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좋게 여기는 신자.

조회 수 31 추천 수 0 2018.09.13 12:47:45

(레10:16-20) 하나님이 좋게 여기는 신자.

구약성경강해(2) 레위기강해(2)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레10:16-20)

 

율법을 스스로 어기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바로 세워야 합니다. 아론은 그래서 레위기 1-8장에 계시된 제사법대로 첫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기쁘게 열납 하셨으며 아론은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의 불로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선 아론의 삼남과 사남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다시 제사법을 어겨서 모세가 노를 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는커녕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마저 죽이면 아론의 집안은 물론 대제사장직을 이을 후손이 없어지기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서 눈을 감아준 것입니까? 그럼 가장 가까운 친척이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율법의 규정대로 아론의 조카들더러 그 직무를 감당하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의 법을 어긴 것 아닙니까? 제사법을 제정한 의미가 없어지고 먼저 심판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만 억울한 것 아닙니까?아론의 변명을 들은 모세도 없었던 일로 칠 뿐 아니라 좋게 여기기까지 했습니다.(20절)

 

그렇다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신자들이 인간적 이성으로 판단하여 그 적용에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만야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는 것입니까?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율법의 제사 규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네 종류의 속죄제

 

레위기 4장에 따르면 속죄제를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 따라 네 종류로 구분해서 희생제물의 종류와 제사 드리는 방식을 각기 다르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네 신분은 제사장, 회중, 족장, 평민입니다.

 

둘째 신분인 회중을 레4:13에서 ‘온 회중’의 죄라고 말하지만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지은 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 ‘모든’, ‘전부’ 같은 수식어는 히브리어 표현법상 많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일 뿐입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지은 죄입니다. 함께 고의로 작당 모의한 죄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는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의 제사(레16장)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보다 주목할 내용은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백성들에게 허물을 입힌다는 말씀입니다.(레4:3) 제사장 개인의 죄를 회중의 죄와 동격화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하나님에게 들고나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첫째 직무입니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그럼 그 직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럼 또 백성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기에 그 죄는 백성들의 허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제사장과 둘째 회중의 속죄제는 그 절차가 동일하고 가장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물은 수송아지를 바쳐야 합니다. 이 단어의 원문은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젊다(young)는 뜻이므로 사실상 가장 힘센 황소를 의미합니다. 소는 당시에 제일 가치가 나가는 제물입니다. 그만큼 제사장과 회중의 죄는 중차대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제물을 죽인 후에 피를 성소에 갖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일곱 번을, 그 숫자의 완전하다는 의미대로, 뿌리고 분향 단 뿔에 발라야 합니다. 나머지 피 전부는 번제단 밑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모든 피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죽음으로 그 죄 값을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 제물의 기름과 또 마찬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콩팥은 제물을 태우는 번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나머지 고기도 전부 번제단의 재와 찌꺼기를 버리는 진 밖의 지정된 장소로 갖고 가서 완전히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실제로 죄인의 죽음을 상징하며 죄의 흔적, 오염, 폐해, 부작용을 철저히 씻고 고쳐서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셋째와 넷째,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는 한 개인이 지은 죄를 위한 것입니다. 족장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에 조금 더 비싼 숫염소를, 평민은 그보다 조금 격이 낮은 암염소나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피는 성소에 갖고 들어갈 필요 없고 전부를 번제단 밑에 쏟아 부으면 됩니다. 기름과 콩팥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제물의 나머지 고기들은 따로 지정된 즉,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당사자와 함께 먹도록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한 백성의 기쁨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백성들의 모든 생사고락의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이 살면 함께 살고 그들이 죽으면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이 이스라엘의 진중에 항상 함께 있으며 떠난 적이 없듯이 말입니다.

 

제사절차를 혼동했는가?

 

다시 본문을 봅시다. 우선 16절에서 모세가 염소를 찾았으나 이미 불에 살랐다고 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일단 개인이 드린 속죄제로 나머지 고기를 먹으려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15절에서 요제로 하나님 앞에 흔들며 제사 드린 고기 중에 가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의 몫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 고기를 먹으려고 가져 오라고 했는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이미 다 태워 없앤 것입니다.

 

혹시 17절에 그 고기가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둘째 백성들이 단체로 지은 죄를 위한 제사였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회중은 영어 man이 대표단수 용법으로 인간전체도 말하지만 한 사람을 가리키듯이 한 개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17절 후반부에 너희에게 준 고기라고 했고 또 18절에서 피를 성소에 갖고 가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제사는 분명히 셋째와 넷째의 개인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결국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정에서 셋째 넷째 제사 절차의 일부를 첫째 둘째 제사처럼 드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나답과 아비후가 율법대로 제사지내지 않아 심판 받아 죽은 것을 바로 얼마 전에 보고도 또 어기느냐고 당연히 야단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간단한 제사 절차를 혼동했을 리는 없습니다. 제물이 소가 아닌 염소인 것만 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이 19절에서 모세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라고 합니다. 마지막 제물 먹는 일만 빼고는 율법대로 온전하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은 장남과 차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이전 사건을 말합니다. 마치 오늘에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어법은 가까운 과거나 미래를 구체적인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론은 장남과 차남이 한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속죄 제물을 차마 먹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그럴 기분이나 마음의 태세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대제사장이자 아비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비라는 개인적 입장으로도 그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 화목잔치에 함께 참여해 고기를 나눠먹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은 아직 아론과 그 동생들이 더 회개 자숙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영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감정으로도 아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또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도 됩니다. 아론은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즉, 하나님도 선하게 여긴다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모세의 그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율법의 문자적 규정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에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를 안 드리면 더 좋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술을 마셨고 번제단의 불을 꺼트렸습니다. 스스로도 명백히 죄를 범했습니다. 본문에선 일부 제사의 절차만 어겼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직접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고 하나님과 회중들 앞에서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제사 절차를 어기긴 했지만 더 큰 헌신과 열심을 드러낸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의 절차를 일부 어겼어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적용하면 이들과 같은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면 꼭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다른 제사들이 아니라 속죄제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속죄제는 이미 범한 잘못과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 받아 그분과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지은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긍정적 의미이지만 쉽게 비유를 하자면 십일조는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좋습니다. 헌금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이미 받은 축복과 은혜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럼 십일조를 많이 바치면 그만큼 받은 것이 많다는 뜻이므로 십일조는 많이 바칠수록 좋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생생한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과 그 소유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삼상15장) 사울은 그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와 보물 등 귀하고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가 없는 것들만 다 없앴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야단치자 사울은 자신의 욕심은 감추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겨 놓았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순종이 번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우상에 절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15:22,23) 사울이 우상에 직접 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분 외의 어떤 다른 힘이나 영향력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우상숭배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말라고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은 개인적 탐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어겼습니다. 또 자기 탐욕을 따랐으므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까지 어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골로새서 3:5에 탐심은,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런 마음만 먹었는데도,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폐하지 말고 완성하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해서 율법을 깡그리 무시하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바칠수록 좋은 십일조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박하, 회향, 채소까지 십일조를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은 버리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마23:23)

 

오늘 본문에 드러난 율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속죄 제사는 필수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죄를 짓지 않고 그분과 순전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특별히 제사장, 지금으로 치면 목회자들은 자기가 맡은 회중들을 위해 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더욱 철저히 자기를 겸손하게 낮춰야 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울을 야단 친 사무엘은 백성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않고 대신에 선하고 의로운 도를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삼상12:23) 목사는 자기가 맡은 양떼인 회중들의 죄와 허물은 물론 고난과 문제를 품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삼아서 기도하되 교인들보다 더 안타깝게, 더 간절하게,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몰론 그 고난과 문제를 겪고 있는 신자와 정서적으로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는 전임(full time) 사역자입니다. 회중은 일상적인 생업에 바쁩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고 교인들이 생계를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레위인들도 그래서 기업을 받지 않아도 백성들의 십일조로 먹고 살게 해준 것입니다.

 

본문의 아론도 그렇게 받아먹을 수 있는 고기인데도 도무지 자격이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목회자는 회중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생업입니다. 밥을 먹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오직 제사장으로써의 맡은 직무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아서 각각 부르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른다고 했습니다.(요10:3,4) 신앙공동체는 그 구성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개인적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 혼자 예배나 성경공부를 주관하는 경연장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져서 목사가 부득이하게 교인들을 이름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도 구역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서 평신도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소그룹 사역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신자의 문제를 그 신자가 한 번 기도해도 열 번은 기도해주어야 하고, 구역장도 구역원의 문제를 구역원이 한 번 기도하면 네다섯 번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지촌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제가 목회 초기에 어떤 분을 심방 갔다가 크게 쇼크 먹은 적이 있습니다. 국제 결혼한 여자성도였습니다. 오래 전이라 죄송하지만 기지촌의 소위 말하는 양공주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일반 가정을 한번 심방가면 자기들은 동일하게 한번만 심방 오면 차별로 간주하고 두 번 이상 와주어야만 그나마 동등하게 대해준다고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았고 고뇌와 슬픔이 깊었으며 지금도 그 아픔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주로 세리와 죄인과 불치병자들 같은 소외된 자들을 만났습니다. 또 누구를 만났습니까? 창녀들도 만나주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지촌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많이 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한 것이 별로 없었으며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만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으며 세상이 먼저 그들을 버렸습니다. 도움과 위로를 받을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간 사회에선 이미 하나님에게 저주 받아 구원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마저 그들을 외면하면 죽음밖에 남지 않은 자들로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로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이었습니다.

 

아론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을 어겼지만 사실은 더 헌신했습니다. 한 번 심방할 것을 두 번 심방을 간 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좋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율법 규정대로 했더라도 제사장의 직분을 다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당연히 기뻐합니다. 그가 더 철저히 낮아졌기에 하나님의 더 좋게 여긴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이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당연히 너무나 기뻐하시지만 목사는 더 철저히 낮아지고 섬겨서 하나님의 기쁨을 몇 배로 배가 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목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 앞에 제사장으로 목사로 서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기도하며 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긴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하고 아직도 탐심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며 주중에는 매 번 넘어지며 주일에 겨우 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 정도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구원하신 뜻은 당신을 따르며 자기 십자가를 지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자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섬기는 것의 몇 배로 교회 밖의 미혹된 영혼, 예수님의 사랑 밖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며 섬겨야 합니다.

 

신자가 평생 져야 할 멍에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일 성수하고 기도하고 성경에 능통한 것들 다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만 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주님은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되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을 실현하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는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기에 그것을 바로 잡고 여유를 찾으면 내가 쓰고 남는 것으로 힘든 사람도 돕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내 코가 비록 석 자나 빠져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내보다 더 딱한 사람들이 많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쓰기에도 부족하지만 그마저도 쪼개서 주위에 나눠주겠다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불신 이웃의 코가 내 코보다 덜 빠졌어도, 그들이 겪는 고난과 문제의 세기가 훨씬 약해도 여전히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져야 하고 그들을 내가 가진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능한데다 영적으로 어리석고 죄에 찌들어 자기 의지와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에 매번 실패하고 삶이 갈급하고 허망합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빌어야 할지 몰라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연발합니다.

 

신자로선 그들의 현실적 고난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것이 더더욱 불쌍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보다 그들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찾아가서 주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더라도 그들의 문제에 대해 기도해주고 고민을 들어주거나 같이 있어주기라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가장 큰 은혜, 축복, 권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모르는 자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입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예수를 믿고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신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신자의 숙명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울 길이 없다면 그들을 만나고 돌아와 잠시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주게 됩니다. 가슴이 먹먹한 것은 신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간구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신자부터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것은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주일에 지난주에 지은 죄만 용서받는 심정으로 나오는 것은 속죄제를 드린 것뿐입니다. 속죄제는 안 드릴수록 좋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며 닮아가는 삶이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분은 이 땅에 와서 인간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최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분을 따라 사는 것만이 신자의 참된 축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내 코가 석 자나 빠져있어서 분명히 힘들고 고달픈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함께 나눠지면 그 어려움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불신자들도 잘 알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자에겐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그것도 훨씬 더 큰 고난을 버려두고 이웃 성도는 물론 불신자의 훨씬 적은 고난을 덜어주고 나에게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주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신자에게 비로소 참 안식과 평강이 넘치도록 임합니다. 또 그럼으로써만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나태하거나 내 자신의 문제만 돌아보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꾸만 뒤틀림이, 속죄제를 드릴 일만 생길 뿐입니다.

 

9/9/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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