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신판(新版) 가롯 유다전(傳)(행1:15-19)

조회 수 2654 추천 수 75 2005.10.24 17:37:23
운영자 *.108.170.228
사도행전 강해 (4) - 행1:15-19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1:15-19)

예수님보다 앞서 나가는 제자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한 일은 두 가지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대기하고 있었던 일과 또 가롯 유다로 결원이 된 자리에 후임으로 제자 한 사람을 보충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자를 보충한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이 단순히 승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하시나 보자 하면서 성령의 강림만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자기들 공동체를 정비 하여 어떤 일을 시작할 것을 대비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구태여 유다의 자리를 보충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제는 온전히 믿고 그럴 준비를 한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은 성령을 기다리라, 그리고 성령을 받게 되면 증인으로 삼아 주겠다는 두 가지였다. 제자들도 그에 맞추어 두 가지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제자들은 그 약속의 순서를 뒤바꾼 셈이라는 것이다. 그들로선 성령의 강림이 어떤 모습으로 이뤄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고 또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주님의 첫번 약속이 미처 이뤄지기도 전에 이뤄진 후에 해야 할 일을 미리 한 것이다.

이는 순전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승리를 확신하여 살아 돌아 올 것에 대비하여 승리 보상금을 받아 살 집을 미리 자기 돈으로 사는 것과 같다. 이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처형 직전에 뿔뿔이 흩어지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비겁하고 연약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주님의 약속보다 한 발 먼저 내디딘 셈이다.

이런 극에서 극으로 변화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육신으로 부활하였고 또 영광스런 모습으로 승천하는 주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또 귀로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으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또 다시 베드로가 그 중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곧 시골 마을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뀌어 전세계의 역사를 다시 쓸 참이었다. 그가  유다의 결원을 보충할 일을 선도하면서 이전 동료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한마디로 유다가 비참하고 참혹하게 자살해 죽음으로써 구약의 예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설명 가운데도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은 드러났다.

지금 그는 유다 개인의 잘못에 중점을 두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즉 “유다란 놈이 처음부터 비겁하고 돈을 밝혔고 항상 미심쩍어서 내가 주님한테 조심하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듣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다. 그러니 이번에는 정말 순수하고 돈에 깨끗한 사람을 제대로 뽑아야 되지 않겠는가?” 식의 이야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물론 18 절에서 그의 배반을 두고 “불의의 삯”이라고 했지만, 그 삯으로 산 밭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실, 즉 시편 69편과 109편의 예언이 적중 되었음을 더 강조했다.

억울한 유다?

영국 런던에 가면 열 두 사도의 나무들이 있는 한 공원이 있다. 12개의 큰 나무들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을 부쳐놓았는데 가롯 유다의 나무도 있다. 그런데 다른 11개의 나무들은 정말 아름답고 무성하게 자라는데 이 나무만은 말라 비틀어져 잘 자라지 못하고 있다. 그 공원에 오는 사람들마다 그 나무 앞에 가서 유다의 이름을 저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다란 이름은 인류 역사상 저주 받은 죄인의 최고 대명사가 되어버렸고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최근 한국에선 고전소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유행이다. 예를 들어 춘향전이 열녀의 정절을 그린 소설로 통상 알고 있지만 사실은 기생 딸과 사또 아들의 연애사건이 주제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다 할만큼 반(半) 포르노적인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또 흥부전에서 비판 받아야 할 사람은 놀부가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한 흥부다라고 새로운 각도로 해석한다.

지금 베드로의 유다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그는 어차피 구약의 예언대로 - 자기의 운명대로 예수님을 팔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이 영원히 비겁한 죄인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자기의 궁극적 책임도 아닌 일에 괜스레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에 대한 신판(新版) 혹은 이설(異說) 유다전이 다시 쓰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로 뽑을 때부터  그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라(요6:64).” 또 마가3:13-19에 따르면 열 두 제자들을 세우고 전도 여행을 파송할 때에 모든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었고 그 속에 유다도 포함되었다.

나아가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세울 때에 기도하고 뽑으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를 파는 자가 될 가롯 유다라(눅6:12,13,16).” 그렇다면 엄격하게 유다 본인의 근본적 잘못은 없고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아시고도 뽑은 주님의 잘못이 아닌가? 미리 아셨다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뽑아 그가 인류 최고의 죄인이 되는 것을 막으셔야 되지 않는가?

악역으로 선택된 유다

이런 의심들이 생기는 것은 아직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 된 인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예를 들어 제자로 삼으신 열 두 명을 가르치고 깨우쳐서 죄를 안 짓게 해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의 죄를 대속하려 오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려 오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선 유다 같이 스승을 배반할 악역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만약 유다가 애초부터 배반할 마음이 없었거나 혹 중도에 회개하고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은 제2, 제3의 유다를 예비했었을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주님은 성경 말씀대로 정확하게 이루는 사람을 꼭 집어 선택했던 것이다. 혹 이름은 달랐을지 몰라도 유다는 그 시대에 그렇게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고 또 성경 예언대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혹시 밀고자(密告者)를 제자가 아니라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의 대적 중에 한 사람으로 세울 수도 있었지 않았겠느냐라는 순진한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것은 유다에 대한 인간적인 감성으로 포장된 값싼 동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당신의 제자가 밀고자가 되어야 했기에 예수님의 대적은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또 주님이 이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누가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분명히 밝혀 죄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단순히 인간적, 도덕적 견지에서 해석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이 간섭하신 일에 대해 아주 잘못 반응하는 것이 하나 있다. 이미 이뤄진 사실 안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다 용해되어 있다고는 어지간해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면 얼마든지 더 쉽고도 화끈하며 편안하게 끝낼 수 있었을 텐데도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했으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부터 한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가질 바른 태도는 그분이 이루신 일은 가장 최선이며 완벽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런 후에 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가, 그래서 그 뜻을 지금 나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더 좋은 길도 있었을 텐데라고 의심하는 것은 자신이 만약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런 생각이 가당치나 한 일인가?  

예컨대 “하나님이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유대인들을 전부 회개 시킬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만약 그때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꼭 안 죽으셔도 되지 않았는가? 그럼 유다 같은 억울한 자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왜 이 땅의 모든 악당들을 다 없애거나, 아니면 사람이 처음부터 죄를 절대로 짓지 않도록 만들어 주지 않았지?”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과 그 능력을 언제 어떻게 발휘하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간단하게 미국의 핵은 언제든 북한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에서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과 인간을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야 할 하나님에게는 더 그렇다.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할 계획 안에는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유다도 반드시 배반을 해야 했다. 이미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전혀 없고 한 치의 하자도 없는 방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은 십자가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달아서 선해지거나, 그 진홍 같은 죄가 쥐꼬리 같은 선행으로 씻어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다처럼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결과적으로 그는 로봇이었고 숙명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잘잘못의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운명을 어디까지 주관하시며 인간의 책임과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선이 궁금해진다. 이런 뜻에서 성경 기록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를 재평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다의 참 모습        

우선 무엇보다도 유다는 하나님을 믿고 찾는 열심에서는 가장 나았던 것 같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다는 뜻이다. 인격적으로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만큼 비열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제일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돈 궤를 맡은 자(요12:6)였는데 어느 조직이던 회계는 가장 세심하고 경우가 발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예수님말고는 제자들 중에 어느 누구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때에 누가 주를 배반할 것인지 요한이 주님께 물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요13:25,26,28)” 주님은 유다라고 확실한 힌트를 주었는데도 제자들은 그를 두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속으로는 분명 비겁한 면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주 신실하고 남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처세를 한 것이다.        

물론 유다에 대해 요한복음 12:6은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돈 욕심이 많은 자라는 뜻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돈만 밝힌 자라면 당시 유대 대제사장의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예수님을 노예의 몸값에 해당하는 단돈 은 삼십에 팔았다는 것은 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주님보다 천년 전 사람 삼손을 잡는 데 협력하는 조건으로 블레셋은 들릴라에게 은 일천일백을 주었지 않는가?(삿16장) 대신에 유다는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주님께 다 바르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고 가장 먼저 의분을 터뜨렸었다.  

유다의 잘못은 제일 똑똑하고 열심히 믿었지만 잘못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비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의 능력과 겉 모습만 보고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실현한 속에 드러난 뜻과 내용은 못 보았다. 예수님을 죽은 자도 살리시는 초자연적 능력의 소유자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주님의 참 실체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시려 그런 기적들을 일으키신 것이지 나사로 한 사람을 살리려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었다.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으로서 우리 허물을 위해 그 분이 찔림을 받고 우리 죄악을 위해 당신께서 상함을 받기 위해 오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고 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로 유다 같은 자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서신 것인데도 유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받아 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자살해 죽을 때까지 해결 못한 문제는 “로마의 포악한 지배자들이 죄인이지 어떻게 유대인들같이 억압 받고 율법대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죄인이란 말인가?”였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능력을 바로 저 죄악의 집단들을 쳐부수는데 쓰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아닌가라고 믿었다.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의(義)만 내세웠다. 자기가 다 판단하고 정죄까지 다 해놓고 하나님은 그냥 자기 시키는 대로 능력만 동원해서 뒷치닥거리 해달라는 것이다. 지금도 스스로 똑똑하고 의로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대 바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과 똑 같다.  

회개하지 않은 유다

그렇지만 주님은 유다에게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아무리 유다를 배반할 조역으로 미리 알고 택하셨다 하더라도 그를 미워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님은 인간 모두를 자비와 긍휼로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똑 같은 죄인으로 대하셨고 그 속에 3년간이나 동고동락했던 유다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러나 유다가 마지막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그랬기에 오히려  끝까지 그의 완악함에 마음 아파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3장의 기록에서만도 유다에게 세 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너희 중 나를 팔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와(21절), 떡 한 조각을 찍어 주었을 때와(26절),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을 때다(27절). 다른 자들이 아직 아무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으니까 그로선 얼마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자기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용서를 구할 기회는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지만 자기에게 떡을 찍어 주고 네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했을 때 틀림없이 속으로 찔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회개치 않고 제 갈 길로 간 것은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사단이 들어갔기 때문이다.(27절). 사단이 그를 귀신에 흘린 사람처럼 만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에게는 사단에게 빼앗긴 생각이 있었고 그런 생각과 의심을 사단이 더 격동시켰다는 뜻이다.

유다의 속에는 자기 스승을 원망하고 의심하고 불신하는 마음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왜 자꾸 죽어야 한다고 하는가? 물고기 다섯과 떡 두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겼고, 물 위를 걷고 폭풍우를 말 한마디로 잠재웠으며, 죽은 자도 살린 그 능력을 왜 한번 우리 민족을 살리는 의로운 일에는 발휘할 생각도 안 하는가? 이런 개죽음이 어디 있는가? 내가 이런 자를 왜 3년간을 미쳤다고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따라 다녔는가? 죽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죽도록 해 주겠다.”

흔히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 혹은 동전의 앞 뒤면과 같다고 말한다. 질투도 사랑하는 자가 하지 아무 좋아하는 감정이 없는 자는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기대가 큰 자는 나중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도 가장 커지는 법이다. 유다는 회계를 맡았고 다른 제자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똑똑했으니 주님에게 가장 큰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 기대가 무참하게 무너졌을 때의 실망과 배반감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또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마음 속에 만약 스승이 죽어 버리면 따라 다니던 모든 제자들도 잡혀가 죽임을 당하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도저히 돌아가는 싹수가 가망이 없어 보이니까 호신책(護身策)으로 제사장들과 한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님이 자꾸 죽겠다고 하니 아직은 3일 후에 부활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으니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가정이지만 “지금은 저렇게 죽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로마 군인들이 잡으러 오면 달라져 진짜로 큰 능력을 나타낼 것이야”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까? 오히려 자기 스승을 메시야로 완전히 내세우기 위해서 밀고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까?

밀고의 이유야 어쨌든 유다 개인으로는 밀고 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던 손해 볼 것은 하나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머리 좋은 사람이 모든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는 모습의 가장 표본적 행태이지 않는가?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주었지만 끝까지 배반한 이유는 그의 마음이 완악했다기보다는 자기로선 전혀 피해 볼 일이 안 생길 것이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은, 그래서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룰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것이다. 그 가운데 유다 자신의 구원도 포함되어 있는 데도 말이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인격적으로 가장 고상하고, 지성적으로 가장 똑똑하고,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인 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유다도 실패했듯이 누구라도 십자가 앞에는 겸손히 무릎 꿇는 길 외에는 인간이 취할 태도는 전무하다.  

우리 곁의 수도 없이 많은 유다

유다의 배반 사건에서 항상 그가 비겁하게 은30에 주님을 팔았다는 사실만 부각된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유다가 배반하던 안 하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유다가 은30에 판 것은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사단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 제사장의 하속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잘랐는데도 오히려 그것을 붙여서 고쳐주시고,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부를 권세도 쓰지 않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무엇보다도 유다가 배반할 자라는 것을 미리 알고 그를 제자로 택했지 않는가? 아니 배반할 자이기에 일부러 택하고 심지어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고 빨리 밀고하라고 까지 했지 않는가? 모든 되어진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주권 하에 진행되었지 단 한번도 유다의 주도권이 작용되어진 적은 없었다.

유다로선 그런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도 외면했다. 주님의 12제자에 속하는 영광스런 이름을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다. 대신에 역사상 가장 더럽고 비열한 이름을 은 30을 주고 샀다.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죽는 스승보다는 자기의 판단이 더 옳다고 생각했겠지만 자기 꾀, 아니 자기 죄악에 자기가 넘어간 것이다.

그는 자기의 갈 길을 자기 스스로 찾아 갔다. 아무리 하나님이 택한 조연 배우지만 주님은 그의 감정, 지성, 의지, 영혼을 절대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셨다. 그를 겁 주거나 로봇처럼 만들어 억지로 싫다는 것을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그가 배반하는 조역으로 선택되었지만 그는 자기의 죄로 비참한 결과를 맞은 것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바벨론을 들어 징계했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고 걸렸고 네가 나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만난바 되어 잡혔도다.”(렘50:24) 마치 유다가 밀고자의 악역을 주님이 맡겨 놓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유다 본인이 주님과 다투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않아 사단에게 잡혀간 것이다.  

역사상 유다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두 번 다시 유다란 이름의 배신자는 없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구원을 단 한번으로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유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까? 역사적인 유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12제자중의 하나였던 유다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겠지만 우리 주위에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수도 없이 많은 유다가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자신이 바로 유다일 수 있다. 하나님을 자기의 욕심과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능력만 빌려 주시는 분으로 기대하는 자, 주님이 수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외면하고 자기의 죄를 돌아 보고 회개하지않는 자, 또 예수 믿는 자가 삶 속에서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해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자 등등 얼마든지 많이 있다.

언젠가 여행 길에 라스베가스에서 하루 밤 묵은 적이 있었다. 한국식당이 있어서 반가워서 들어갔는데 더 반갑게도 벽에 많은 성구(聖句) 액자들을 걸어 놓았다. 그래서 제 속으로 역시 믿는 자는 하나님이 믿는 자의 식당으로 인도하시는가 보다 감사하며 음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쪽 저쪽에 술을 팔고 있었다. 물론 백번 양보하여 식당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식탁이나 바닥들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음식도 너무 맛이 없었다.

한국의 고속버스 정류장이나 기차역 앞에 있는 식당들은 단골 손님보다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여행객들만 주로 상대하니까 성의가 없고 맛이 없다. 추측컨대 그와 마찬가지로 관광 도시라 한번 오고 말 손님들이라는 배짱으로 장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 좋은데 제발 저 성구로 도배한 액자는 좀 떼고 영업하면 안되나 싶어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신자들을 도매금으로 욕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배반해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유다는 겨우 은 삼십을 받았고 주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돈을 돌려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 날 신자라고 버젓이 자랑하는 자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겉으로 주님을 얼마나 내세우며 또 주님을 찾는 유일한 이유가 자기 욕심을 이루고 세상에서 형통하려는 것 아닌가? 과연 이천년 전의 유다와 지금의 수도 없이 많은 유다와 누가 죄질이 더 나쁜가? 누가 역사상 최고 저주 받을 자이며 런던 공원의 죽어 가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세 종류의 신자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세 종류로 평가한다. “예수 믿는 분들은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시네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똑같네.” “예수 믿는 것들이 더해.” 그들이 우리를 부르는 호칭과 어법에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세상 사람이 존경 하는 자에게는 경어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들에게는 상용 어법을, 더 못한 자에게는 비속어를 사용한다.

유다만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다. 지금 “똑 같네” 혹은 “더해”라고 평가 받는 신자들 모두가 주님을 세상과 불신자와 사단에게 팔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유다다. 곳곳에서 교회와 교회가 서로 싸우고 신자와 신자끼리 분란이 있다. 세상에서 우리더러 뭐라고 하는가? “예수 믿는 것들이 더 난리 쳐” 아닌가?

교회의 창립 포스터를 이곳 한국마켓에 부치러 갔다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교회마다 어른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니까 드디어 젊은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차리는 구만. 잘 하는 일이야.” 이 말씀이 당장 듣기 좋은 칭찬일지 몰라도 사실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말이다. 그 만큼 우리가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이제 더 무서운 눈으로 우리를 주시할 것이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하나하면서 기대 반 질시 반으로 조그만 흠이라도 예리하게 지적해 낼 것이다. 정말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조만간 이 학생교회도 일반교회랑 똑 같네, 아니 더하네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현대는 더 이상 말로 전하는 것이 전도의 주된 방법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시오. 천국이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영생을 주십니다”라고 외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왜 그런가? 오직 한가지 이유, 우리가 저들과 똑 같거나 더하기 때문이다. “너나 거룩하고 잘 믿고 천당 가라. 당신들 가는 천당이라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나 가겠다”가 되어버렸다.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저들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우리의 메시지는 이미 힘이 없어졌고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이제 전도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저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 저 사람을 보면 예수님이 있는 것 같아, 저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킨 예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고 싶어. 그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라고 궁금해 할만큼 우리의 실제의 삶 자체가 거룩하게 변화되는 길 뿐이다.

나를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이 땅에서 오직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또 그러기 위해선 베드로처럼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성령으로 변화를 입어 예수님보다 앞서 나가는 길 뿐이다.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모든 신자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일꾼으로 이땅에 부름 받았다. 세상은 의인 열명도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뀐 지 오래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정말 의인 열명만 있어도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착한 행실을 이 땅에 보일 사람이 단 몇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 당신의 큰 일을 이룬다.

만약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도 순식간에 같거나 더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또 이미 그런 말들을 들었을 때는 후회하고 회개한들 늦다. 이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기도가 될 수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유다의 자리에 서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정말 매일 매일을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고 예수 믿는 자란 이름을 잘못 팔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모든 신자와 교회들이 유다의 자리에만 서있지 않다면 영적인 부흥은 저절로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적인 목표는 오직 하나다. “예수 믿는 분들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10/24/2005

날마다순종

2020.10.27 15:08:49
*.14.99.253

신판 가롯 유다전 흥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때때로 제 자신이 유다임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들어 주님앞에 나아가 회개합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것이 또 다시 반복 될때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그 은혜가 사무치게 감사하고 갈수록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유다와 다른점은 그는 뉘우쳤으나 자살을 택하여 스스로 죄값을 치르려는 교만을 낳았고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차라리 제게 좋을 뻔 하였다"라며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던 주님의 말씀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우리 신자는 언제든 주님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용서 받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끝내는 주님 닮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주위에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은빛곰

2020.12.11 03:26:02
*.134.249.82

귀한 말씀을 읽고 감사를 드립니다 제 모습이 유다와 같군요
자기 의를 붙잡고 자만에 빠져 자기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모습이 유다보다 더 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인중에 유다의 모습에서 자기를 보는 분들이 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만큼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지하고 세속적인 육신대로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많아 보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행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master

2020.12.11 03:44:46
*.115.239.75

은빛곰님 홈페이지에서 뵙게 되니 더 반갑고 감사합니다. 샬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6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민13:25-33) [3] 운영자 2005-11-04 17272
105 제비 뽑기는 미신적인가?(행1:20-26) [1] 운영자 2005-11-02 2706
» 신판(新版) 가롯 유다전(傳)(행1:15-19) [3] 운영자 2005-10-24 2654
103 하늘에서 카운트 다운 하시는 삼위 하나님(행1:12-14) [4] 운영자 2005-05-06 1998
102 갈릴리 촌놈들아!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볼 것인가?(행1:9-11) [2] 운영자 2005-04-04 1852
101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행1:8) [6] 운영자 2005-03-23 4050
100 인류 역사상 오직 두번 뿐인 사건(롬12:1,2) [2] 운영자 2005-03-14 2328
99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 –신자(마5:1-3) [1] 운영자 2005-03-03 2931
98 모로 가면 서울 못 간다 (마12:28-30) [3] 운영자 2005-02-22 2001
97 왜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가?(마12:22-27) [1] 운영자 2005-02-15 2369
96 고난을 이겨내는 유일한 비결 (마12;14-21) [2] 운영자 2005-02-08 1958
95 탁구공을 되 넘긴 예수님 (마12;9-13) [1] 운영자 2005-02-01 1960
94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도 되나요? (마12:1-8) [1] 운영자 2005-01-25 6531
93 마음의 쉼을 얻는 세 가지 길 (마11:28-30) [2] 운영자 2005-01-18 2694
92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이 없으셨던 진짜 이유(마11:28-30) [1] 운영자 2005-01-11 1994
91 벤허가 골고다 언덕으로 간 까닭은? (마11:28-30) [3] 운영자 2005-01-04 2951
90 빠삐용이 탈출한 진짜 이유(엡5:16,17) [1] 운영자 2005-01-03 1734
89 기 안 죽이고 아이를 키우려면? (엡6:4) [1] 운영자 2004-12-28 1798
88 기생집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인생들(요15:1-5) [2] 운영자 2004-12-21 1850
87 한국인의 세가지 종교적 유전인자 (마11:25-27) [1] 운영자 2004-12-14 1853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