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영화 보다 애인과 헤어진 사연(마5:43-48)

조회 수 2667 추천 수 144 2003.07.08 22:57:40
마태복음 강해 (64) 6/1/200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의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3-48)

세례증이 필요 했던 박사  

실제로 있었던 일로 가까운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아주 성실한 분이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교수로 취직하려고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었다. 과가 과인만큼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전부 기독교 계통이었으므로   교수가 되려면 교인이어야 했고 세례증을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이 분은 완전 불신자인데다 항상 기독교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발하고 따지기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마침 부하 직원 중에 아주 신실한 신자가 한 사람 있어 불러 “도대체  세례증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하고  의논을 했다. 이 부하는 전도할 좋은 기회라 생각해 교회에 등록하고 한 일년쯤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다니면 얻을 수 있다고 권했다.

곧 취직해야 할 형편에 일년이나 기다릴 수가 없어 궁리 끝에 집 주위의 어떤 교회를 찾아가 목사님과 단도직입적으로 담판을 지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제가 두 달 안으로 꼭 세례증이 필요한데 무조건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조건을 내 걸겠습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해서 목사님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으면 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 목사님은 정성이 너무 갸륵해 그러마 하고 약속하셨다.

그날부터 매일 열심히 성경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목사님을 찾아가 묻기도 하며 정말 박사 공부하듯이 파헤쳐 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점차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성경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로마서를 읽어 나갈 때쯤에는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과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두렵고 떨리기도 했으며,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의 진리가 아니고는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세상 앞에 그토록 자랑으로 여겼던 자신의 도덕적 의와 뛰어난 지성과 교만한 자아가 완전히 부셔져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 박사 테스트

지금 여러분이 그 박사이고 제가 그 목사였다고 가정해서 오늘의 본문에 대해 한가지 질문을 해 보자. 교회를 열심히 다닌 여러분이 두 달 공부한 그 박사보다는 최소한 성경을 보는 실력이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어떤 이유와 차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혹시라도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 무엇인가, 원수 사랑은 너무나 선한 일로 당연히 인간이 해야 할 일인데 별 싱거운  질문을 한다고 의아심이 생기는가?

아까 예로 든 그 박사가 성경을 읽고 두 달 만에 변화 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그 사람의 중생은 성령의 간섭을 통한 하나님의 전적 은혜인 것은 틀림 없지만, 정작 본인의 입장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본인이 성경을 공부할 때에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커녕 별다른 상식도 없었고 성령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무지했을 것이다. 딱 한가지 이전과 달랐던 것은 기독교에 대해 반발과 불신과 의심만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음 문이 어느 정도 열린 상태에서 정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 알아 보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으로 보았다. 나아가 성경을 순서대로 맥을 짚어가며 전체 주제와 문맥에 비추어 따라 가다 보니 도저히 부인할래야 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본문도 성경의 앞뒤 문맥에 드러나는 일관된 주제를 따지지 않고 보면 단순히 원수를 사랑하는 선한 일을 하라는 도덕적 훈계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을 꼭 박사 공부하듯이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고자 마음 문을 열어야 하고 읽고 있는 내용을 성경 전체의 주제와 연결 시켜야만 한다.

마태복음5:9로 가 보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본문 45절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같이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 즉 원수와 화평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성경에서 아들이라고 칭할 때는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을 상속 받는 자격을 갖춘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신자가 되는 자격 여부를 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제대로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거기다 본문의 46-48절까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신자라도 한다고 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신자가 되었으니 더 착해지고  고급한 선행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달라야 한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지금 원수를 사랑하느냐 못하느냐 여부로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차원으로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가 되어서도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불신자와 하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자가 아니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지만 신자 된 표시는 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신자라면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말 마음 문을 열고 앞 뒤 문맥을 정확하게 짚어 가면서 읽으면 그 박사처럼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박사처럼 정확하게 파고 들 필요는 없지만 마음 문은 열어야 한다. “주여 지금 내 심령에 대고  말씀 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하는 갈급한 소망과 열심을 갖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누구라도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심으로 무서워 떠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의 정미함에 묻어져 있는 은혜와 권능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과 예수님의 구주되심에 대한 경외심에 휩싸이게 된다.

사랑의 반대

여러분에게 이제는 성경 박사 테스트가 아니라 신자인지 아닌지 가름하는 질문을 하나 해보자. 솔직히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가? 당장에 원수가 없다면 당신이 원수를 사랑을 할 수는 있겠는가? 도저히 자신이 없는가? 그럼 신자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지난 주에 살펴 본대로 그리 쉬운 문제는 절대 아니다. 원수는 원수인 상태로는 사랑할 수 없다. 원수가 더 이상 원수로 보이지 않아야만 그나마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녔고 어떤 식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 제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 원수를 변화시켜 주세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기도는 자기를 아주 완전한 성인군자로 바꾸어 주든지, 상대를 내 마음에 들게끔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결국 불신자처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신자가 스스로 노력하고  훈련하는 부분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지금 원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의 핑계가 되지 못한다.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사랑을 소원하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사랑의 본질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원수를 사랑하려고는 하되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으니 잘 안 될 수밖에 없다.  

원수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항상 젊은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하는 것만 먼저 머리에 떠 올린다. 연애할 때의 그런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착각한다. 일단 좋아하는 마음이 들고 무엇인가 사랑스런 구석이 보여야만 한다. 가슴 속에서 사이다가 샘 솟듯 즐겁고 기쁜 감정이 퐁퐁 솟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부담 없이 저절로 찾아 가고 싶고, 찾아가 함께 있기만 해도 즐겁고, 무엇이든 가진 것 아까운 마음 없이 나눠주고 베풀어야만 사랑이라고 믿는다.

내 돈 떼먹고 도망 간 사람을 어떻게 먼저 찾아 가서 오죽 힘들면 그렇게 사기를 쳤겠느냐고 안타까워 하며 먼저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을 쳐다보니 미운 구석은 다 사라지고 예쁜 부분이 생겼는가? 원수의 형편이 어려워 보여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주고 와야만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  것인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떤 면에서 진정한 사랑도 아니다.

어떤 개념에 대해 의미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반대를 먼저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반대 개념이 정확하게 드러나면 반대의 반대를 찾으면 원래 알고자 하는 의미를 찾게 된다.

그런 뜻에서 사랑의 반대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시기, 질투, 원한, 저주, 증오 같은 개념을 들지만 틀린 생각이다. 데이트를 열심히 하다 헤어질 때 죽일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지는 않는다. 원한을 품고 분노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랑하지 않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 이런 개념들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랑에는 기쁨, 설레임, 베품, 섬김, 희생 같은 긍정적 측면과 시기, 질투, 원한 같은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단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사랑이 아닐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버린다.    

데이트 하다가 상대가 싫어진 이유는 그냥 덤덤해지고 만나도 별 재미가 없고 아무 감격이 안 생기는 까닭이지 미워진 것이 아니다. 내 생각 속에 일정한 부분을 항상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지워진 결과다. 나의 특별한 관심 밖으로 밀려 나간 것이다. 무관심해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사랑의 반대다. 그럼 사랑의 본질은 무관심의 반대 즉 상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반드시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착각한다. 발단과 과정과 결과 모두에 바람직한 모습이 따라야만 한다고 믿는다. 일반적이고도 통상적인 인간관계보다 더 특별하고 좋고 아름답고 선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간주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고급한 차원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꼽고 원수를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 희생하고 양보하고 베푸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제대로 원수를 사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본질

어떤 청년이 미스 코리아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미녀와 데이트를 했다. 처음 만나 극장 구경 간 날 영화를 보고 나오자 마자 절교 선언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싸우지도 않았고 특별히 여자가 매너 나쁘게 행동한 것도 없었는데도 헤어졌다. 외국 영화가 끝나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The End”라는 자막을 보고 여자가 ‘더엔드’ 라고 큰 소리로 읽은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영어의 정관사 ‘The’ 뒤에 모음이 첫 글자인 단어가 오면 ‘더’가 아니라 ‘디’로 읽어야 한다는 중학교 영어 시간에 배운 것도 모른다는 무식을 스스로 큰 소리로 폭로한 셈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그 청년의 입장에선 정이 뚝 떨어지고 아무리 양귀비 같은 미녀라도 더 이상 만나기 싫어진 것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셈이다. 한창 불이 붙어 연애 할 때에 우리 모두 밤마다 되풀이 했던 일이 하나 있다. 여자 집 앞에까지 바래다 주어 놓고는 또 헤어지기 아쉬워 이제 남자 집까지 되 바래다 주지 않았던가? 그러다 밤새 왔다 갔다 하며 마지막 차 시간을 놓치기도 했다. 특별히 좋고 신나는 일이 없어도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다.    

사랑이란 더 좋고 더 특별한 어떤 관계를 이루어 내는 힘이 절대 아니다. 아주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관계일지라도 나아가 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일지라도 그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관계를 끝내지 않고 그 상대와 마지막까지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관계를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소망이자 그것을 어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 관계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부부도 속으로는 원수이면서 마지 못해 사는 경우가 많고 헤어지면 당장 남이 된다. 부모 자식 간에는 자식은 간혹 부모를 떠날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절대 내 몰라라 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 속에 난 아이라도 미워 죽겠고 저 놈 때문에 내가 이 고생하나 싶은 후회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래도 자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 관계만은 이어간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고린도전서 13:4-7에 사랑의 특성을 15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먼저라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  좋아하고 잘해 주고 베풀고 이런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고  끊지 않겠다는 것이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런 뜻이다. 설사 상대가 전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먼저 관계를 끊을지라도 나아가 나에게 온갖 음해와 저주와 피해를 입힐지라도 이쪽에서는 관계를 절대 끊지 않고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설사 상대의 거부로 인하거나,  나의 감정 상태가 허락하지 않거나, 내 현실적인 여유와 시간이 없어 실질적인 관계와 만남은 없을지라도 상대를 무관심 상태로 내 몰아 내지  않겠다는 것이 사랑이다.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 보며 내 머리 속에 남겨 두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이것 없이는 아무리 감정적으로 좋고 현실적으로 잘 해주고 베풀어도 사랑이 아니다. 얼마든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의를 자랑하거나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
        
예수님이 신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와 근거를 무엇에다 기준 해야 한다고 하셨는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45절)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원리와  모습에 비추어 보라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악인의 조건과 상태로 봐선 구태여 은혜를 베풀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셨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고 심지어 저주할지라도 그 관계를 하나님 쪽에서 먼저 끊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아서는 당장 불 벼락을 내려 다 태워 없애도 부족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 하지 않으신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 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면 심판하셔야 하는데 자기 가 창조하신 자기 자식인데 그것도 어린아이부터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인간이 어려서부터 계획하는 것이 악하면 평생을 두고 죄악 가운데 빠져 썩어갈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될지라도 심판은 보류하겠다는 것이다.

신실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변함이 없으시다. 잘 믿기만 하면 영원토록 넘치는 형통으로 부어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변함 없는 유일한 소원이 있다는 뜻이다. “너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너와의 관계를 절대 끊지 않겠다.”  언젠가 네가 죄악과 사망과 사단의 흉계와 결박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진정으로 깨달아 마음 문을 열고 나의 사랑을 받아 들이기 위해 내 앞으로 돌아 오는 그 날까지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집 나간 탕자가 돌아 오기를 매일 문 앞에 나와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원수를 지켜 보아라.

사랑이란 상대가 바뀐 것 하나 없어도,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 없이, 원수가 되어 있어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참고 또 참고 오래 참아 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서 상대를 감정적으로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선행을 베풀어라는 것도 아니다. 싫고 미운 마음을 기도해서 억지로 바꾸는 것도 아니다. 신자가 되었고 집사 직분을 받았으니 예수님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해야지 하는 종교적 의무도 절대 아니다. 네가 그 사람과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은가 아니면 어떤 형태라도 이어가고 싶은가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가 된 후는 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달라져야 한다. 불신자 시절에는 인간 관계의 친밀도, 계속성 등을 좌우하는 변수는 감정, 상호 이해 타산, 혈연 지연 학연 같은 현실적 배경, 자존심 위신 체면, 교양, 지성, 도덕성과 종교성 같이 오로지 인간의 판단력과 이해력에 의존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 이해관계, 자존심 같은 것들이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는 우리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 관계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런 것들에 의지하면서도 아름다운 관계가 끝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부터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나온 어떤 것들도 다 유한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것으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참 된 관계를 이어 갈 수 없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관계를 시작도 하지 못한다. 진정한 관계가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중간에 흔들리고 틀어져서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간 관계를 참되게 시작하게 하고 끝까지 선하게 이끌어 가게 하는 동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 뿐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직접 다 감당하셨고 그 모든 것을 등 뒤에 던지셔서 두 번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지라도 오직 그 분 앞으로 무릎 꿇고 나오기만 끝까지 기다리시는 바로 그 모습이다. 우리 또한 원수를 향해 아니 모든 사람을 대해 이 마음으로 상대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인간적 감정과 이해 타산으로는 제대로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며 그 관계를 이어갈 능력이 절대   우리에겐 없다.  

우리가 제대로 신자가 되었는가 아닌가 테스트 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원수를 사랑하는가 이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불신자 수준을 못 벗어 난 것이다. 이것을 일상적인 우리 신앙 생활에 쉽게 적용하면  이런 경우다. 아직도 교회 안에 저 사람과는 말도 하기 싫고 보기도 싫다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가로 판단하는 것이다. 별로 관계를 맺고 싶지 않거나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아직 제대로 신자가 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못 박히셨는지 모르고 있다는 표시다. 내 자신을 위해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상대를 위해선 주님이 죽으셨을 리도 없고 그를 위해 죽으시는 것조차 싫다는 뜻이다.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상대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 상대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이 있으며 온화하고 인품과 신실함을 갖추었다는 것을 인정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상대를 판단하고 그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상대를 대신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죽어라는 식의 엄청나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상대에게서 관심을 끊지만 않으면 된다. 나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섣불리 지우지 않아야 한다. 꼭 찾아가서 먼저 교제를 터고 밥 사주고 안 해도 된다. 심지어 싫고 미운 감정을 안 지워도 된다. 단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면 된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상대를 좋아할 만한 구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상대에게서 사랑스런 모습이 절로 나타나는가? 하나님이 상대를 바꿔 주시거나 나의 마음 상태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상대로부터 나와 똑 같은 불쌍하고 다 떨어진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아파트 렌트비 낼 돈이 없어 쩔쩔 매거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상처 받아 밤새 괴로워 하거나,  단 돈 백 불에 그 인생이 치사하고 더러워지거나, 부부와 부모 자식간에 하루도 빠짐 없이 찌지고 볶는 모습, 나와 단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게 된다.

관심을 갖고 상대를 보면 상대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예수님이 그를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모두가 얼마나 불쌍하고 연약하고 무지한가를 절감한다. 주일마다 만나는 동료 신자도 아직 죄의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여전히 불신자나 다름 없이 쓰러지고 넘어지는 꼴이 보인다. 그가 넘어진 가운데  보이는 것은 오히려 나의 쓰러지고 넘어진 모습이다.  

그러나 단순한 관심 만으론 잘 안 된다. 십자가의 관심이어야 한다. 세상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관심으로는 상대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그 사람의 실력과 매너 밖에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선 평생을 가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관계도 맺거나 유지하지 못한다. 상대와 나의 실력과 매너가 거의 같은 수준이 아니고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를 당장 찾아가 서로 용서하고 사죄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 가진 것 베풀어 줄만한 실력을 못 갖추었다. 예수님이 44절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셨다. 그에게 관심을 끊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중간에 개입해 달라는 소원을 가지라는 것이다.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때만이 나도 불쌍하지만 저 사람도 애처롭다는 마음이 들게 되고 비로소 생전 처음 원수를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 정말 신자가 된 것이다.      

낙타무릎

2010.11.05 04:38:35
*.63.197.140

"사랑"의 차원높은 강해를 은혜로 받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1.06.18 11:08:43
*.174.67.99

기다려 주는 것, 나와 그 모습이 너무도 닮았기에, 나도 그와 똑같기에 기다려 주는 것이
사랑임을, 억지로 노력하고 억지로 감정을 살려서 사랑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고
잠잠히 기다려 주는 것...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7.31 18:42:23
*.14.99.253

'관심을 갖고 상대를 보면 상대에게서 나를 발견한다. 예수님이 그를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관계를 끊지 않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때만이 나도 불쌍하지만 저 사람도 애처롭다는 마음이 들게 되고 비로소 생전 처음 원수를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

 

너무나 공감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모루두개

2024.10.15 03:03:34
*.230.44.2

이미 오래전에 '정뚝떨' 주제를 다루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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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세상에서 최고로 시원한 사이다 (마6:9) [1] 운영자 2003-08-27 1991
25 어중이 떠중이 같은 패거리 신자들(마6:9) [1] 운영자 2003-08-20 1538
24 왜 목사는 분신 자살을 하지 않는가?(막15:42-47) [1] 운영자 2003-08-06 1707
23 데이트 중에 가버린 여자 (마6:9) [1] 운영자 2003-07-29 1570
22 돼지도 웃는 돼지의 자살 사건(마6:9) 운영자 2003-07-22 1857
21 스파게티도 못 먹는 신자(마6:9-13) [1] 운영자 2003-07-15 1962
20 하나님은 가서 잠이나 주무시죠(마6:7,8) [3] 운영자 2003-07-08 2283
19 어느 신학생의 솔직한 고백(마6:5-6) [2] 운영자 2003-07-08 5118
18 이민 사회의 치명적 잘못(마6:1-4) [2] 운영자 2003-07-08 2236
17 주일 마다 듣는 패전 보고 (마5:43-48) [3] 운영자 2003-07-08 2116
» 영화 보다 애인과 헤어진 사연(마5:43-48) [4] 운영자 2003-07-08 2667
15 원수는 영원히 원수일 뿐이다. (마5:43,44) [2] 운영자 2003-07-08 2587
14 실컷데리고 놀다 제 자리에만 돌려 놓아라(마5:38-42) [3] 운영자 2003-07-08 2433
13 간디냐? 부시냐?(마5:38,39) [2] 운영자 2003-07-08 2349
12 헛갈리시는 하나님(마5:33-37) [1] 운영자 2003-06-27 2531
11 영원히 병신인 반 쪽 (마5:31-32) 운영자 2003-06-17 2541
10 변강쇠가 옹녀를 만나게 되면?(마5:27-30) [2] 운영자 2003-06-17 2802
9 주차장에서 쌍욕하며 싸우는 두 귀부인(마5:25-26) [1] 운영자 2003-06-17 2138
8 쪽집게 같은 예수님(마5:21-24) [4] 운영자 2003-06-17 2459
7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 (마5:18-20) [2] 운영자 2003-06-1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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