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왜 귀신은 믿으면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가?(마12:22-27)

조회 수 2362 추천 수 131 2005.02.15 19:33:45

마태복음 강해(137)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 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제 덫에 거꾸로 걸린 바리새인들  

아주 인품이 고상하고 배운 것이 많아 이성적인 사람도 간혹 무식하고 교양이 없는 자보다 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저런 수준의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신경질과 분노를 터뜨리고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나중에 본인마저 “내가 완전히 미쳤었나? 뭔가 귀신에 씌었던가?” 식으로 자책한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버린 후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게 된 경우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 벙어리와 봉사가 된 자를 고쳐 주자 일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메시야의 별칭인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면서 놀랬다. 아직은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는 단계까지는 못 갔지만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은 인정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고쳤다고 비난했다. 예수님을 신접(神接)한 자 즉 귀신 들린 자로 몰아 부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비난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사단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이제 바리새인들이 역으로 자기들도 귀신 들린 자가 되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했던지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만 했다. 자기들이 파 놓은 덫에 오히려 자기들이 걸려버렸다.    

그들은 당시로선 가장 지성인이요 인격자였고 하나님을 믿는 열심에선 최고였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이치를 너무나 앞뒤 분별  없이 설친 꼴이다. 그 이유는 우선 예수님을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인식했으므로 있는 그대로 좋게 봐줄 리가 만무하며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기 때문에 실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죄목을 덮어씌우려 한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신13:5)고 했고 그 사형에 처할 대상으로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18:10,11)고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무당으로 옭아매려 했던 것이다.
        
눈이 뒤집힌 바리새인들

본문을 읽을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바리새인들이 기껏 안식일 논쟁에 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죽이려드는가일 것이다. 경제적인 손해나 신체적인 위협을 받은 것 하나 없고 다만 말로 토론한 것 뿐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아무 잘못한 일 없이 오직 선한 일만 했는데도 죽이려 드는 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인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일 만큼 중요한 일이 없고 또 그렇게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기들 하는 일의 전부요 인생의 소명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목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당신이 예배 드리는 방식이 완전히 틀렸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따지는데도 반발 한마디 못하고 당했다고 가정해보라. 아무리 인자한 목사라도 그 사람을 가만 놔두겠는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소설 레미제라불의 주인공 장발장의 경우처럼 대개 충동적으로 범하는 일이라 동정이 가며 용서해 주기 쉽다. 죄악 중에 더 추악한 것은 오히려 정신적인 죄다. 자존심과 체면이 조금이라도 손상 당하면 당장에 서로 적이 되어 평생을 두고 앙갚음하기 바쁘다. 심지어 살을 맞대고 몇 십년을 살아온 부부간에도 조금만 상대를 무시하면 그저 못 참고 아이들 장래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온갖 막말로 서로 치고 받다가 순식간에 남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죄는 따로 있다. 종교적인 더 정확하게는 그 배후에서 사단이 이끄는 영적인 죄악이다. 표면적으로는 인간끼리 싸우는 것 같지만 눈에 안 보이는 영역에선 항상 성령과 악령의 전투가 따른다. 세상에는 사단의 조종에 놀아나는 사람과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으며 그래서 모든 인간사는 이 두 세력들의 필연적인 충돌로 이뤄진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완전히 눈이 뒤집혀서 예수를 죽일 구실을 찾으며 설쳐대는 것도 귀신에 씌었기 때문이다. 자기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을 하고 있어 제 삼자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 마귀

그런데 본문을 언뜻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도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망하기 때문에 사단이 사단을 쫓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사단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 되는데 구태여 그들이 비난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요한복음 8:44에 나와 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사단의 가장 핵심되는 특성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진리가 전혀 없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사단끼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절대 스스로 분쟁하지 않는다. 인간을 어떻게 하든 자기들의 노예로 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사업을 형통케 하고 병도 낫게 한다. 심지어 무당이 귀신을 쫓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전부가 속임수다. 귀신들끼리 서로 져 주거나 귀신들의 왕이 그렇게 조종하는 것이다. 점쟁이나 무당도 처음에는 효험이 있다. 그러나 갈수록 병이 덧나고 더 큰 재앙이 생겨 굿 판이 커지고 복채의 단가도 높아진다. 한 번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은 자는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얽어 매는 것이다.  

사단은 분명이 우주 전체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능력이 센 영적인 존재다. 얼마든지 인간을 농락하고 조종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오직 하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의 최종결재권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사단이 처음 욥의 믿음을 두고 시험할 때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을 몽땅 날리고 자식들 마저 한 날에 다 죽게 했지만 욥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자 두 번째 시험에선 그의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이 도지게는 했지만 하나님이 절대로 그를 죽이지는 말라고 했다.

“참새 두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세상 만물의 살고 죽음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고 모든 인간사의 축복과 재앙도 그 분께 속했다. 참새마저 그분의 권능 안에 있는데 하물며 인간, 특히 그분의 자녀의 안전을 최종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사단의 어떤 흉계나 모략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바리새인들이 비록 귀신을 쫓았지만 그들은 귀신에 조종당한 것이지 하나님의 권능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입으로 분명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24절)고 실토했다. 더 센 귀신만이 더 약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거나 의지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귀신은 믿되 하나님은 믿지 않은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겉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면 사단의 자식들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에서 아무리 입술로 주여주여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사람이 되어서 그 분과 동행하고 있지 않는 한 여전히 사단의 자식이다.

아주 멀쩡한 사람들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귀신에 씌었기 때문이다. 헛소리나 미친 짓을 안 한다고 귀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돈까지 바쳐가며 절하는 것은 귀신을 인정한 것이다. 부적을 내의 속에 항상 넣고 다녀라, 집안에다 괴상한 형상의 물체를 걸어두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사단의 종이 안 되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적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작은 귀신 막아줄 테니 큰 귀신한테 절하라”는 것이다. 한갓 종이 쪽지에 지렁이가 기어 가듯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씨와 그림이 도대체 천하보다 고귀한 존재인 인간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체가 귀신에 씌어진 확실한 증거다. 아담의 원죄 하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그 전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전부 사단의 노예다.

사단은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이단 종파에도 많은 기적이 일어나듯이 사단이나 하나님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 같이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는다. 그럼 그 배후에 어느 힘이 작용했는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영을 분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받지 않고서 단순히 그 현상만 보아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신령한 자는 거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단이 어떤 속성을 가졌고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켰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을 사단만큼 속속들이 잘 아는 존재는 없다. 사단이 인간을 이미 망가뜨려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단은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켰는가? 살인, 간음, 도적, 강도, 폭력을 저지르는 흉악한 범죄자로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자꾸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 뿐이었다.

아담이 최초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할 때에 사단은 단지 그에게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지정의로만 판단하여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원죄 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불안해지게 되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신성한 율법을 수여 받는 그 사십일도 못 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영적지도자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졌다. 어쩌면 모세보다 그의 홍해를 가른 지팡이가 없어진 것에 더 불안해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갖고 있던 모든 금붙이를 동원해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광란의 잔치를 벌였다.

점쟁이나 무당 집에 가보면 온갖 시뻘겋고 푸르죽죽한 이상한 그림과 기묘한 형체의 동상을 걸어 놓은 것이 다 눈에 보이게 해 뭔가 신비감 내지는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향불을 피워 놓고 대나무 작대기나 엽전 통 같은 것을 흔들거나 무당 춤을 추는 것은 자기들 귀신을 불러내는 초혼(招魂)의 절차이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게 하려는 짓이다. 그리고 기껏 그 능력을 보인다는 것이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정도인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짓인가? 그 하는 짓만 보아도 그 배후 세력이 얼마나 더럽고 음습한 죽음의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있는데도 속아 넘어가고 있다. 거짓의 아비가 인간을 오직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집착하게 만든 결과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법

이에 반해 하나님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의  큰 축복을 받은 데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거나, 갑자기 중병이나 환난을 겪으면 겁이 나서라도 경배하지 않을 자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에게 그렇게 반응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되돌려 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그 뚜껑을 열어보다 ‘인디애나 존스’ 영화에서처럼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벌을 받아 70명이 즉사했다.(삼상6:19)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언약궤는 절대 손을 대서도 안 되는데 직접 뚜껑을 열어 봄으로써 율법을 어긴 죄도 아주 크다. 또 죄악으로 더럽혀진 인간이 거룩의 본체로서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과 맞대면하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타 없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맘에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비록 호기심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는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순수한 생각을 가진 자도 있었을 것 같다. 또 혹시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 언약궤 안에 이상한 것을 넣어놓지 않았나 점검해 볼  필요도 있었을 텐데 다 죽이다니 하나님도 좀 심하지 않았는가라는 의아심은 지울 수 없다.

이 사건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언약궤 뚜껑을 열어 보면 죽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 뚜껑은 항상 닫혀진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절대로 열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절대로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 분석,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이자 하나님 당신도 보이는 것으로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사물과 사건들에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인간이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재앙으로 보일지라도 재앙이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축복처럼 보이는 것도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은 인간의 지정의 판단을 넘어선 곳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에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어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영원토록 신실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 하나님 다우심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눈에 보이는 피조물로도 도저히 비교될 수 없다.  

예수님도 이땅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다. 부활 승천하셨기에 무덤도 없고 그 흔한 비석도 없다. 생전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소지품이었던 겉옷, 속옷, 허리띠, 샌들마저 로마 병정들이 제비 뽑아 나눠 가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중에 무엇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람들이 그 물건에다 대고 줄 서서 절하는 난리를 칠까 염려하신 것이다. 교인들 집에 걸어 놓는 십자가 형상도 자칫 우상이 될 수 있다. 십자자가 자체로는 드라큐라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 특별히 자신을 대신해 죽은 그 뜻에 감사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딱하나 남기신 것이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적힌 당신의 말씀이다. 하나만 남겼다는 것은 가장 귀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직 당신의 당신 되심을 오직 말씀으로만 계시하고 당신이 살아 역사하시는 모든 역사를 그 말씀의 바탕 위에서만 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란 반드시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며 또 말씀은 전혀 읽지 않고 기도만 해선 아무런 은혜를 맛볼 수 없다.    

집안에 저주를 불러 들이는 시어머니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안 보이게 역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이 눈에 보이는 것들의 형통에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일의 모든 초점은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는 인간의 영혼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과 권능의 목표요 그 대상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존재 그 자체이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풍요롭게 해주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우시고 당신의 성품에 참여 시키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형상대로 회복시켜 인간으로서 참 인간답게 살며 참 사랑으로 당신뿐 아니라 인간 서로를 섬기기를 바란다. 세상 앞에 당신 대신에 빛과 소금으로 서 있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당신의 신자를 향한 유일한 소망이다.    

이에 반해 사단이 인간 눈앞에 드러내보이는 이유는 거짓의 아비이기에  인간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실체인양 속이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와 목표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음에도 당장 눈 앞의 현실이 삶의 전부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만 그저 목을 매달고 살게 만든다. 그래서 병이 나고 환난이 닥치면 불안과 염려에 휩싸이게 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을 심어준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곤경에서 벗어나야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에 굿도 좋고 부적도 좋다가 된다.

사단이 하는 어떤 일도 거룩과 선과 의와는 아예 거리가 멀다.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자가 단 한번이라도 “제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당신이 믿는 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 법이라고는 없다. 그저 “떡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지요?” 식이다.         

그에 대한 사단의 대답도 “지금 며느리가 재수가 없으니 당장 이혼 시키고 새 장가 들게 하라”다. 찾아간 시어머니 혼자만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 며느리, 손주까지 귀신에게 사로 잡힌 자로 만든다. 자기 가문에 귀신의 저주를 불러 들여 대대로 이상한 일이 끊이지 않는다. 안 그래도 사단은 모든 인간을 종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제 발로 찾아 오니 그것도 바칠 돈을 들고 찾아 오니 가만히 앉아서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람들이 ‘귀신에 씌었나 봐’ 할 정도로 이성이 완전히 마비가 된 후 매사가 뒤틀려 갈 때가 종종 있는데 그 대부분은 사실 귀신의 노름에 놀아난 것이다. 이미 일은 꼬일 대로 꼬여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다. 사단이 원하는 것은 오직 인간을 실패하고 망하게 해 죽음으로 이끄는 것뿐이다.    

사단이 때때로 병을 고치고 돈도 벌게 해 주는 것도 사실은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을 실패케 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지름길은 그저 배불리 먹여 주면 된다. 인간은 아무 문제 없고 배 부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찾지 않는다는 것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단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참 능력과 온전한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만큼 인간에게 더 큰 실패는 없기 때문이다.

사단의 종 되었던 근성이 남아 있는 신자
        
우리 가운데 소위 예수 믿는 신자이면서도 “그래도 올해 토정비결에 3재(三災) 수가 있다고 하니 조심한다고 나쁠 것 없지”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신문을 펼쳐서 ‘오늘의 운세’부터 보는 자는 없을 줄 믿는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다가 아니다. 신자가 가지는 신앙상의 가장 큰 딜레마이자 불만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좀 화끈하게 보여 주시면 안 되는가? 당장 이 문제 좀 해결해 주시면 어디가 덧나는가?” 여전히 신자 속에도 사단의 종 되었던 근성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으로 번져 나온다.

사단은 사단을 인정하면 할수록 그 힘을 발휘한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보이는 것에 자꾸 집착하여 아둥바둥 할수록 사단의 꾐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에게 베풀어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권능이 중간에 막혀 중지된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욱 침묵하신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조바심, 짜증, 의심, 불만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하나님 이젠 나도 모르겠습니다. 앞발 뒷발 다 들었으니 저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항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자가 병이 나든, 사업이 부도가 나 끼니를 굶든, 심지어 목사가 암에 걸려 죽든, 새벽 기도 나오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든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당신의 영광은 절대 손상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그런 일로 인해 전혀 하자가 없음을 믿기에  눈에 보이는 것과는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바라보고 그 선하심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다.

사단이 거짓의 아비인 것이 절대 자신을 직접 경배하라고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존재는 항상 장막 뒤에 숨기고 인간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본문의 바리새인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이려는 것에 눈이 뒤집히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귀신들린 자를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간단한 진리마저 잊게 만들었고 심지어 예수를 죽이려는 그 살인 모의마저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행하게 했다.  

하나님은 사단과 정반대다. 항상 하나님 당신만을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신자가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소원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당신을 경배하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며 예수님도 도마에게 보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했다.

무조건 믿음을 세게 키우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맹목적(盲目的)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보는 것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권능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아야 하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 생각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고 대화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이 귀신에 씌어진 것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귀신을 믿을래 하나님을 따를래 대놓고 선택을 강요해도 귀신을 택한다. 점쟁이나 무당은 찾아가면서 교회는 외면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눈에 보이는 형상과 물건 하나 남기지 않으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사단의 덫에 걸려 자기 이성으로도 절제가 안 되어 미친 듯 귀신 들린 듯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바로 잡아 주려 오신 것이다. 세상의 보이는 것들만 집착하게끔 왜곡된 영혼을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서 땅에 것 대신에 하늘의 것을 사모하게 만든 것이다.

이 땅의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절대 인간의 삶과 존재가 끝나지 않는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은 오직 하나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들에 집착하고 살았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원하며 살았는가다.  


사라의 웃음

2011.10.13 10: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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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덫에 걸려 이성으로도 절제가 안 되어 미친 듯 귀신 들린 듯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바로 잡아 주시려 오신 우리 예수님. 세상의 보이는 것들만 집착하게끔
왜곡된 영혼을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 하늘의 것을 사모하게 만드시는 주님.

죽기까지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하늘을 주시려는 주님의 맘을 점점 더
깨닫고 알아가며 그저 놀라와 입을 다물 수가 없는 상태가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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