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6:22-27) 축도는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약성경강해 (14) / 민수기 강해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2-27)
아론의 축복 기도
한국 교회는 주일예배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의 마지막 인사인 고린도후서 13:13의 말씀대로 축도함으로써 마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목사님이 거룩하게 선포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합력하신 거룩한 통치가 성도들의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간의 삶에 임하기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 축도의 시초이자 구약성경의 근거가 바로 “아론의 축복 기도”라고 불리는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에선 여호와 한 분이나 그 내용(24-26절)을 살펴보면 고린도후서 13:13의 삼위 하나님의 사역과 일치합니다. 첫째로 여호와가 백성에게 복을 주고 지켜주길 바랐습니다.(24절) 세상만사의 통치는 성부 하나님이 행하시되 오직 그분의 사랑에 근거해서 이뤄집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얼굴이 백성에게 비춰지고 은혜를 주기를 바랐습니다.(25절) 얼굴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상징합니다. 은혜는 도무지 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과 공로가 없는데도 받는 공짜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줄 수 있는 의가 됩니다. 이는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얼굴을 백성들로 항함으로써 평화를 얻게 되기를 바랐습니다.(26절) 얼굴을 비추는 것은 동작으로 치면 일회성입니다. 예수를 믿어 회심하는 것은 과거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 반면에 향한다는 것의 원어의 뜻은 열정과 의지를 갖고 주시하면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의 내면에 지속적으로 역사하여야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는 제사장더러 이렇게 내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27절) 장차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여호와라는 이름 하나뿐이던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하나님으로 확장될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선포인가 기도인가?
그런데 너무나 익숙하고도 당연하며 은혜로우며 혹시라도 축도 없이 예배를 마치면 뭔가 빠진 것 같은 이 축도에도 몇 가지 따져볼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미국교회는 특별히 남침례교는 축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주일 예배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형식에 매여서 매번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은 순전한 신앙 고백이 아니어서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이가 그런 신앙의 단계에 도달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그날 예배한 내용에 맞추어서 일반적인 방식의 기도로 마칩니다.
둘째로 고린도후서 13:13대로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을찌어다”라고 선포하는 형식이 마치 목사가 복을 주는 양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선포 대신에 기도하는 형식으로 즉,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옵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혹은 축원합니다).”라고 바꿔서 행하는데 마찬가지로 침례교가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세 구절의 주체가 다 인간이 아닌 여호와 한 분이듯이 목사가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듯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대언한 것일 뿐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제사장적인 기도의 의미를 더 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 형식의 축도는 인간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겸손하고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선포의 형식은 구약백성들의 죄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뜻이 제사장의 축도이듯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죄 씻음과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실현되었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은 본문의 축도는 선포가 아닌 기도의 형식입니다. 본문 26절 끝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평강이 있을찌어다”가 아니라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의 고후 13:13도 우리말 번역의 어감이 선포처럼 여겨져도 사실은 기원입니다. 영어로 “Peace be with you.”에도 선포 외에 소원의 뜻이 있으며 실제로 영어 성경의 14절(영어성경 13절과 14절을 한국어 성경은 하나로 묶어 13절로 번역했지만) 마지막이 ‘아멘’으로 끝납니다.
목사의 공식적인 첫 업무
축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따로 하나 더 있습니다. 여호와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런 기도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23절) 레위 지파는 성막에서 직접 분향하며 제사를 담당하는 직분과 성막의 기타 잡다한 일에 봉사하는 직분으로 나눠졌는데 제사는 아론 가문만이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축도도 이 말씀대로 안수받은 목사만 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행하는 업무도 바로 축도입니다. 안수 예배에서 설교가 끝나고 목사 후보생을 강대상 중앙에 무릅 꿇게 해선 안수 위원으로 초대된 선배 목사들이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줍니다. 그 후에 교단에서 파송된 대표가 목사로 위임되었음을 선포하고 안수 예배를 마칩니다. 그 예배의 마지막 축도를 방금 안수례를 마친 목사 초년병이 맡아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제 공적 예배에서 축도할 자격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기록된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실 인 서약에 대한 계명들에 바로 이어서 하나님은 축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실 인의 서약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지파의 구분 없이 남자든 여자든 성인이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혹은 평생에 걸쳐 헌신할 수 있습니다.
평생 나실 인이었던 삼손은 단 지파였고,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헌신한 바울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누구나 목사로 서원할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 목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위치에서 축도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누가복음 1장에 흥미로운 기사가 나옵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중에 천사가 나타나 잉태하지 못하는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고지를 받자 사가랴는 벙어리가 됩니다. 그래서 성소 밖 성전 마당에서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본문의 제사장의 축도를 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태어날 아이에 대해 하나님 앞에 큰 자로 평생에 술을 먹지 말고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1:15) 평생을 나실 인으로 지내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침례 요한입니다.
침례 요한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면서 곧 천국이 도래할 것이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분은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며 자기는 그분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에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오신다고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다고 하면서 가장 먼저 메시아라고 확인했습니다. 자기는 쇠하여야 하고 주님의 나라는 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새 시대를 열어서 새사람으로 바꿔주고 모든 무릎을 당신의 거룩한 이름 아래 꿇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가 요한이 출생할 때까지 벙어리가 된 것은 제사장만 축도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는 뜻입니다. 또 아들 요한이 자기는 쇠하고 예수님의 나라가 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율법이 은혜의 시대로 바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침례를 명령하는 예수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마28:20) 이 명령이 열두 제자인 사도들 즉, 오늘날로 치면 목사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몇 명이 현장에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백이십여 명이 있었고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으로 장소를 옮겨서 기도한 것으로 여깁니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제자라고 칭했습니다. 또 제자들더러 제자로 삼으라고 했으니 열두 사도들에게 전도 받은 자들도 제자가 됩니다. 목사나 일반 신자나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지금 모든 신자에게 침례를 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실제로 빌립이 사마리아를 전도하면서 마술사 시몬에게 침례 주었습니다.(행8:13) 잘 알다시피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 간다게에게 이사야서 53장의 “수난 받는 종 메시아”에 대한 기사로 전도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자 근처의 강에서 침례를 주었습니다.(행8:38) 빌립이 누구입니까? 헬라파 유대인 집사 즉, 일반 신자입니다. 그럼 일반 신자가 침례를 줄 수 있는데 기도의 일종인 축도를 못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물론 공적 예배에선 그 예배를 인도 설교한 목사가 축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일반 신자도 공적 예배는 물론 일상적 삶에서 축도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이 예배 참석, 개인기도, 불신자 전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서약은 일시적으로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목사의 위치에 서서 교회에서 침례와 축도는 물론 설교와 예배까지 인도할 수 있습니다. 꼭 서원하지 않아도 빌립처럼 불신자들 앞에선 평생 나실 인의 신분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든 마르틴 루터도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했습니다. 야고보서 5:16에는 성도들끼리 서로의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사하는 기도를 해주어 병을 낫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죄 사함을 중보하는 제사장적인 직분을 신자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실 인의 서약 기간 동안에는 가족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럼 일반 신자도 대제사장처럼 자신의 평생 즉, 생명을 바쳐서라도 죄인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위치에 서야 하고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아닌 구약에서부터 가르치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생겼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설교하고 침례를 줄 수 있습니까? 줄 수 있도록 준비라도 합니까? 그러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습니까? 최대한 양보해서 오늘의 본문과 같은 기도라도 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성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와, 성자 하나님 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으로 평강이 상대에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나의 기도가 복을 전하는 통로요, 내가 그 일에 쓰임 받고 있음에 너무나 기뻐하고 자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남들한테는 쑥스러워서 그러지 못한다면 최소한 부부끼리 내 자식을 위해서는 그런 기도를 하십니까? 내 신앙 실력이 아니라 내 가정을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며 온전히 의탁합니까?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만의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왜 대답에 주저하십니까?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확신이 없다면 기도가 시간 낭비일 뿐으로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더러 홍해에서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게 하는 엄청난 기적으로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홍해를 건너자 전 백성이 자연스레 모여서 역사상 최대의 찬양 집회를 열었습니다.(출15장) 그 집회를 소고를 잡고서 앞에서 인도한 자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었습니다.(출15:20,21) 여자 일반성도임에도 일시적으로 목사의 위치에서 축도를 한 셈입니다.
미리암이 누구입니까? 히브리 남자 신생아는 전부 죽이라고 바로가 명령했습니다. 갖 태어난 젖먹이 남동생 모세를 살리려고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 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오는 시간과 장소를 미리 알았지만, 여전히 악어 떼가 있고 급류에 상자가 뒤집힐 수 있으며 공주가 발견해도 히브리 아이인 줄 알면 애굽 관원에게 넘길 수 있습니다.
제발 이 아이의 생명만 구해 달라고, 바로의 공주가 발견해서 긍휼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여호와께 빌고 또 빌었을 것입니다. 미리암의 나이도 아주 어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물에서 건져주셨고 그 뜻을 지닌 ‘모세스’라는 애굽 식 이름으로 평생 지내게 했습니다. 그 80년 뒤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물에서 건졌습니다.
미리암이 홍해를 걸어서 건너면서 틀림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감격의 눈물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저 동생의 목숨만 구해달라고 아주 미약하고 순진한 기도만 드렸을 뿐입니다. 자기도 혹시 발각되어 큰 곤욕을 치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너무나 연약한 기도에 응답하여 신생아 한 명의 목숨만 건진 것이 아니고 이백만 명의 목숨까지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이자 성도가 행하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녀가 어찌 맨 먼저 북치고 춤추며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최소한 85살이 넘은 할머니가 맨 앞에 나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 흘리며 찬양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맺어주는 열매는 감히 상상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며 은혜롭습니다. 지난 80년의 모든 시련 고통 슬픔 상처를 단번에 다 덥고도 남고,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쁨과 만족을 주십니다.
이런 신자의 찬양은 이스라엘이 나중에 애굽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술 마시고 음란하게 춤을 추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상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은 매일 먹고 마시며 쾌락에 잠겨 있으나 아무 열매도 없고 다음 날 아침에는 씁쓸하기만 합니다. 평생을 두고 갈급하고 허망하다가 그런 상태로 인생을 마감해버립니다.
바울의 극적 사고전환
바울은 또 어떻게 해서 본문의 제사장 기도를 27절의 말씀대로 여호와 대신에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의 축도로 바꿀 수 있었습니까? 자신의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에게 상상조차 못 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본문의 세 절의 주어가 모두 여호와이듯이 그는 여호와 유일신 사상에 철두철미한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주축이 된 적은 무리가 마찬가지로 시골 출신의 랍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받은 죽음으로 처형당했는데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황당한 이단 사설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절대로 그냥 두어선 안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한다고 믿고 열심히 그렇게 행했습니다.
또 그 일을 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삼 일간 시체와 방불하게 봉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민간요법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해도 사방으로 갇힌 흑암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아무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일반 신자인 아나니아가 멀리서부터 성령의 계시를 받고 찾아와서 간단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자 눈이 떠졌습니다.
바울로선 자신을 삼 일간 죽였다가 살린 이는 부활하신 예수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모든 이를 죄에서 구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이 천국 보좌로 올라가시고 대신에 오신 성령님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교통하여 평화를 주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가 계신다는 것은 유대교인으로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 사설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성자이심은 바울에겐 자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으로 인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유대 최고 율법 학자인 바울이 확립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세운 사도가 되었습니다. 또 자신은 의식하지 못 했지만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유언대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축도하는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신자 된 특권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대언자와 대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천국복음을 대신 전할 뿐 아니라 신자는 예수 믿고 침례 받을 때에 주님을 따라가기로 결단했으므로 삶으로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행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교리를 배워서 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순전히 전도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실제로 그 자리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와 계십니다. 당연히 그 결과도 엄청납니다. 미리암으로선 동생의 목숨만 구해달라는 기도가 응답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십 년 뒤에 모세를 예수와 버금가는 구약 최고의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아기 예수에게 결례를 하려고 성전에 들어갔더니 과부 된 지 84년이나 된 아셀 지파의, 레위 지파가 아닌, 여자로 일반성도인 안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84년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었는데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 기도가 응답 된 것을 확신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녀에게도 출애굽 때의 미리암과 같은 감격이 가슴 가득 찼었을 것이며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겨우 당장 급한 일만 붙들고 기도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나 영성이나 그 정도 수준입니다. 당장에 우리 바라는 대로 기도하고 또 그대로 응답 안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기뻐하시며, 그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따지면 우리가 죽은 후까지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천지를 움직일 만큼 응답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몰라도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그분의 뜻이 기도한 성도가 없어도 이 땅에서 실현됩니다.
응답을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상상도 못 하지만 우리가 기도한 것 이상으로, 아니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엄청난 권능과 영광을 장래에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도는 사실상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셈입니다. 진리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런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바울처럼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적 거듭남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교리를 몰랐고 성경도 아직 없었으며 주일 예배도 온전히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설교할 수 있었고, 기도와 전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예배, 침례, 축도, 교회는 훨씬 뒤에 생긴 것입니다.
신자 모두에게 거창하게 목사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대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예수님의 능한 손이 직접 그들의 심령을 터치합니다. 신자의 종교적 실력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라고 강요하거나 기도 형식을 가르치기 전에 부모부터 제사장적인 권능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몇십 년 뒤에 그 자녀에게 그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죽은 이후에도 신자의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가장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모습이 반드시 실현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심이 수호천사 정도가 아닙니다. 빌립 집사가 단순히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그 구절이 바로 예수라는 사람을 뜻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그 예수가 십자가에 주고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간단히 전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 나라의 재무 장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가슴이 먹먹해졌을 것입니다. 신자가 전하는 성경 말씀 그 자체로 다른 이의 인생을 완전히 전환 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불신자나 이웃에게 기도해줄 때는 내 감정과 욕심이 전혀 들어가지 않으니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이자 그분의 나실인입니다. 모든 남자 성도는 빌립이, 모든 여자 성도는 미리암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그렇게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12/16/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