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한국인의 세가지 종교적 유전인자 (마11:25-27)

조회 수 1847 추천 수 111 2004.12.14 03:46:27
마태복음 강해 (130) 12/12/2004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기독교와 가장 적대적인 종교

예수님의 생애는 시작부터 끝까지 초자연적 이적이 따랐다. 본인부터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또 남들에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문둥병자나 소경을 고치셨고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 그러다 보니 소위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에게 전도해 보면 도대체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고 신자를 오히려 측은하게 바라본다. 복음이 전혀 씨도 안 먹히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복음이 숨겨져 있다고 말씀 하신 것이 마치 그런 현상을 지적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일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서 지혜와 슬기는 아이큐가 높고 학식이 풍부한 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실제로 신자 가운데도 얼마든지 의사나 교수들도 많다. 또 똑똑한 사람들에게 전도해도 무조건 배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들도 예수를 믿는 것 보면 뭔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들도 많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실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나아가 신령한 문제에 있어선 절대 천재가 따로 없다. 성경에서 가장 유식했던 자는 아마 모세일 것이다. 나이 80의 인생으로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시점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으로부터 그저 도망가려 했다. 또 무식한 자의 대표는 누구인가? 갈릴리 시골의 어부 베드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대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 믿는 것처럼 설쳐대다 스승을 세 번이나 그것도 미리 그렇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고도 저주까지 하며 배반했지 않은가?

아담의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완전 까막눈이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신 말씀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셔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

한국인의 피에는 종교적으로 보아 크게 세가지 유전인자가 수백 년에서 수천 년까지 흘러 내려 오고 있다. 셋 다 일반적인 신심 내지는 종교심이란 관점에서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내용은 기독교와 상충되는 점이 너무 많고 사람들로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가 된다. 그 셋은 샤머니즘과 유교와 불교다. 그런데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기독교 신앙에 가장 큰 장애가 될 것 같은가? 다른 말로 하자면 기독교와 가장 반대 편의 입장에 있는 종교는 무엇이겠는가?

첫째로 미신은 아니다. 미신을 믿는 자는 오히려 전도하기 쉽다. 초월적 도움을 바라며 항상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있는데다 기독교가 초자연적 역사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쉽게 믿는다. 흔히 말하듯이 예수 신이 최고로 센 신이라고 인정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십자가 복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선 별반 관심이 없다. 예수 믿어 천국 간다니 좋고 기도해서 복 받으니 더 좋다. 미신을 믿었을 때와 똑 같은 심정으로 치성과 열심으로 예수를 믿는다. 어쨌든 어려운 문제를 두고 열심히 기도한다는 면에선 사줄 만 하다.

유교도 제사 문제가 걸림돌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숙한 시민이 되고 사람끼리 서로 돕고 섬기라고 가르친다는 면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다. 문제는 오히려 불교다. 한국인은 말이 앞서는 것 같고 큰소리로 울고불고 기도하며 박수치고 찬양하는 기독교를 기질적으로 싫어 한다. 반면에 조용히 혼자서 참선하는 불교가 훨씬 고상해 보인다. 정작 문제는 그런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불교의 교리가 기독교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혜로운 자라고 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불교식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지혜로운 자란?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혜를 어린아이와 비유해서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어린아이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란 어른이 갖고 있다는 뜻이 되므로 슬기 있는 자는 바로 어른을 가리키는 셈이다.  

그런데 아이가 어른보다 아이큐가 모자라는 것은 아니다. 달걀에는 닭이 될 모든 조건과 근본 요소를 다 갖추었듯이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다. 공부 많이 한다고 두 자리 아이큐가 세 자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보다 못한 것은 세상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정보와 이론 즉 지식(knowledge)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wisdom)는 지식과도 다르다. 지혜란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을 선천적으로 받은 지적 능력을 사용해 실제 자신의 삶에서 해석하고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아이의 경우 갖고 있는 지식의 양이 어른보다 적다. 그러나 지식은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날이 갈수록 늘어나게 된다. 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자기가 습득한 지식을 활용할 능력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인생을 꾸려나갈 재간이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란 그 반대를 의미한다. 자기 주장이나 사고체계가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는 자다. 누가 뭐래도 자기 방식을 고집하며 사는 자다. 특별히 본문에서의 의미는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자를 말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도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믿는 자다. 나아가 모든 종교는 동일하니까 사람이 선택할 수 있고 자기가 택한 종교를 신실하게 잘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갖춘 자다.  

불교에서도 극락과 부처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하나님과 비슷한 개념을 가르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깨우침을 얻으면 극락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들의 용어로 열반의 단계에 들어서면 심지어 인간도 살아 있는 부처, 생불(生佛) 즉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 속에 하나님과 천국이 있다. 엄연한 제 3의 실체로서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 등 그 사상체계를 그림으로 치면 원이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와 사물은 결국 돌고 돌아 서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점을 잘라 낸 한 특정한 상황과 사건 속에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가 공존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공존(共存)이란 좋은 면과 나쁜 면이 한 장소 한 시점에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는 뜻이다. 즉 한 가지 현상을 두고도 사람이 마음 먹기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는 서로 통할 수 있기에 궁극적으로 선과 악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귀신의 왕(?) 예수
  
프란시스 쉐퍼라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가 있었다. 그 분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기숙사를 방문해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기독교 복음에 관해 토론을 가졌다. 그런데 그 중에 유독 힌두교와 불교 배경을 가진 인도 학생이 기독교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 주장을 펼쳤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상체계는 그림으로 치면 직선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선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가 직선의 끝에서 서로 대칭으로 마주 보고 있으며 영원토록 절대 서로 만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절대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하심이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죄악과 교만에 물든 전적 부패성은 서쪽 끝에 위치한다. 양극단에서 서로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려면 하나님 쪽에서 먼저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시며 화해를 선언하신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를 던지시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간은 서쪽 끝에서 영원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인도 학생으로선 극과 극은 통하며 결국 원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선과 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으니 반발할 수 밖에 없다. 쉐퍼 박사가 “그럼 자네 생각에는 야만성과 비야만성에 차이가 없다고 믿느냐?”라고 반문했다. 말하자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존재로서 인간만이 가지는 고귀한 가치성과 목적성이 따로 없고 다른 짐승과 같은 동물적 본성만 가졌느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인 선과 악, 또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구별이 없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학생의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토론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아프리카 유학생이 차를 마시려고 끓이고 있던 주전자 물을 그 인도 학생의 머리 위에 쏟아 부어버렸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당한 인도 학생이 화를 벌컥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자네가 야만성과 비야만성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네는 절대적 선과 악이 따로 없다 하지 않았느냐? 모든 것이 인간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며? 그럼 이 행동도 네가 선하게 해석하면 될 것 아니냐?”라는 뜻이었다.

인도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가 사라져버렸다. 불교식 사고체계에선 하나님은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자기가 생각하고 마음 먹기에 따라 이런 하나님 저런 하나님을 얼마든지 만들어 낸다. 기독교에선 그렇지 않다. 그분은 실제로 인간의 삶 속에서 그것도 주전자 물을 쏟아 붓는 그런 아주 작은 일 가운데도 반드시 절대자의 위격으로 함께 실재(實在)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시종일관 당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이 자기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메시야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겠다고 덤빈 것이다. 하나님도 자기 마음 먹은 대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귀신 들린 벙어리를 고쳐주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 내었다고 했다.(마9:34) 말하자면 초월적인 능력은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미신을 따르던 자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 신의 능력이 가장 센 것 같다고 하는 말과 내용적으로 똑 같은 말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기독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110살도 훨씬 넘어 인생을 마감하는 단계에서 어떤 요구를 하셨는가? 외아들 이삭을 당신께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백 살에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을 희생제물로 죽이려는 순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하시며 중지시켰다. 대신에 어린 양의 제물을 따로 미리 준비시켜 놓았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아브라함은 인생의 전반부를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지냈다. 특별히 불의 신에게 자식을 바치면서까지 열심과 치성을 드리면 그 신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사고체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았던 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피 속에 남아 있는 샤머니즘의 유전인자가 과연 완전히 없어졌는가 아직 남아 있는가 테스트 해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가 절대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분인가를 믿는가 아니면 뭔가 바쳐서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를 보고자 하신 것이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동일하게 아들을 바치는 모습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시면서 단 하나의 축복도 약속하지 않았고 아브라함도 기대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과 그 자녀간의 절대적 관계만이 있었다.  

종교끼리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천국이 사람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상천하지에 절대자는 창조주 여호와 한 분뿐이다.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선은 오직 그 분께로부터 뿐임을 기독교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시려 했던 것이다. 기독교 믿음의 정의를 당신께서 스스로 내리시고 선포하신 후에 그 믿음의 후손이 되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다시는 그런 사고 체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본문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오케이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지라니까 진짜 어린아이가 되어서 “하나님은 이것도 하실 수 있고 저것도 하실 수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것도 저것도 안 해줍니까?” 투정하고 의심하는 단계로 넘어가버린다. 신자는 바로 이 부분에서 어린아이에서 지혜로운 자로 변모 된다. 절대적 하나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지혜있는 자와 대비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비유로 등장시켰다. 따라서 신자는 일차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한국인의 경우 체질화된 불교식 사고 방식을 자기 피에서 예수님의 피로 완전히 씻어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요 인간이 품는 마음에 따라 그 분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실체로 분명히 존재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이 때가 차매 실제로 인간 역사의 현장 안으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고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이셨다. 그리고 그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길 외에는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셨다.      

똑똑하다는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반발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며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들의 항변이 맞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이 완전하게 맞는 말이다. 인간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면 그 정도 일쯤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하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느냐 아니냐를 따지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든지 아니면 완전히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이라고 비난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아니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지금 불신자와 불교 신자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나에게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주었는가 아닌가만 따져서 자기 기분대로 그 신앙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로서 세상과 사람 앞에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선포하고 있는가? 아니 선포까지 못해도 스스로 자기에게 물어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는 인간의 야만성이 절대 고쳐질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똑똑한 사람 앞에서도 말과 삶으로 당당하게 증거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전존재가 십자가 복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며 줄기가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고 있는가? 불신자를 보면 그 영혼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는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전적으로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고 있는가? 현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불신자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고체계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세상 풍조와는 정 반대의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으로 자기 일생을 계획하고 있는가?

신자는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확신하고 그 안에서 살 때는  현실 속에 그 분의 거룩하심, 온전하심, 신실하심, 영원하심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 그렇게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왜 신앙 생활이 메마르고 고달픈가?

그럼에도 신자의 신앙 생활이 메마르고 고달픈 이유는 무엇인가? 자꾸 어린아이가 아닌 지혜로운 믿음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요즘은 서너 살로 내렸지만 ‘미운 일곱 살’이라는 속담처럼 그 나이 때부터는 자기 자식이라도 싫어지기 시작한다. 고분고분 엄마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때다.

아이가 잔디 밭에서 물장난 하고 놀아보니까 아주 신나고 재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잔디밭에서 물장난하는 것이 신나는 일이구나 하는 지식을 하나 습득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심심할 때 “아! 잔디밭에 나가 물장난하면 재미있겠구나”하고 나가서 그렇게 놀려고 한다. 지식을 실제로 자기 삶에 활용하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자기 생활을 계획해 꾸려 나가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일일이 못하게 한다. 옷이 다 젖고 혹시 감기에 걸릴까 염려해서다. 그러나 아이로선 엄마의 그런 배려까지는 상상도 못한다. 왜 이런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못하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모든 일을 자기 지혜로만 판단했고 엄마를 자기 생각 안에 가두었다. 바로 이 때가 미운 일곱 살이며 아이와 엄마 사이는 그 때부터 편할 날이 없이 그저 밀고 당기는 싸움이 지속된다.

신자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 수준이다.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자꾸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여 그분의 사랑, 권능, 공의, 자비, 은혜를 삭감하고 제한한다. 그러나 한 여름 찌는듯한 더위가 닥치면 엄마가 먼저 프라스틱 풀 장에 물을 가득채우고 온갖 물놀이 기구를 줘서 놀게 한다는 것은 알 길이 없다. 물놀이하면 신나는데 하는 겨우 한 가지만 알아 한 겨울에도 그저 물놀이만 하겠다는 식의 신앙 생활을 하는데 그런 요구를 하나님이 들어 주실 리가 없지 않는가? 신앙 생활이 괴롭지 않을 리가 없다.        

신자의 삶이 괴로운 것이 기도 적게 하고 말씀 보지 않고 봉사에 태만해 하나님이 벌을 주어서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물놀이 하겠다고 덤비는 신자야 말로 오히려 그 소원을 계속해서 이루고자 얼마나 많이 기도할 것이며 그 일에 연관된 성경 구절도 더 열심히 찾아 보지 않겠는가?

신자란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베푸신 은혜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적 진리 임을 믿고 실제 삶에 적용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해 나머지 모든 인간적 세상적 지식은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그것들이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용한 도구는 된다. 마치 밥을 먹는데 숟가락 젓가락이 반드시 필요하고 효용 가치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육신을 실제로 살 찌우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음식물 속에 든 온갖 영양소다. 정작  밥은 먹지 않고 자꾸 그릇과 식탁을 좋은 것으로 꾸미려 드는 식의 신앙 생활을 해선 하나님이 일부러라도 채워주지 않으신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님을 당신께서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서 하나님을 해방시켜라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로서 신자의 삶의 모든 부분에 실제로 살아 역사하신다. 전지전능하신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된다. 우주만물의 궁극적 원천이자 주인 되시는 그 분과 인격과 인격으로 참 사랑과 완전한 신뢰의 관계를 가져야 하고 인생의 매 순간순간을 함께 동행하며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가 살아가는 동안 뿐 아니라 영원토록 허락해 놓으신 은혜에서 신자가 벗어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은혜가 현실에서 구체화 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 또 각 사람에게도 환경과 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병을 낫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사업이 형통하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 속에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폭포수처럼 깨닫게 해주신다. 또 자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데 주위 사람이 변화되는 모습으로 은혜를 주시기도 한다. 간혹 평생을 남을 위해 희생하며 고생만 하다가 죽게 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사업이 부도나고 가정이 깨어지며 암에 걸려 죽게도 하신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가 되었던 그 분은 절대자이자 완전한 진리요 영원한 선이다. 그 모든 경우에 당신의 신자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법이란 없다. 문제는 신자가 그것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고 찾아 내어 누리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맛보기를 원하고 그 은혜로 자기 인생에 채우기를 갈망하면 반드시 당신의 당신 되심을 보여주시고 알게 해주신다. 신자가 360도 어떤 방향과 각도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선명하게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가 그 삶에 충만하게 비춰진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땅 끝 다시스로 도망 갔고 거기서조차 바다 밑으로 뛰어 들었지만 큰 고기 배 속까지 그 분은 이미 와 계셨지 않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 생명과 바꿔서라도 하나님만을 경배했더니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도 살려 주었지 않는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을 거역한 그 세 사람을 결박해 용광로 속에 집어 넣고 보았더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3:25)라고 놀랬지 않는가?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때에도 그 불속에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신자로 풀무 불 속을 통과하게는 하시지만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믿음이란 신자가 자신의 현실의 삶 속에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얼마나 많이 드러나게 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제발 인간의 한 줌도 안 되는 지식과 참으로 알량한 지혜를 동원해 그 분의 권능과 사랑을 제한 시키지 말라. 신자가 정작 싸워야 할 믿음의 싸움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해방시켜 드리느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분이 우리의 이 좁은 소갈머리 속에 갇히어 있다면 얼마나 갑갑해 하시겠는가?          

모세가 갖고 다니던 다 찌들은 지팡이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자 80이 넘은 노인이 군대와 무기 하나 없이 세계 최고 강대국을 혼자서 상대해 승리하지 않았는가? 그 무식하던 베드로도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자 한 자리에서 삼천 명을 회심 시키는 설교를 하지 않았던가? 오늘 날 우리도 그 보다 더 크고 신비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무나 엄청나신 절대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 분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요 먼 장래가 아닌 바로 지금 바로 곁에 여러분의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이다.

사라의 웃음

2011.10.03 11: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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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피 속에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유전인자가 완전 사라졌는가를 테스트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피 속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 바꾸어 주시려
애태우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 착각하며 이해하려하는 어리석음
을, 하나님에게 나를 이해시키려 하는 어리석음을 매일 매순간 봅니다.
내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는 그일을 위해 또 애를 쓰시는 하나님앞에
어리석은 저는 예수님의 보혈을 뒤집어 쓰고 무릎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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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민13:25-33) [3] 운영자 2005-11-04 17258
105 제비 뽑기는 미신적인가?(행1:20-26) [1] 운영자 2005-11-02 2697
104 신판(新版) 가롯 유다전(傳)(행1:15-19) [3] 운영자 2005-10-24 2622
103 하늘에서 카운트 다운 하시는 삼위 하나님(행1:12-14) [4] 운영자 2005-05-06 1989
102 갈릴리 촌놈들아!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볼 것인가?(행1:9-11) [2] 운영자 2005-04-04 1846
101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행1:8) [6] 운영자 2005-03-23 4026
100 인류 역사상 오직 두번 뿐인 사건(롬12:1,2) [2] 운영자 2005-03-14 2321
99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 –신자(마5:1-3) [1] 운영자 2005-03-03 2924
98 모로 가면 서울 못 간다 (마12:28-30) [3] 운영자 2005-02-22 1998
97 왜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가?(마12:22-27) [1] 운영자 2005-02-15 2362
96 고난을 이겨내는 유일한 비결 (마12;14-21) [2] 운영자 2005-02-08 1952
95 탁구공을 되 넘긴 예수님 (마12;9-13) [1] 운영자 2005-02-01 1955
94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도 되나요? (마12:1-8) [1] 운영자 2005-01-25 6525
93 마음의 쉼을 얻는 세 가지 길 (마11:28-30) [2] 운영자 2005-01-18 2689
92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이 없으셨던 진짜 이유(마11:28-30) [1] 운영자 2005-01-11 1987
91 벤허가 골고다 언덕으로 간 까닭은? (마11:28-30) [3] 운영자 2005-01-04 2938
90 빠삐용이 탈출한 진짜 이유(엡5:16,17) [1] 운영자 2005-01-03 1728
89 기 안 죽이고 아이를 키우려면? (엡6:4) [1] 운영자 2004-12-28 1792
88 기생집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인생들(요15:1-5) [2] 운영자 2004-12-21 1845
» 한국인의 세가지 종교적 유전인자 (마11:25-27) [1] 운영자 2004-12-1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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