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꼭 필요한가요?
[질문]
저는 예전부터 성경의 궁금한 점에 대해서 파고드는 것을 좋아했고 신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학을 대학에서 하듯 공부한 건 아니지만 성경 해석이나 성경과 관련된 역사 같은 걸 찾아본 적이 많구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대속 같은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믿는 건 당연하지만, 일개 피조물인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고 저런 분이고 이러쿵저러쿵하여봤자, 또 내가 어떤 논리로 그것을 뒷받침해보았자 정말 그러한지는 알 수 없는 게 아닐지요?
예를 들어 삼위일체만 해도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 중 어디에서 발하시느냐 하는 논란이 있다거나, 예수님 안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되느냐 같은 논란이 있지만, 아무리 성경적인 논리를 갖다 댄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럴듯한 다른 논리를 댈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일자무식한 시골 할머니의 경우 그런 것을 일체 모르고 그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 하나 믿고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오직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 분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예정설이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많은 사람은 그런 논리에 대하여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서 막연히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 결과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도 구원에 있어서 그런 부분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는 게, 하나님의 크신 신비를 어떻게 인간의 생각으로 알려고 하고, 무엇이 정답일 거라는 식으로 단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많은 신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불합리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학을 구원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차원에 국한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 대해서 인간이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셋째로 교리와 신학의 역할이 각기 무엇이며 그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신학의 필요성
말씀하신대로 삼위일체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와, 예정론에 관한 신학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구원받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시골 할머니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진리를 순전하게 믿고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천국은 갑니다. 그러나 구원이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의 전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신앙상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죄인을 택하여 세상에서 불러내고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신 뜻이 과연 천국 보내는 것 하나뿐이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옥화재 면제보험증서를 받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구원을 주는 즉시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든지 죽기 직전에 택한 자를 구원해주어도 됩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개인적 체험을 함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본인이 구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은 죽어봐야만 압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런 확신을 심어주는 까닭은 구원 이후 천국 가는 동안에 오직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예수님은 신자더러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모든 신자는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만나는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로 삼아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선 그리스도와 닮도록 가꾸고 죄와 싸우며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 세상을 위해선 주님의 사랑으로 불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여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를 예수님의 빛으로 거룩하게 바꾸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신앙을 성숙시키고 주님이 맡기신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이 땅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등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학(神學, theology) - 신(theos)에 관한 학문(-ology)을 제대로 알아야 세상에서 불러내신 주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도 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베드로 사도는 전도할 때에 불신자의 질문에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 놓으라고 권면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소망이란 신자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화입니다.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온다는 것은 전도하면서 기독교의 부활 교리를 불신자에게 전하면 그에 대해서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교리가 형성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신학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진리라고 선언합니다. 필연적으로 예수님 당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비평 반발 폄하 시비가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에도 진리를 기만하는 거짓교사들이 여전히 설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 안과 밖의 시험과 기만과 공격에 잘 대처하고 신자들로 굳건한 믿음 위에 세우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성경에 부합되는 건전한 신학입니다.
신학의 가능성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인간만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는데 그 목적은 당신을 대리하여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 당신께서 직접 코에 숨을 불어 넣으셨는데(창2:7), 이는 당신과 상호 영적교통이 가능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려면 당연히 그분에 대해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시공간을 만드시고 그 너머의 영적 차원에 좌정해 계시는 그분을 물리적 한계에 구속받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선 그 실체를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계 내에서조차 인간의 감각과 인식 체계가 작동하는 범위는 아주 협소합니다. 예컨대 태양을 오래 쳐다보면 실명하고 천둥보다 큰 소리를 들으면 고막이 파열되며 뜨거운 불은 만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물리적 실체는 인간에게 사실상 접근이 차단되어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정작 인간이 알아야 할 그분의 성품 능력 뜻 계획 등 또한 너무나 광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을 먼저 드러내어주어야만 하고 또 그 드러내준 범위만 인간이 알 수 있는데 이를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손에 동전을 움켜쥐고 있으면 어린 아들의 조막손으로는 아무리 힘주어 펼치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주어야 동전의 귀퉁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대리인으로 세웠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그러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인간에게 계시해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불가능해 그분의 청지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또 인간은 그분을 진정으로 경배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다른 종교처럼 독선적 강압적으로 도덕만 강조하는 신도, 창조 후에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조물주도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자체가 인간과 교제 동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기뻐하셨듯이 창조의 목적이 인간의 찬송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찬송(praise)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칭찬하는 것인데 그분을 모르고 어떻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을 보여주기를 당신 쪽에서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피조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기에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인간들이 그분을 알되 감사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아서 당신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원죄로 타락한 탓에 그분과의 진정한 교제가 끊겼고 그 결과 그분의 실존(實存)은 인정하나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인간세상을 다스리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택하여서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여 당신이 어떤 분인지 보여서 알게 하고 또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려고 거룩한 율법도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마저 율법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이 땅의 인류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18)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삼위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예수님과 그 사역과 십자가 대속구원 안에 당신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드러내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자녀가 된 신자들로 창조 당시의 경륜대로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는 당신의 청지기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택함과 율법의 수여는 골고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가는 예표였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아버지가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면서 동전의 일부를 아이가 볼 수 있게 해준 것으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계시였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히 손바닥을 펼쳐서 동전(하나님)의 전부를 보여준 것입니다.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충분히 또 완벽하게 다 보여줌으로써 당신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또 그 계시를 정확하게 설명한 정경이 확정됨으로써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 전부를 다 보여주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령 다보여주어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리석은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과 당신의 역사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또 그 앎으로 이 땅의 청지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성경과 예수님 안에 충분히 드러낸 것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8,9)
요컨대 인간이 하나님 그분을 알 수 있으되 반드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존하신다는 사실 말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다른 길은 이것 외에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실제로 자기 삶에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 동행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알 수 없다고 말하거나,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면 그 신앙 자체를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교리의 부족성
그럼 성경만 배우면 되지 왜 교리와 신학을, 그것도 신학을 배워야 하는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당장의 현실적 이유만 해도 신자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연구해선 솔직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기다 성경 66권이 각 책 마다 주제가 다릅니다. 교리와 신학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오랜 기간 연구 토론하여 신자들로 성경을 잘 이해하여서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끔 체계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바로 교리와 신학이며 그것을 모르면 성경을 모르는 것이며 그럼 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나아가 신학에 바탕을 두고 교리가 형성된 것이지 신학이 없는 교리는 없습니다. 그 반대로 교리로 체계화되지 않는 신학은 신학으로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학은 교리를 더 깊게 풀어쓴 것이며 신학을 줄여서 요약한 것이 교리입니다. 교리가 교리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배경, 의미, 이유, 목적, 방식, 결과 등을 신학이 폭넓고도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먼저 있고 교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핵심만 짧게 요약한 것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수학에서 공식은 교리이고 그 공식이 형성될 수 있었던 논리, 추론, 해석 등이 신학입니다. 그런데 공식만 배운 자는 그 공식을 적용할 수 없거나 조금만 복선이 깔린 문제를 만나면 당황해서 풀지 못합니다. 반면에 그런 공식이 도출된 논리적 바탕을 아는 자는 어떤 어려운 문제도 자신이 추론하거나 다른 공식들까지 적용해서 풀어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삶이 평온할 때는 교리만으로 충분할지 모르나 문제와 환난이 닥쳐서 삶이 요동 칠 때는 많이 부족합니다. 나아가 인생에 대해 정말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신학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린다는 것은 교리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살펴봐도 추가로 설명해야 할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창조 하나만 해도 창조의 과정 범위 결과 목적 등을 배워야 하고 또 진화와 비교 판단을 해야 하며 현재 나라는 존재 삶 인생과 창조의 관계 등을 분별해서 신앙생활에 적용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학의 도움이 없이 교리만으로는 크게 부족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신이 믿음을 갖는 목적이 구원을 얻어서 이전보다 더 착하게 살며 교회에 봉사하고 성도들과 서로 격려 위로하며 교제하는 것에 국한하면 교리만 알아도 됩니다. 그러나 당장에 전도하려면 부닥치게 되는 온갖 반발 비난에 올바르게 대응하고 질문들에 정확하게 변증하는 일 하나에만도 반드시 신학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단계에서 모든 신자들이 착각 내지 오해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을 신학교에서 학술적으로 배우는 것으로만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나 성경공부 때에 이미 교리를 넘어서 교리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신학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는 자기만의 신학이 세워져 있고 그 신학에 바탕을 두는 설교를 합니다. 사실상 모든 교인들이 매주 계속해서 신학을 배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그분과 더 깊고 풍성한 교제를 하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그분에 대해 더 깊이 배우려듭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기도한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신학의 다양성
여기까지 설명 드린 내용은 질문자님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목회자와 신학자마다 신학이 다르다는 것이며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학이 다르니까 교리도 일부씩 달라지는데 성경을 다르게 해석한 탓입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지 않는 일반신자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태여 신학을 알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데 대표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고 한번 따져봅시다. 우선 삼위일체는 성경에 없는 용어로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학이 이 교리를 만든 것인데 대부분의 신자들에겐 복잡하고 어려워서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없는 용어라고 해서 성경과 무관하게 만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어서는 잘 정리가 안 되는 내용을 신학자들이 잘 정리해서 설명해주었고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려고 삼위일체라는 말을 고안해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사랑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가페’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살피면 삼위일체를 잘 풀어 설명한 자는 철저하게 여호와 유일신 사상을 가졌던 바울입니다. 그는 나사렛의 인간 랍비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신자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며 경배하는 것을 도무지 참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로선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큰 대적이자 이단 중의 이단이므로 끝까지 추적하여 처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한 후로 그의 유일신 신앙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극렬한 반대자가 열렬한 옹호자가 되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으로 메시아였다고 목숨을 걸고 선포했습니다. 그 전에 초대교회 신자들 대부분이 여호와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그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믿었고 성경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기록해놓았습니다.
반면에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 믿어야 한다거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인간이 아닌 천사라고(그분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잘못된 신학) 주장하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할 내용이 아주 많지만 간단히 이렇게만 살펴봐도 삼위일체를 모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서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여러 신학 중에 올바른 것을 구분하려면 신자도 신학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말씀드린 대로 일반신자들도 신학을 이미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특정 교단의 특정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본인이 의식 내지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여러 신학들 중에 하나를 택하여 배우면서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질문자님이 걱정하시는 대로 자칫 이단에 넘어갈 수 있으므로 그 선택에 대해 본인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기 신학이 분명히 세워져 있고 그 신학에 따라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신자로선 그 신학을 수용하여서 그대로 따르든지 문제가 있다면 따지든지 올바른 신학을 찾아가야 합니다. 최소한 자기가 듣고 배우는 것이 성경과 부합되는지 철저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면 신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신학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 교단들의 다양한 신학 중에 어느 것이 성경과 부합되는지 여부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자면 신자가 성경을 바로 알면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고 평생토록 성경을 통해 그분을 알아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특정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은 이미 특정신학을 배우고 있으며 그것이 또 바로 자신의 신학이 됩니다. 삼위 하나님과 더 긴밀하게 교제하고 동행하며 순종 헌신하려면 반드시 성경을 즉, 신학을 더 깊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신자의 만인제사장직을 넘어서 만인신학자직을 줄곧 주장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신자가 신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배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조직신학을 최소한 성경해석학은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선 조직신학을 비롯해 신학과 관련된 여러 과목들을 배우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성경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신학 즉,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경해석학부터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계시하고 있는 바가 신학이며 그런 신학을 모르는 기독교 신앙은 없거나 많이 부족합니다.
(8/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