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돼지도 웃는 돼지의 자살 사건(마6:9)

조회 수 1857 추천 수 75 2003.07.22 19:21:19

마태복음 강해 70 (주기도문 강해 2)  7/20/200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바뀌어 버린 애국가 가사

제 학교 후배 한 사람이 몇 주 전 한국의 한 기독교 대학의 교수직에 응시했다. 기독교 대학인지라 성경적 시각으로 접근한 전공과목에 관한 에세이를 써내야 했다. 일종의 신앙고백서이자 자기 전공을 하나님의 뜻과 어떻게 접목시켜서 가르칠 것인가를 보자는 뜻이다. 그 수필을 제출하기 전에 혹시 성경적으로 잘못된 내용이 들어갈까 목사에게 감수를 받아야겠다고 이멜로 보내왔는데 내용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제가 딱 하나를 고치지 않으면 서류심사부터 탈락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 분이 신앙이 있고 교회도 성실하게 출석하지만 믿은 지 얼마 안되어  에세이 군데군데에 하나님의 이름이 ‘하느님’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아무리 최종 수정을 그치지 않은 초안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이라고 적은 것은 아직도 그 호칭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한 탓일 것이다.

제가 어렸을 때 배운 애국가의 가사는 “하나님이 보호하사”였는데 기독교 냄새가 너무 난다고 언제부터인가 타종교인들의 반대로 “하느님”으로 바뀌어버렸다. 간혹 신자들 중에도 기독교에서 믿는 신의 이름이 하나님과 하느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거나 알아도 왜 꼭 하나님으로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꽤 되는 것 같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가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난에 들어가 보면 영어로는 “God watch over our land forever”로 되어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차피 영어로는 God으로 번역되는 같은 신인데 한글 모음 하나만 다른 것인지? 예수님이 지금 우리더러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라고 했듯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하느님도 맞는 것인지?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타종교에서 부르듯이 하느님이라고 쓰면 되는 데 개신교만 구태여 하나님이라고 해 배타적이니, 완고하니, 우월을 자랑하는 교만이니 욕을 먹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눈물 흘리는 암소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선 우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 지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에만 계시는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다 계시는가?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신 것인가? 셋 다 맞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셋 다 맞다는 뜻은 수학 문제를 풀 때에 답이 셋 있는데 셋 중 하나만 적어도 정답인 것이 아니라 셋을 다 쓰야만 정답이 되는 경우와 같다.  

이 셋을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좀 어렵지만 하늘에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의미한다. 어디든지 다 계신 것은  편재성(遍在性) 이다. 이 때의 편은 어려운 한자 말로 내 편 네 편을 나누는 한 쪽에 치우친다는 뜻의 ‘편(偏)’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는 뜻의 ‘두루 - 편(遍)’을 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은 내재성(內在性)이다. 하나님이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장소적 개념을 논할 때는 이 세가지 속성이 다 적용된다.  

다시 한 번 질문 해 보자. 그럼 이 세가지 속성 중에 하나만 고른다면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가? 방금 셋 다 써야 정답이라고 해 놓고 왜 또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가? 셋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은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느 것이 가장 적당한가를 따져 보자는 것인데 신자에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의 제 후배처럼 어디 가서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아주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지만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접근해 보자. 돌, 물, 공기 같은 것은   무생물이다. 생명이 없어 스스로 자라지 못한다. 산소, 수소 같은 원자가 모인 결정체일 뿐이다. 분자 구조만 있고 물질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동물, 식물은 생물이다. 살아있는 물체로 분자구조에 생명이 플러스 된 것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몇 천년 전의 밀알 씨앗이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씨앗을 땅에 심었더니 싹이 났다. 우주 만물을 화학적 분자구조만으로는
절대 분석이 안되고 이해도 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는 엄청난 것이다. 인간의 이해나 접근을 감히 허용하지 않는다.

근래에 인간들이 복제 양, 복제 인간을 만든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감이나 사과나무 같은 과일 나무를 접붙여 새 품종을 개발하는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된다. 가지 안에 흐르는 생명의 씨앗을 인간이 심어줄 수 없다. 이미 자라고 있는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 올 수는 있어도 가지 자체를 만들 수는 절대 없다.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조차 생명을 만들 수 없는데 아무 지성이 없거나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지성을 가진 어떤 분자구조 결정체 안에서 우연히 생명이 싹 튼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생명이 진화로 생길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을 해도 알 수 있는데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진화의 여러 모순을 알고도 또 실제 솔직한 속내로는 진화를 완전히 믿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우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그런데 관심이 없는 척하거나 오직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자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보다. 정말 완악한 고집이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롬2:5)를 자기들 머리에 스스로 쌓고 있는 자들이다.

인간은 무생물, 생물과도 다른 존재다. 물질과 생명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 흔히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지정의나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꼽는데 동물도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둘 다 갖고 있다. 돌 고래의 아이큐가 120정도 된다고 한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높다.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가 울며 들어간다고 한다. 성경에도 그런 비슷한 예가 나온다.

사무엘 상 6장에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적군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으로 탈취한 사건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벌로 블레셋 경내에 독종이 번지게 해서 벌을 주셨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아무래도 독종이 번진 것이  언약궤 때문인 것 같아 돌려 주기로 결정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한다. 젖 나는 암소로  언약괘를 실은 새 수레를 몰게 했다. 젖 나는 암소란 방금 송아지를 낳았기 때문에 그 새끼와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떨어지면 울 수 있는 감정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수레를 몰고 이스라엘 지경으로 똑 바로 가면 소의 의지와 감정을 넘어선 어떤 힘이 언약궤로부터 작용한 것으로 보고 그 독종은 여호와 때문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를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삼상6: 12)고 분명히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돼지도 웃는 돼지의 자살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영혼이다. 마태복음 8장에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 주시는 기사가 나온다. 쫓겨 나온 귀신들이 마침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그 돼지들이 바닷물에 뛰어 들어가 몰살한다. 이 기사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돼지가 자살하는가? 동물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 어미가 사자 같은 맹수에게 덤벼 들다 죽는 경우 빼고는 아무리 위급해도 살기 싫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법은 없다. 돼지가 자살했다는 것은 돼지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영적 존재가 아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동물은 귀신을 수용하지 못한다. 이상한 영적인 파워가 돼지에게 들어가니까 안 그래도 지능이 가장 낮은 돼지로선 도저히 자기의 지정의가 통제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 버린 것이다. 정신이 빠지고 완전히 미쳐버려 떼를 지어 우왕좌왕하다  물에 뛰어들어 몰살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뱀이 이브를 유혹한 것은 사단이 뱀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지, 이미 생겨져 있는 뱀에 귀신이 들어가 붙었다는 뜻은 아니다. 혹시 붙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동물이 자기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다. 동물에게는 영(靈)이 들어가 자리할 영역이 그 내면에 없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성경에 있는데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가 말을 한 것(민22:22-35)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흔히들 고양이를 두고 영물(靈物) 이라고 말을 하는데 고양이에게 영혼이 있다기보다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 말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은 영적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귀신은 사람에게만 들어 붙는다는 뜻이 된다. 사람만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 사단이 미혹하려 노리는 유일한 대상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마귀가 두루 다닌다고 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루’ 계신(遍在) 것과 같이 마귀도 ‘두루’ 다니고 있다. 그 마귀를 우는 사자로 묘사했다. 사자는 가장 힘 센 동물이다. 사자를 이길 동물은 하나도 없다. 그 사자가 울고 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울겠는가? 마귀가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든 들어 붙어서 마음대로 갖고 놀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 어떤 자를 찾아 다니는가? 바로 돼지 같은 자다.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 바쁜 사람이다. 오직 그것만 삶의 목표로 삼은 자다. 머리 속에 더럽고 추한 탐욕으로 가득 찬 자들이 마귀의 먹이감이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초월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된다. 물질은 스스로 생명을 갖지 못한다. 생명은 물질 속에 들어 갈 수 있다. 나아가 돼지 같은 생물 쪽에서 영혼을 수용하지 못하지만 영은 인간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물질은 영계로 들어갈 수 없지만 영은 물질계로 들어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물질인 육신은 썩어 이 땅에 남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영혼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저급한 존재가 고급스런 존재를 통제하지 못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이큐 두 자리는 세 자리에게 항상 당하게 마련이다.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인간이 아직도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 땅에 생겼는지 제대로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지성이 따로 있다는 증거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통제하지 못하는 현상과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육신과 지성, 감성, 의지도 자기 뜻 대로 절제하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 우리 삶을 우리의 뜻과는 다르게 조정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묘하고도 거대한 영적 파워가 있음을 어지간히 깨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귀신은 인정하면서 하나님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마귀에게 돈을 갖다 바치면서까지 절한다. 그것도 저는 돼지처럼 그저 먹고 마시고 자며 살 테니까 귀신님이여 제발 나에게만 붙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자청해서 사단의 종이 된다. 하나님에게 항복할 생각은 끝까지 꿈도 꾸지 않는다. 항복은커녕 인정도 하지 않으려 든다. 그 까닭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남한테 큰 잘못만 하지 않을 테니 내가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살아 생전에 하나님 앞으로 제 발로 찾아 오는 자가 없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회개할까 말까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이 더 좋은 이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초월적 존재다. 전지전능하셔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완전하신 분이다. 분자의 구조를 만들었고 그 구조에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었고  특별히 인간에게는 자기를 닮은 형상인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었다. 초월적인 영적 존재라야 어디든지 계실 수 있고 우리 마음 속까지 찾아 와 좌정할 수 있다.

기독교가 믿는 절대자의 호칭을 하느님으로 쓰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이 꼭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소적으로 초월, 편재, 내재 다 맞는데 ‘하느님’은 초월만 강조해서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부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이 하늘에만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조물주는 분명히 있는데 그 신이 만물을 창조한 후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일정한 운행 법칙만 부여 해 놓고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이 땅을 얼마든지 선하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 속에 태생적으로 숨겨져 있는 탐욕의 죄성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지진, 태풍, 기아, 질병, 온갖 재앙들을 볼 때에 그 뒤에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AIDS가 동성애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천벌이라고는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하느님이 하나님 보다 더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의도적으로 신은 제발 하늘에만 있고 이 땅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신이 가끔 간섭하는 일이 있지만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없으므로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기도하며 온갖 정성과 열심을 바칠 테니 제발 액땜만 하게 해 달라는 뜻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방해만 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신이 하늘에만 계시면 되지 이 땅에 무엇 하러 오느냐는 것이다. 신이 이 땅에 오면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신의 통제를 받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하는 마음이다.

교회 나오는 교인들마저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나, 큰 일이 생겨야 액땜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호칭할 지라도 그 사람이 믿는 신은 하느님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중립지대가 없는 이 땅

다시 본문을 자세히 보자.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이 절대자가 계시는 장소적 개념을 특별히 강조한 셈이 된다. 대신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하늘에만 계셔야 할 초월적 절대자가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내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초점이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하나님’의 의미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 곁에 항상 함께 계시는 아버지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 가장 독특한 존재다. 외형적으로는 물이 70% 이상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뿐 아니라 영혼이 함께 있다. 영계와 물질계 양 쪽 다 접촉하고 교신이 가능하다. 귀신이 인간에게만 들어 붙듯이 하나님의 영도 인간에게만 들어 올 수 있다. 인간 만이 하나님과 마귀의 영 둘 다 수용할 수 있다.

동물은 하나님께 기도하느라 철야 하는 법도 없지만 술 먹고 도박하느라 밤을 새우지도 않는다.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다.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두 자리 숫자 아이큐를 준 까닭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 정도 지능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보존하는 데 높은 지능이 구태여 필요치 않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밀알 씨앗에서 보듯이 생명 자체에 이미 신비하고도 영원한 자생적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생명만 보존해선 인간이랄 수 없다. 먹고 마시는 일만 하는 사람은 겉만 사람이지 사실은 돼지다. 하나님이 다른 동물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지정의를 주신 이유는 바로 영혼을 거룩하고 신령하게 보존하라는 뜻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과 마귀의 영을 둘 다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과 선택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더 고급하며 더 능력이 많은 하나님과 마귀의 영으로만 통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지성과 의지로 철야 기도하거나 밤샘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라야 철야 기도해도 피곤하지 않고 사단의 영이 사람으로 밤새 도박을 해도 지칠 줄 모르게 한다. 이것이 절대 미신적이거나 심한 얘기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 세계는 귀신이 들어오면 혼란이 생기는 돼지의 내면과는  다르다. 사단의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 지정의의 혼동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각으로 자기의 영이 사단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어지간해선 인식이 안 되고 평소에는 잘 모른다. 평생을 모르고 지나갈 수 있으며 실제로는 평생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결국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나 사단의 영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믿지도 않지만 마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의 중립 지역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는 영혼이 없다는 말과 같으며 아직 동물의 수준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 말은 인간 지정의의 영역 내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물질계 내에서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할 때만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진화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남보다 더 배우고 깨인 지성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절대 없다. 자기 혼자 생각일 뿐이다. 진화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아니라 원숭이가 자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숭이의 손자 노릇을 자청하면서 자기는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셈이다. 그 자랑은 이 땅의 인간 사회에서나 통용되지 영원한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는 진화를 믿고 또 이 세상이 전부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신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밝히거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 내리는 절차가 아니다. 이제 내 영이 하나님의 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이 내 영혼 속에 좌정해 계신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영과 사단의 영 둘 중에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이래 우리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다. 돼지처럼 살면서 사단의 영에 붙잡혀 있었던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이 보혈의 권세로 찾아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자, 하나님을 만군의 주로 모신 자, 하나님과 매일 기도로 교통 할 수 있는 자에게는 하늘에 계신 초월자가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계실 수 있다. 하루에도 수 십번씩 변덕과 불안과 짜증과 염려와 초조와 분노로 흔들렸던 우리의 여전히 더럽고 추한 심령 속에 까지 찾아 오실 수 있다. 신자의 영혼의 깊은 좌소(座所)에 와 계신 성령님이 더 이상 우리가 사단에게 붙잡혀 가거나 넘어지고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우리의 위로와 능력과 은혜가 되실 분은 거룩하고 완전하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를 지으신 사랑의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의 하나님, 지금도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 주실 능력의 하나님 그 분만이 기독교의 절대자이다.

기독교의 절대자는 단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난 하늘에 계신 어떤 신령한 존재로만 제한될 수는 절대 없다. 하느님(God in heaven)이 아니라 하나님(the One) 이다. 우리 삶의 모든 근거이자 유일한 능력의 원천이신 분으로 여러 신들과 같거나 비슷하지도 않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분이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신(the Best God)이 아니라 하나님(the Only God)일 뿐이다.

하나님은 절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이 죽고 난 후에 살아 생전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얼마나 많이 방문했는가 그 회수로 상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솔직히 우리 대부분이 평생에 그런 곳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 내 가진 것을 희생하며 사랑으로 섬길만한 위인도 못 된다. 우리의 그런 연약함과 비겁함 조차 아신다. 우리의 체질이 진토 같음을 우리를 지으신 분이 모를 리 있겠는가?

그런 불쌍한 우리를 두고 보실 수 없어 무한한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는 마귀로부터 보호해 주신다. 우리 속에 좌정하셔서 우리의 눈물과 한숨을 보고 들으신다. 세상과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뇌와 심지어 자신도 까닭 모르고 실체를 붙들 수 없는 염려와 불안 마저 미리 씻어 주시고 우리가 저지른 모든 허물과 과오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신다. 우리가 울 때 그 분은 더 슬퍼하시고 우리가 웃을 때 그 분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신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에게 우리의 전 존재, 삶, 인생을 완전히 맡겨 드립니다라는 뜻이다. 꼭 말로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아뢰거나, 심지어 그 뜻만 정확히 알고 하나님 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그 분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를 옥에서 건져 내시고 흑암에 처한 자를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

기독교가 믿는 절대자는 절대 하느님으로 제한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처음과 끝이 되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함께 사랑하는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한 분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알고 부르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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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영화 보다 애인과 헤어진 사연(마5:43-48) [4] 운영자 2003-07-08 2667
15 원수는 영원히 원수일 뿐이다. (마5:43,44) [2] 운영자 2003-07-08 2587
14 실컷데리고 놀다 제 자리에만 돌려 놓아라(마5:38-42) [3] 운영자 2003-07-08 2433
13 간디냐? 부시냐?(마5:38,39) [2] 운영자 2003-07-08 2349
12 헛갈리시는 하나님(마5:33-37) [1] 운영자 2003-06-27 2531
11 영원히 병신인 반 쪽 (마5:31-32) 운영자 2003-06-17 2541
10 변강쇠가 옹녀를 만나게 되면?(마5:27-30) [2] 운영자 2003-06-17 2805
9 주차장에서 쌍욕하며 싸우는 두 귀부인(마5:25-26) [1] 운영자 2003-06-17 2138
8 쪽집게 같은 예수님(마5:21-24) [4] 운영자 2003-06-17 2460
7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 (마5:18-20) [2] 운영자 2003-06-1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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