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유일한 비결 (마12;14-21)

조회 수 1953 추천 수 94 2005.02.08 03:10:21

마태복음 강해 (136) 2/6/2005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도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미야모도 무사시가 유일하게 패배한 이유

일본의 전설적 사무라이인 미야모도 무사시에 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검술 강호를 찾아 전국을 떠돌며 시합했는데 평생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다 이겼습니다. 유일하게 패배했던 상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약하고 힘 없는 한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젊은 무사시가 힘으로 강하게 부딪혀갈수록 슬슬 피하기만 했는데도 힘과 스피드에서 월등했던 무사시가 뚫고 들어갈만한 빈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대에게서 느끼는 중압감으로 완전히 압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패배 후로 그는 힘세고 강한 것이 절대 부드러운 것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죽일꼬 논의하는 것을 아시고 떠나가십니다. 겁에 질려 도망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최초의 선교 여행으로 떠나 보낼 때에 뱀같이 지혜롭고 핍박을 만나거든 다른 동네로 피하라고 가르친(마10:16,23) 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도망간 것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좇아 온 많은 사람을 한 명도 물리치지 않고 저희 병을 다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누구에게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숨어 지내기위해 비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천국의 영광스런 형체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한 세 제자에게도 똑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막9:9)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저자 마태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것에 따르면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만”(20절) 비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구원 사역을 방해 받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확실한 계획을 갖고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아시고 당신이 정해 놓은 정확한 스케쥴 대로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은 세상의 어떠한 조롱, 멸시, 핍박, 방해, 위험에 전혀 영향 받지 않았습니다. 두려워서 잠적하거나 계획을 수정하고 포기한 적이 없으며 하시고자 한 일을 하나 차질 없이 다 이루셨습니다. 누구를 만나건 어떤 상황에 처하든 당황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핍박이 강해질수록 주님의 온유함도 같이 늘어나 어떤 면에선 어려움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여유 있게 이겨내셨습니다. 갈수록 핍박하는 자들이 더 신경질을 부리고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줄 터이니

예수님이 그 숱한 핍박에도 아무 꿀림 없이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라서 그렇습니까? 그런 판에 박힌 대답으로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메시야 하나님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고 모든 일에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히4:13) 지정의적 능력에 있어서 우리보다 수십 배 뛰어난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아이큐가 겨우 세 자리인데  반해 그분은 수만이 넘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 자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비결은 본문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적 육신적 능력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했던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은 신자도 성령이 내주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위험, 환난, 고통, 상처를 겪더라도 예수님처럼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신자더러 물 위를 걷거나 죽은 자를 살려내는 능력을 보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계속 겪는 고초와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받게 되는 핍박은 충분히 이겨내야 하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 세상과 사람은커녕 자기 자신마저 제대로 절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성령이 안 계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은 반드시 초월적 신비적으로 역사한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손을 얹고 안수하면 병이 척척 낫고, 찬양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기도를 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회개를 몇 시간이나 하고, 말씀을 보면 기쁨과 평강이 넘쳐야만 성령이 간섭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이뤄내고자 하는 사역은 오직 한가지 모습 뿐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신자더러 예수를 믿게 하고 자신의 삶과 일생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당장 우리에게 또 다른 의심이 생깁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었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했고 열심히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로 간구하고 있으며 때때로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합니다. 심지어 기도하면 병이 낫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 생활에 가장 큰 불만이자 문제는 왜 현실의 환난과 고통에 좀더 담대해지지 못하느냐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층 구조를 이룬 두 마음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신앙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말하자면 복음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자꾸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게 되자 저에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첫째 저라는 존재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최고로 치사하고 비겁하며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에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제가 제 자신을 바라 보아도 너무나 더럽고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이전에 저런 사람보다는 내가 더 우월하고 선하다고 자부하고 우습게 여기고 깔고 뭉갰던 사람들에 비해 하나 나을 것이 없고 더 모자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일은 나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심한 상처와 슬픔과 고통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을까 알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기억지도 못한 일이었는데도 도저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세밀하게  모든 일의 전후사정을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제가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측면으로 그 사건들을 다시 보게 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윤리적인 회개를 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제 삼자가 내 속에 들어와서 제 영혼의 고물창고에서 오랫동안 썩어 가고 있던 쓰레기와 폐물들을 마구 끄집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제 스스로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간 죄들이 연속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보혈로 제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작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 때까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난 척, 똑똑한 척, 선한 척, 능력 있는 척했던 것이 얼마나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교만이었던 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만은 실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속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하며 두렵고 허망하고 갈급했던 것을 괜히 안 그런 척 감춰보려는 애처로운 발버둥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까지 제 속으로도 저는 가장 똑똑하고 거룩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그 속에 또 다른 마음이 있어 이층구조를 이룬 두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저를 생각할 때는 꽤 괜찮은 사람 중에 속했지만 제 마음 속에 어떤 다른 힘이 들어와서 제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제 마음을 그때까지 완전히 뒤덮고 있던 두꺼운 뚜껑을 열어 제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실체, 완전한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지렁이보다 못한 구더기가 그저 꿈틀거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제가 얼마나 까불었을까,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을까, 그분이 저를 봤을 때 얼마나 가소롭고 기가 찼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너무나 아찔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렇게 제가 천하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하고 반발했던 그 생각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쪽 같이 사라지고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예수님이 구세주임에 대해 단 한치의 의심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산상 기도를 몇 시간이나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 바로 곁에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성령으로 제 마음의 심층 구조가 이미 깨끗하게 청소되었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같은 죄인도 주님은 사랑하셔서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저야 말로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였는데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새 생명을 불어 넣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저의 모든 죄악, 상처, 분노, 슬픔, 갈급함, 연약함, 그 모든 것들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저 대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았던 것이 정말 단 한줌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이 없이 헛되고 헛되게 허비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라는 고백이 누가 시키지 않은데도 절로 나왔습니다.    

제 같은 경우는 단 순간에 이뤄지는 극적인 회심은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처음 교회에 출석하여 거의 육개월을 울며 다녔습니다. 모든 설교 말씀이 하나님이 직접 저의 영혼에 대고 찌르는 말씀이자 주님의 피로 저의 전존재를 씻어내시는 작업이었습니다. 성령님이 몇 달에 걸쳐서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저라는 전인격체를 통째로 바꾸어 가시는 연속적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땅바닥에 널린 구슬들을 하나하나 꿰어 나가 사슬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지나고 나면 그 모든 생각들이 앞뒤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통일성을 이루며 엮어졌습니다. 그 동안 갖고 있던 인생과 우주와 세상에 대한 갈등과 의심이, 제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갈급함과 허망함이, 현실에서 짓고 있는 죄악들과 또 겪고 있는 환난과 문제와 고통과 상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진리 안에서 씻은듯이 단 번에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자매님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나누려고 찾아 왔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건성으로 다녔지만 주님을 일대일로 만난 적이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최근에 기도원에 올라가 성령 체험을 한 후에 완전히 인생이 뒤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고달픈 현실에 찌들려 항상 상이 눌려 있고 뭔가 불만에 가득찬 얼굴이었는데 너무 밝아지고 아름답게 변해 쳐다보는 제가 기분이 좋을 정도였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궁핍하여 힘들게 살고 있지만 제대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를 만난 이후로 자기의 두뇌가 완전히 뒤바뀐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자기의 헌 두뇌를 빼내 가고 새 것으로 교환해 놓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 목적, 사고 방식, 삶의 태도와 습관 등이 이전과는 정반대로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중생(Born Again)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고 두 아들에 관해서도 그 동안에는 어떻게 잘 키울 수 있는가에 관한 책만 사보았는데 이제는 단순히 그들이 예수님 잘 믿게만 해 달라는 기도밖에 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의 경우 하나님과 예수와 기독교를 믿는 신앙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게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여 스스로 믿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절대 그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라는 고백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 입니다.

불쌍한 이웃

두 번째 제게 생긴 변화는 갑자기 남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경쟁 상대로 쳐서 우월을 비교하여 저를 그들 앞에 증명하려 했던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반드시 제가 남보다 더 잘나야 했습니다. 더 좋은 것을 더 빨리 더 많이 차지해야 속이 시원했고 남들이 저보다 조금이라도 잘나고 가진 것이 많으면 시기와 질투로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불쌍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와 똑 같이 치사하고 비겁하며 죄가 많은 너무나도 제한된 인생이었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사단의 종이 되어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정말 애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나와 전혀 혈연이나 이해 관계가 없는 남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재벌 회장이나 대학 교수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정말로 신실하게 잘 믿는 신자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온유함으로 넉넉하게 이겨내는 분들이 부러웠습니다. 언제나 부드럽고 따스함이 넘치며 정말 얼굴 빛이 달라진 분들과 교제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고 또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앞으로는 오직 그 분이 시키는 일만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영원한 가치를 위한 일을 하며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가지 변화의 공통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저도 연약하고 저들 모두도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도덕적으로 선해진다고 합니까? 영적으로 신령해진다고 합니까? 둘 다 아닙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5-17)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외모,  지위, 권세, 재물, 건강, 지성, 교양, 친밀도, 선호도 등으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적 기준으로 비교하여 경쟁 상대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저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만으로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알지 못하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며 그 인생에 전혀 소망이 없기에 이미 받은 은혜와 소유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나눠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너무 세게 믿으려 하지 말라

신자가 세상과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믿음을 자꾸 강하게만 키우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믿음에 힘이 너무 들어간 셈입니다. ‘으샤으샤’하며 무슨 일이든 믿음으로 이겨낼 생각밖에 못합니다. 마음 속에 시기와 분노와 상처 같은 것이 생기면 당장 없애달라고 또 현실의 환난과 고통도 빨리 해결해달라는 것에만 모든 믿음의 초점을 맞춥니다.

부드러운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울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거나 너무 예수에 빠져 들어선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화끈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미쳐야 합니다. 또 제대로 예수를 알고 믿으면 그 분에게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에게 안 미치는 믿음이 이상한 것이며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신자 자신이 먼저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이 생길 때만 어떻게 하든 성령님의 신령한 능력에만 의지하려 들지 말고 신자 자신이 성령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져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존재를 항상 그 분의 인도하심에 내어 드려 그저 담대하게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특별히 신비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지 않고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한 인생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땅의 삶에는 환난이 그칠 새가 없으며 영원한 실체가 아님을 알아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을 사모하며 세상 속에는 있으되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자와 전혀 다른 목표와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전 인생과 생명을 걸고 살아야 할 방향과 달성할 목표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전에는 섬기는 대상이 사람이었고 목표가 세상의 형통이었지만 예수를 앎으로써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보물을 쌓는 것이 목표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과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고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한 그들 앞에 절대 당당해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일들이 안개 같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확신해야만 누구를 만나건 어떤 환경에 처하건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정말 제대로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점검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기도 간절하게 하고 찬양 뜨겁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잊지 않으며 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겨지는가 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 변화된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만 혹시라도 여러분보다 더 착해지고 죄를 덜 짓게 되었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환난과 고통이 닥치면 불안해지고 염려하며 형통하는 사람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저도 모르게 솟아납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해 기도도 안하고 넘어갈 때가 더 많이 있지만 성령님이 저의 기도를 통해 아니면 독단적으로도 반드시 저를 되돌려 놓는 자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 너무 힘들게 살고 있고 단 한 명도 불쌍하지 않는 영혼이 없구나. 세상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로 가득 찼으며 나도 그 중에 하나일 뿐이구나”를 재삼 재사 확인하게 해 주십니다.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는 찰나 같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총 없이는 도저히 지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줍니다. 그래서 또 다시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 하나님만 확실히 붙들게 해 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 모든 핍박을 당당하게 이겨내신 근거가 당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하를 지으신 분이 말 한 마디로 핍박하는 대적을 몽땅 없앨 수 있었습니다. 강함으로 강함을 이길 수는 있지만  연약한 죄인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은 사단의 사슬에 묶여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들을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을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했던 그 사랑이 있었기에 어떤 박해가 닥쳐도 잠시 피하시기는 해도 구원 사역을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당신의 일정대로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사랑하시기에 성령을 주셨고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고 내주해 계십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자매님이 뇌가 바뀐 것 같다고 간증한 그대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 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오직 자비와 긍휼에 가득찬 마음으로 말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얼마든지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기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들 또한 주님의 마음을 닮는 자로 바꿔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자더러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한 능력으로 또 죄를 안 짓는 성품으로 우리는 도저히 주님의 발치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 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바로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세상과 사람 앞에 당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믿음을 강하게 키우려 하지 마시고 자비와 긍휼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채워 보십시오. 틀림 없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담대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1.10.12 12:00:22
*.169.30.48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연약하고 또 부끄러움이 너무도 많이 탑니다.
그리고 자존심은 어마 어마하고...
성령님은 여러가지 모양의 환난, 인간관계, 고통... 들을 통하여서
자신의 진자아을 조명하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진정 구하는 것은 연약함이 소멸되고 담대함으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10.19 15:16:45
*.14.99.253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은혜를 믿게 해주시어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치 못하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그저 불쌍할 따름입니다.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그들도 그분의 긍휼하심 입기를 기도하며 저로 인해 주위 이웃들에게 주님이 알려지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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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탁구공을 되 넘긴 예수님 (마12;9-13) [1] 운영자 2005-02-01 1956
94 주일날 짜장면 사 먹어도 되나요? (마12:1-8) [1] 운영자 2005-01-25 6527
93 마음의 쉼을 얻는 세 가지 길 (마11:28-30) [2] 운영자 2005-01-18 2691
92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이 없으셨던 진짜 이유(마11:28-30) [1] 운영자 2005-01-11 1988
91 벤허가 골고다 언덕으로 간 까닭은? (마11:28-30) [3] 운영자 2005-01-04 2939
90 빠삐용이 탈출한 진짜 이유(엡5:16,17) [1] 운영자 2005-01-03 1729
89 기 안 죽이고 아이를 키우려면? (엡6:4) [1] 운영자 2004-12-28 1793
88 기생집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인생들(요15:1-5) [2] 운영자 2004-12-21 1846
87 한국인의 세가지 종교적 유전인자 (마11:25-27) [1] 운영자 2004-12-1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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