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61) 4/6/2003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 대며”(마5:38,39)
마르틴 루터 킹 박사
지난 4월 4일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 당해 죽은 지 35주년 되는 날이다. 흑인들이 당하는 인종차별 정책을 고치는 데 평생을 바쳤고 또한 당시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반전 운동가로도 열심히 활동했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사상자가 양측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이 때에 그가 생전에 실천했던 무저항 평화 주의가 참으로 아쉬운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지난 2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웨이크 포리스트에 있는 남침례교 사우스 이스턴 신학교에선 미국 내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 10여명과 많은 신학생, 주민들이 모여 이라크 전쟁이 성경적으로 정당한가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전쟁이라고 결론 지었다. 구약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보듯이 신자는 죄악을 바로 잡는 책임이 있고 악이 관영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방관하거나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나라가 분명히 죄악을 저지르고 있고 외교적 수단이 소진 되었을 때는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기에 그 때는 전쟁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언제가 정말 매를 들지 않고는 가망이 없는 때인가를 판단하는 것과 어떻게 정당한 방법으로 전쟁할 것인가 만 문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의 경우는 유엔 안보리 결의만 아니라 1991년 일차 걸프 전 때 체결한 항복협정을 한 번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며 그 후 12년간의 모든 외교적 노력이 실패한데다, 데드라인을 정하지 않은 채 언제까지나 속는 줄 뻔히 알면서 비폭력적 방법만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전쟁을 해야 할 시점이고 단지 전자정밀 장비로 무고한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등 정당한 방식으로 전쟁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비폭력 무저항 주의(Pacifism)’와 ‘정의의 전쟁(Just War)’ 둘 중 어느 것이 성경적으로 맞는가? 그 신학교 총장 패터슨(Paige Patterson) 박사가 우리 모두 갖고 있는 의문인 “만약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인간사 모두를 그 분만의 주권으로 통치하신다면 하나님이 죄악을 처리하도록 맡겨 두셔야지 꼭 인간이 나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1991년 일차 걸프 전쟁 때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세미나의 주제 발표자인 대니엘 하임바크 (Daniel Heimbach)박사는 로마서 13:1을 인용하여 인간 세상의 정부는 하나님 대신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할 권세를 부여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인간이 나섰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졌거나 그 배경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손을 빌려 일을 하시므로 미국정부가 나서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했다. 여러 분은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가?
자동 아멘 기계
구약성경은 출 21:24,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 갚을지니라”라고 한 것처럼 여러 곳에서 본문 38절의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 뺨도 돌려 대라고 하셨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폭파 되었으면 원수를 갚지 말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내어 주어라고 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38절은 틀렸고 39절이 맞다고 하신 말씀일까?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 그 판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와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어떤 부분에 포커스를 두고 읽는가? 대부분의 신자가 아무 거침 없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장 대답할 것이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대답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것인데 어떻게 읽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또 그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제 친구 중에 아주 교회라면 이를 가는 친구가 있다. 교회 가기 싫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자들은 무슨 일이 생겨도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암이 걸리거나 사업이 부도가 나 폭삭 망해도 하나님 뜻이라고 하면서 만면에 썩은(?) 미소를 머금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니 너무 가식적, 위선적인 것 같고, 또 불신자나 다름 없이 라스 베가스에 가서 신나게 놀다가도 어쩌다 잭팥이 터지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하나님이 헷갈린 것인지 신자가 헷갈린 것인지 자기로선 도저히 분간이 안 간다는 것이다.
지금 정의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인지, 비폭력 무저항 주의가 성경적인지 몰라서 묻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국 신자들이 설교 중에 열심히 졸다가도 목사님이 고함만 치면 그저 조건 반사적으로 아멘 하는 식의 믿음은 이제는 제발 지양해야 한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신자가 먼저 헷갈리고 있으니 큰 일이다. 우리가 이러니 세상에 제대로 전할 리 만무하다.
성경을 읽을 때는 가장 먼저 전체 문맥의 일관된 주제를 찾아야 한다. 어떤 한 주제가 어디에서 발단하여 논의 전개되다가 어디에서 어떻게 결론이 내려지는가를 세심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문단과 문단이 연결 되는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은 어디에서 발단되어 어느 단계에 와 있는 상태인가? 전체 문맥에서의 본문의 주제는 무엇인가? 문단 구분부터 해 보자.
본문은 5장 17절부터 시작되었으며 자세히 보면 21절부터 본문까지 문단이 바뀌는 첫 구절에 반복해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21절 말미에 “… 너희가 들었으나”, 27절에 같은 표현이, 31절에는 “…것이라 하였으나” 문구만 다르지 같은 표현이, 33절과 38절에도 동일하게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했다. 그 앞의 내용은 17-20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빼거나 더해서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마5:17에서 48절까지의 전체적인 큰 주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계명을 잘못 가르치고 있고 그것을 일반 유대인들도 실생활에 적용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하나씩 구체적인 예를 들어 바로 잡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예로 든 계명들을 각각의 소 단락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지만 그 파악된 소 주제(小指)도 전체 문맥의 대지(大指)에 비추어 먼저 해석해야 한다. 즉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이 적은 문단의 주제이지만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는다는 전체 문맥의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 말씀의 초점은 이혼 증서와 맹세에 관한 계명에서 보듯이 율법의 뜻을 사람들이 제 멋대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복수를 정당화 하는 데 있지 않고 힘 센 자가 연약한 자에게 과도한 복수와 정당한 손해 배상 이상을 청구하지 말라는 것인데도 마음대로 복수하는 데 이 규정을 써먹고 있는 잘못을 지적한 말씀이다. 죄악을 막기 위해 주신 율법을 오히려 악용하여 악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근본적인 완악함을 꾸짖은 것이다. 38절은 틀렸으니 대신에 39절 대로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38절의 근본적인 뜻이 바로 39절이며 39절의 뜻으로 38절을 해석하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당한 전쟁과 무저항 평화주의 둘 중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를 판정 내려 주신 말씀이 아니다.
네 죽고 나 죽자
성경은 정의의 전쟁과 비폭력 평화주의의 상반되는듯한 두 개념을 다 지지하고 있다. 구약에 죄악을 진멸하라고 하지만 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고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39절에서 말씀하신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 대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38절의 잘못을 풀어 설명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비유에 불과한 것인가? 두 가지를 다 지지하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병행하라는 말인가? 예를 든 세미나에서 주장하듯 어느 때에 무엇을 사용하여야 할 것만이 신자가 따져야 할 문제인가? 신자는 루터 킹 박사나 간디처럼 평화주의를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 당신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신자도 무저항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저항이란 엄밀하게 따지면 저항 중에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일 수 있다. 부부싸움을 할 때에 요즈음은 마누라에게 맞고 사는 남편도 가끔 나오지만 남편이 힘이 세니까 여자는 두들겨 패면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나중에는 일부러 자청해서 맞는 경우도 있다. “네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덤벼 든다. 아무리 두들겨 패도 또 패 보라고 갖다 대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 군대에서도 아예 열외로 빼서 고문관 취급을 해 준다.
간디나 루터를 개인적으로 비난하거나 그들의 업적을 폄하하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다.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폭력 무저항주의 만큼 현실적으로 도덕적인 방법이 없다. 피해자가 용서하고 양보하는 길 만이 가해자를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무저항 주의의 핵심을 놓치고 세상의 무저항 주의와 혼동하고 있다.
루터의 경우에는 수천만의 흑인이, 간디의 경우는 수억의 인도 군중이 침묵으로 그 저항에 동참했었고 그것 만으로도 거대한 파워를 형성했다. 무력이 없어도 큰 힘이 형성될 수 있었던 까닭은 가해자가 인권을 침해하고, 한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한다는 삼척동자가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확실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고 또 국제적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 분의 십자가에는 어느 누구도 동참하지 않았다. 파워 그룹을 형성한 적도 없다. 수제자 베드로도 세 번을 부인한 후 도망 가버렸다. 모든 여론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오직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도저히 파워를 형성할래야 할 수도 없는 몇몇 감상에 젖은 여인네들만 끝까지 그의 편에 남았다. 혈혈단신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상대 했다.
지금 추종자의 숫자가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킹이나 간디의 경우 비록 인권신장과 자주독립이라는 분명 선하고 도덕적인 목적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유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어쩌면 최후, 최강의 방법으로 무저항이 동원되었다. 가해자의 양보나 포기가 필연적으로 전제 되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이든 한 쪽은 승리자요 다른 쪽은 패배자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을 한 것인가 아니한 것인가? 비록 그 숫자는 전쟁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적지만 사상자도 양방 간에 발생했다. 내면적으로는 가장 극렬한 전쟁을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의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그 방법만 달랐지 정의가 죄악을 무너뜨리는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전쟁과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선 이 땅에서의 현실적인 승리는 예수님 쪽에 전혀 없었다. 하나님 본체시나 그 영광을 버리고 종의 비천한 모습으로 왔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간 것 뿐이다. 십자가의 승리의 면류관은 누가 차지 했는가? 가해자에게 돌아 갔다. 죄악 가운데 있던 예수님의 원수였던 모든 인간들이 그 승리를 차지했다.
하늘에서 있은 거대한 전투
무저항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런 차이가 있다. 다시 부부싸움을 예를 들어 보자. “그래 때리려면 얼마든지 때려 보아라. 위자료 액수만 올라가지. 이혼까지 안 가도 내 병원 치료비가 결국 네 주머니에서 나갈 테니 네만 손해지 내 돈에서 나가나. 어디 실컷 때려 봐라. 오늘 저녁부터 당장 밥이나 해 주나 봐라. 나중에 네가 언젠가는 늙어서 힘이 빠져 여자인 내 앞에도 설설 길 때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맞는 아내가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마 실제 인생에는 아무도 이런 사람이 없겠지만 남편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 아내의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나는 두들겨 맞아도 좋다. 네라는 인간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구나. 이렇게 해서라도 네 분이 풀리고 네 마음이 변화될 수만 있다면 제발 그렇게 되어 다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지만 지금이라도 이 사람의 영혼에 간섭하여 그를 용서하시고 변화시켜 주십시오.” 예수님의 저항은 바로 이 모습이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이 혈혈단신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상대로 맞섰지만 절대 빌라도와 가야바와 대결한 것이 아니요 로마제국이나 유대 종교집단과 싸운 것도 아니다. 이 땅에서 현실적인 승리의 모습이 없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죄악 된 어떤 집단이나 개인과 이 땅의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혈과 육의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계에서 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그것은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엄청난 전투였다. 전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싸웠으며 모든 싸움의 시종은 천상에서 이루어졌고 그 곳에서 승리하셨다.
십자가에선 한 쪽의 승리도 다른 쪽의 패배도 이 땅에선 없었다. 로마가 패배하고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도 아니요, 가야바나 빌라도가 패배하고 예수님이 이긴 것도 아니요, 신자는 축배를 불신자는 패배의 쓴 잔을 마신 것도 아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사단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전리품을 자기를 등지고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모든 인간들에게 공짜 선물로 나눠 준 것 뿐이다. 영계에는 패배자 셋이 있었다.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아니었다. 인간을 묶고 있는 세력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이었다.
십자가는 이 땅에서 어느 집단이 더 정당한가 아닌가를 판정 내려 한 쪽의 손을 들어 준 적이 없다. 나아가 그 나쁜 집단을 전쟁으로 고쳐야 하는가 아니면 무저항 평화주의로 고쳐야 하는지 어느 쪽이 맞는가를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 아니고는 어느 집단이나 개인도 바로 될 수 없음을 보여 준 것 뿐이다. 부시든 사담 후세인이든 십자가 앞에 벌거벗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는 어떤 도덕적인 목적을 어떤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든 그것은 이 땅에서만 통용되는 거짓일 뿐이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고 있는 담을 자기 육체로서 허무시고 사담이든 부시든 담대하게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탄탄대로 신작로를 개설했다. 그것이 십자가만의 평화주의다.
성경해석의 유일한 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기준으로 삼아 적용할 절대적인 키는 오직 하나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님 당신만이 성경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해석 근거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나 사역도 십자가의 복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영생을 얻는 매뉴얼이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지침이 아니다. 오늘의 본문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 뺨을 돌려 대어라는 말씀으로 치면 단순하게 끝까지 참고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종교적인 계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오른손잡이다. 오른 손으로 상대의 뺨을 치면 어느 쪽 편이 맞는가? 왼쪽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 편 뺨을 맞으면이라고 했다. 왼손잡이를 대상으로 말씀하지 않은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뺨을 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른손잡이가 상대의 오른 편 뺨을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등으로 반대 방향에서 거슬러 오듯 때려야 한다. 중세 기사도 영화 같은데 보면 상대에게 모욕을 주어 결투 신청할 때에 장갑 낀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 뺨을 툭 건드려야 한다. 바로 그 모습이다. 힘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모욕을 주거나 앙갚음을 하기 위해 때리는 모습이다.
너무 세밀하고 지나친 해석 같은가? 그렇지 않다. 오른 편이든 왼 편이든 원래 뺨을 때리는 것 자체가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두들겨 패 죽이려면 절대 뺨부터 때리지 않는다. 먼저 복부를 쳐서 힘을 뺀 후에 앞으로 구부러지면 머리, 어깨 무차별로 두들겨 패는 법이다. 권투 선수도 보디 블로우를 주로 쳐서 상대의 스피드를 둔화 시킨 후에 뺨은 맨 나중에 때린다. 상대가 부화를 돋구어 도저히 속에서 끓어 오르는 분을 못 참아 극도로 손상당한 자존심이 폭발할 때에 뺨을 때리지 상대에게 심한 타격을 주어 승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라는 계명을 하나님이 주신 뜻은 과도한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손해 본만큼만 되찾고자 하지 않고 꼭 몇배를 더 우려내려 한다는 것이다. 체면과 위신이 상한 것에 속이 뒤틀리고 오른 뺨을 맞으면 왕복으로 수십 차례 때려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도 완전히가 아니라 반쯤 풀리고 남은 분을 어떻게 삭이나 씩씩 거리게 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라는 것이다.
솔직히 오른 뺨을 맞고 가만히 무저항으로 있는 것이 너희가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이지 않느냐? 속으로는 갈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마음 속으로 형제를 라가라고 수십 번씩 욕을 하여 살인죄를 범하고도 겉으로는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큰 소리 치며 하나님이 필요 없고 구원 받을 이유도 없다고 고개를 쳐드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실체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인간 존재의 깊숙한 심령의 본체가 얼마나 썩어서 그 냄새가 진동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 죄를 너희들 스스로 감당할 재간이 있더냐? 예수님의 산상수훈 전체에서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까 뒤집어 지적만 한 것이 아니다. 죄책감의 멍에를 심어 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웃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십자가에 내가 대신 짊어 지고 가겠다고 오셨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예수님이 왜 비폭력 무저항으로 십자가를 지셨는가? 다른 방법이 없어 최후의 저항으로 지셨는가? 그 분은 이 땅에 처음부터 수난 받는 종으로 십자가에 죽으려 오셨다. 인간에게 자기를 희생하며 남을 사랑하는 최고의 선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 우리더러 따라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시범을 보일 때는 항상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조금 연습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아무도 제대로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예수님이 도수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까닭은 인간에게 십자가를 설명해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로 로마제국을 쓸어 엎을 수 있었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른 뺨을 맞은 것을 반드시 그 수십 배로 되 갚아 주지 않고는 치가 떨려 잠을 못 자는 인간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방법으로 되지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벌써 말로 하지 왜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죽겠는가? 세상의 방법으로 인간을 용서하고 변화 시킬 수 없다. 그것은 세상 밖의 방법이어야 한다. 십자가의 싸움 자체가 천상의 싸움이듯이 말이다. 십자가는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을 당신께서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이 무저항 주의로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간 것은 십자가가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늘 승리의 전리품을 나눠 주시기 위해서다. 부활과 성령 강림이라는 준비 되어 있는 주님만의 수순(手順)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끝나버렸다면 이 세상의 현실적 승리가 하나도 없었으니 인류에게 평화도 정의도 없었지 않았겠는가?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원수된 인간에게 말로 해서 알아 들을 리가 더더욱 없다.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성령이 너희에게 하는 말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 올 자가 없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이며 너희가 나를 떠나선 아무 일도 할 수 없느니라. 이제 지혜의 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렁이 수준도 되지 않는 인간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뺨 한 차례 맞고는 밤 새도록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꿍꿍 앓는다. 그런 참으로 비겁하고 치사하며 나약한 인간을 살리고 회복시키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길은 십자가 뿐이다. 주님이 우리를 일 대 일로 찾아 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광채가 비췰 때라야만 우리의 영혼이 다시 거듭난다.
십자가가 무저항 평화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인간에게 아무 소망도 없다. 십자가는 부활의 새생명주의다. 성령으로 거듭나 모든 인간이 함께 승리하는 주의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고 복을 받을 길이 절대 없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의 삶, 인생, 존재의 근원이신 그 분 앞에 무릎 꿇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오른 뺨을 맞아도 왼 뺨을 돌려 댈 수 있게 된다.
그 신학교의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은 신학적 이론으로는 하나도 틀릴 것이 없다. 정확하게 맞다. 그러나 신학적 교리가 옳다는 것과 실제 미국 정부가 정말 이라크에서 죄악을 제거하고 진심으로 이라크 국민들을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다. 그 토론을 주재한 신학교 교수, 목사들의 마음도 이 문제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일차적인 대상이 지금으로 치면 목사들인 바리새인들이지 않는가? 너희들이 진심으로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가르치지도 못한다고 꾸중한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오늘 날의 신자가 아직도 정당한 전쟁과 무저항 주의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그 둘 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지는 결과적 모습일 뿐이다. 성경에 드러난 영원한 불변의 진리는 오직 하나다.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지금 혹시 남에게 뺨을 맞고 아직도 얼얼해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반 분이라도 풀까 고민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신자가 되었으니 정당한 전쟁을 해도 되는지, 끝까지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 고통을 감당할 무저항 주의로 나가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는가? 그것을 물을 이유가 없다. 이미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해 줄 생각이 있는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살릴 진정과 열정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달라고 하면 된다. 정당한 전쟁으로 그를 변화 시킬지 평화주의로 그를 회복시킬지는 하나님의 몫이다.
세상의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까 기도 중 인가? 방법을 찾기 이전에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하라. 그 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이뤄주신 일을 먼저 회상해보라. 그 분은 복음이라는 전리품을 선물로 모든 신자에게 이미 주어 놓으셨다. 우리가 쓰려져 있고 상처 받고 시련 가운데 힘드는 것을 주님 당신이 원하시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신 승리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참된 정의의 전쟁이자 비폭력 평화 주의의 실체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주의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이자, 선물이며 신자가 누려야 할 축복이자 권세다.
진정한 승리는 세상을 이기시고 모든 것을 이루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뿐임을^^ 이 십자가의 은혜로 부터 오는 위로와 평강으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우리 모두 담대하게 세상에 맞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