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돈만 밝힌 천하의 악인인가?
[질문]
운영자님이 앞선 답변 글에서 “가룟 유다가 돈에 욕심이 있었긴 하지만 가난한 자를 위하는 마음은 분명히 컸고"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12:5-6)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다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진정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훔쳐갈 돈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그런 소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 궤에 돈이 많아야 훔쳐가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돈을 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마26:24).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했는데, 그저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궤를 맡은 것도, 예수님을 판 것도, 심지어 자살을 한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답변]
유다에 대해선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오직 돈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돈을 훔친 자였다. 2) 비록 돈궤에서 때때로 돈을 훔쳤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과 동족을 위하는 마음은 있었던 자였다. 이 둘 중에 저는 후자의 의견을 따르며 앞선 제 글에선 그가 인간적인 의를 매우 중요시 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그런 의견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제가 후자의 의견을 따르는 이유를 다른 여러 글에서 이미 밝혔지만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마리아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마태는 제자들이 분개하며 같은 말을 했다고 하고, 요한은 특별히 가룟 유다만 그런 말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니라 요한이 그를 '도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네 복음서마다 저자가 다르기에 목표하는 수신자층, 저작 의도, 강조하려는 주제 등이 각기 다릅니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선 개별 복음서의 특성은 당연히 감안한 후에 상호 비교해서 종합적으로 당시의 상황에 가장 근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사건 중심으로 기록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보다 최소 한 세대 뒤에 예수님과 그 사역의 신학적 해석을 중심으로 저작된 책입니다. 교회는 이미 유대인들보다 이방인 신자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예수님이 메시아 됨을 부인하려는 당시의 이단사상의 오류를 지적하여 예수님에 대해 아무래도 지식이 모자라는 이방인 신자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려는 목적으로 저작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과 동시대에서 주님의 직간접으로 가르침을 받았고 사역을 목격하거나 동참한 자들이 대상이었으므로 구태여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주님 사후에 한두 세대가 지난 뒤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택한 제자인데도 왜 유다가 배반했는지에 대해 의심 반박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돈에 욕심이 많은 자라서 배반했다고 간단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돈 궤를 맡았는데 어떤 조직이든 회계를 맡는다는 것은 수리에 밝고 돈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중에 유다의 배반을 주님이 넌지시 암시했고 또 그래서 유다가 나가버렸는데도 제자들 중에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으니 평소에 제자들에게 크게 의심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랍비는 제자들과 함께 기숙하면서 종일 스승이 행하는 말과 행동을 본받게 만드는 방식으로 교육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삼년 간 제자들과 동고동락했습니다. 유다가 계속 돈 궤에 손을 대었다면 그 사이에 제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께 부은 사건은 돌발적으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로선 그 비싼 것을 허비했다는 생각부터 들어서 분개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그 현장에서 아무리 돈에 욕심이 있는 유다라도 향유 판 값을 챙겨서 돈궤에 넣으면 자기가 나중에 훔칠 수 있겠다는 데까지 계산하고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향유는 마리아의 소유이므로 그가 팔든지 주님에게 다 붓든지 전적으로 그녀의 재량에 달린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둔 것으로 유대인들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자들은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붓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그것을 허비했다는 사실에만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가르쳤으나 제자들 전부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 예언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의 가르침을 순전하게 믿었고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표정에서 비장함을 느끼고 장사의 예를 치른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과 연결하면 유다도 분개한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현장에선 유다도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의 별칭인 가룟의 어원이 여럿이지만 대체로 열심당이라고 보며 그의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6:71) 열심당은 식민지 이스라엘이 당시 세계 최강 로마제국에 맞서서 전쟁할 형편이 전혀 안 되므로 제국의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거나 부분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는 유대인들의 비밀 결사조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 조직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데 발각되어 체포되면 최고로 고통이 심한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려집니다. 로마는 제국에 대한 반역죄는 반드시 십자가로 처형하는데 예수님의 공식 죄명도 그랬습니다. 유다가 열심당원인 자기 아버지에게서 어려서부터 민족독립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기 목숨을 걸고 열심당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로마에 수탈 압제 당하는 동족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봐야합니다.
결정적으로는 그가 예수님을 겨우 은 삼십 냥에 팔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예수님이 유대사회에 끼쳤던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기득권층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활이 걸리다시피 하는 문제였기에 총동원이 되어서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은 삼십 냥은 노동자의 삼십일 임금에 해당됩니다. 유다가 정말로 돈만 밝히는 자였다면 그런 헐값에 넘길 리는 없습니다. 반면에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의 가치는 그 열 배인 삼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의 몸값을 두고 흥정하지 않았고 대제사장들이 달아주는 대로 받았습니다.(마26:14-15) 그들이 은 삼십만 달아준 이유는 노예 한 명의 몸값이기 때문으로(출21:32) 예수님을 그 정도로 천하게 여기고 무시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전문가인 그들이 유다에게 받은 돈으로 토기장이 밭을 살 것이라는 구약예언(슥11:13)을 몰랐던 것과 같이, 메시아가 그 값에 팔린다는 예언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슥11:12) 인간들이 자기 의지로 맘껏 행하도록 허락하시고도 당신의 계획을 한 치 오차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완벽하신 권능과 섭리가 또다시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돈만 밝히고 오직 돈을 위해서만 사는 자를 제자로 택했다는 것은 주님의 성품과 사역 원리와 이 땅에 오신 의미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유다라는 사상 최고의 악인을 그의 구원이나 입장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십자가구원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한갖 엑스트라로만 동원한 셈이 됩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만에 하나 돈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유다를 예수님이 처음부터 제자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열심당원으로 세상에서 의롭다고 칭해지는 자의 대표로서 나중에 인간의 의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도록 해서 십자가 은혜의 복음과 대비되게끔 선택한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마26:24)이라는 예수님의 예언도 단순히 유다가 추악한 탐욕으로만 가득 차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라고 정죄하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의를 앞세우다 결국은 비극으로 일생을 마감할 것이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도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는 뜻이며 어쨌든 그의 인생의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과 자살 사건 기사가 오늘날의 독자에게 던지는 첫째 메시지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요,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가 배신자라고 넌지시 암시를 주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도 제자들 모두가 유다나 베드로와 같은 성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모두가 자신의 인간적 의만 높이려는 죄인일 뿐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한두 구절을 따로 떼어서 문자적 의미에 제한되어선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네 복음서를 주신 것은 상호 비교 대조해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저작 당시의 모든 정치 경제 관습 문화 법률 종교 등의 상황을 감안하고 저자의 저작 의도나 책의 주제와도 비추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 요한이 유다가 도적이었다고 평가한 것은 후대 사람들 특별히 이방인들이 왜 예수님과 오래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인데도 배반하고 팔아넘겼느냐는 반박에 대해 쉽고도 간단하게 답변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유다가 돈에 욕심을 가진 자이고 때로는 돈 궤에 손을 대고 훔쳐간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단순히 그렇게 해석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가 배반한 이유의 전부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 두 글을 참조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을 그렇게 단정 짓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도 악인과 선인 둘로 무 자르듯 나눠서 판단 정죄하기 쉽고 신앙이 윤리적인 차원으로 퇴색될 수 있습니다. 유다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나 똑같이 연약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성품을 지닌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조금 더 폭넓은 시야를 갖고 그가 배반한 사건에 대한 의미도 더 깊게 새겨야할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두고 완전한 성자 아니면 완전한 악인으로 구분지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최고 악한 왕 므낫세도 나중에 회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알다시피 자기 혼자 살려고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지금 우리와 성정이 똑같았습니다. 아니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죄에 찌들었기에 하나 같이 똑같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을 탐한 한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판단하면 성경은 도덕교과서에 불과해집니다. 당장 저부터 목사가 된 후에도 수시로 돈에 대한 욕심도 생기며, 알게 모르게 돈에 대한 실수도 하고, 불신자 시절에는 빌린 돈을 떼먹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비해 인간(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다 포함해서)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10/18/2021)
신판(新版) 가롯 유다전(傳)(행1:15-19)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6 - 마26: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