다. 나중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모자라 아쉽게 된다. 정말 일하면서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된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기쁘신 뜻을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몇 주전 제 아내가 예배 전 전교인 성경공부를 위해 교회 오는 차 중에서 교회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는 좋은 스페이스를 달라고 마음 속으로 잠깐 기도했다. 그 시간은 아직 미국 교회의 예배가 끝나기 전이라 항상 주차하려면 장소 찾느라 애를 먹는다. 하나님이 그날은 신기하게 나무 밑 서늘한 그늘 가까운 곳에 딱 하나 예비해 두셨다.
혹시 우연의 일치일 것이라고 의심하는가? 우연의 일치는 기도할 때에 가장 자주 일어난다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절대 그렇지 않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돗자리 깔아 놓고(?) 알아 맞추는 식의 기도도 아니다. 만약 매 주일마다 그런 기도를 하고 매 번 그런 응답이 있었다면 다른 문제가 된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이며 제 아내는 새로운 이단의 괴수다. 나아가 하나님과 방불할 만한 존재다. 주차 스페이스 달라는 기도는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혹시 무슨 그런 시시껄렁한 기도까지 들어주시는가라고 생각되는가? 이런 세밀하고 구체적인 기도까지 들어 주시니까 우리의 더 급하고 큰 일은 더욱 잘 알고 계시고 들어 주시지 않겠는가? 죽어 가는 환자와 한 끼 정도 굶어 배 고픈 사람 중에 누구를 먼저 돌보겠는가?
그리고 성경 공부하러 나오는 일이 시시한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아내가 “하나님 제가 성경 공부하러 가니까 주차 장소 좋은 것 주셔야지요”식으로 기도하지는 않았다. 열심을 바쳐 복을 받거나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이 당연히 보상해 주어야 된다는 식의 기도가 아니었다. 성경 공부 시간에 늦을까 걱정했거나 단순히 그냥 주차 스페이스 달라고 기도한 것 뿐이지만 전후 사정을 완전히 꿰뚫어 아시는 하나님인지라 그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그런데 기도에 관한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매일 그런 기도를 한 것도 아니라 그 날 한 번만 자기도 모르게 그런 기도를 했고 아무런 생각 없이 기도 했다는 것은 자기가 의도적으로 한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히 자기 속으로 기도했는데도 자기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누가 했다는 말인가? 성도는 어디를 가도 혼자가 아니다. 항상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시키셔 한 기도다. 신자의 마음과 영혼을 사용하여 성령님이 대신 한 기도다.
왜 그런 기도를 하게 하시는 지 아는가? 주차 장소를 시원한 것으로 주거나,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나, 많이 걷지 않게 하거나, 성경 공부 시간에 지각하지 않게 하거나 하는 것은 그 응답의 핵심이 아니다. 제 아내에게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다. 전교인 성경 공부라고 하는 데도 참석하는 가정이 몇 안 되니까, 한 명이 오든 두 명이 오든,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아 목사와 사모 둘이서 한 시간을 멍하게 보내는 경우가 있어도 실망하지 말라는 뜻이다. 너에게 내가 항상 함께 하니까 절대 낙심하지 말고 충성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따르고 단 한 명이라도 복음을 가르치는데 모든 힘을 쏟아라고 그런 기도를 시키고 또 즉시 응답을 하신 것이다.
성공하고 싶은가?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도 하나 아쉬울 것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부족하거나 부러울 것 없고 크게 어렵지 않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는 자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다. 주일 예배는 참석한다. 대신 평소 때는 전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심보다. 내 욕심과 계획대로 하다가 혹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그 때 가서야 찾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무시는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묵상하는가 염려하는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신앙이다. 그들의 속 마음은 “아예 하나님은 저리 가서 잠이나 주무시죠. 하나님 필요 없으니 잠시 저리 비켜 서 있으세요”이다.
주일에라도 교회 나오는 이유는 “혹시라도 천국이나 지옥이 있으면 어쩌나 그 때는 주일 예배 열심히 참석했으니 좀 봐주시겠지? 교회 헌금을 내 나름대로는 성의껏 냈으니 액땜은 해 주시겠지?” 정도만 기대한다. 무엇이든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 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의 그 고귀하고 풍성한 능력과 은혜를 알지 못한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얼마나 내 삶이 윤택해지고 아름다워지는지 전혀 체험을 하지 못한다. 아예 맛도 보지 못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는 갈수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나도 세밀하고 정확해 소름이 끼칠 정도까지 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져 기도하지 않고는 한 시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 그 인생에 빛과 거룩과 의와 새 생명이 넘친다.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걷게 된다.
기도하는 신자는 반드시 성공 한다. 틀림 없이 성공한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때려 죽여도 성공한다. 반면에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실패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그래도 주일 날 나오는 것 하나만이라도 귀엽게(?) 봐 주셔서 완전히 망하게는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공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는 여전히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그때 그때 자기 멋대로 생각 나는 대로 산다. 자기 생각 대로 사는 데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왜 사는지 모르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또 이들의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을 해도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신자로선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신자가 신자로서 성공을 하지 못한다. 신자는 신자인데 불신자로 산다.
성공하고 싶은가? 풍성한 삶을 누리고 싶은가? 거룩한 인생을 살고 싶은가? 신자에게만은 해답은 오직 하나다. 무조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