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한 것을 무를 수 있는가요?
[질문]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하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값을 정할지니 그 값은 제사장이 정한 대로 될 것이며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레27:14,15)
하나님께 드린 것을 다시 무르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마치 헌금하고 다시 찾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답변]
많은 신자들이 서원에 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안 지키면 하나님의 큰 벌이 당연히 따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잠깐, 그것도 믿음이 연약한 청소년기에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서원은 얼마든지 변경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불필요한 죄책감만 유발합니다.
죄송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이 서원을 하라고 청소년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에게 강조하고 지키지 못하면 벌 받는다는 식으로 율법적 신앙을 주입시키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혹시라도 성도들을 교회 일에만 묶어두려는 의도로 강제 협박(?)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서원은 신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것입니다. 일단 서원을 했다면 최선을 다해 지키도록 노력은 해야 하지만 지키지 못했다고 벌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현실적인 상황이 도무지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 시일이 지나고 곰곰이 따져보니 자신이 받은 재능과 은사가 선교 쪽이 아님을 깨달으면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기에 다른 일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일류대학에 입학하겠다고 부모 앞에서 맹세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실력이 모자라 조금 떨어지는 대학에 입학했다고 칩시다. 그런데도 자식을 야단치는 부모라면 부모가 잘못입니다. 또 자식이 스스로 정한 전공을 나중에 바꾸는 것과 같은데 부모가 처음 전공을 바꾸었다고 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 부모도 이럴진대 하물며 당신 자녀들을 향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서원을 못 지켰다고 벌 줄 리는 만무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자발적으로 헌신한 것이 서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또 반대급부로 해주시는 일이 없기에 신자 쪽에서 나중에 변경 취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이것을 해주시면 저도 이것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서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주고받는 거래를 하려는 것으로 성경적으로 틀렸고 죄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1장)를 서원기도의 예로 드는데 그녀는 하나님과 거래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주시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으니 마치 조건을 내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들이 없는 것은 여인으로 큰 수치이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거기다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가 그녀를 자꾸 격동케 했기에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현실적으로 한나가 누리는 유익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간구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얻은 그 귀한 아들 사무엘을 젖 떼자마자 평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질문처럼 구약에 규정된 내용을 오늘날의 신자의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계시의 내용과 적용하는 방식이 시대별로 점진적으로 구체화되어 나갑니다. 결국 구약성경의 모든 계시는 신약성경에 의해 보완 완성 확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 이런 부분을 잘 가르쳐주지 않아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기록된 그대로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긴 해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서 하신 말씀이고 또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계시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어가는 과정 중의 계시라는 점을 주지해야만 합니다.
간단한 예로 구약은 노예제도나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것 같이 말하고 실제로 율법에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추고 인간들이 이미 그렇게 행하고 있기에 그런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도록 하는 일시적 조건적 규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두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수정 보완되고 또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과 통치 원리에 따라 판단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동일 주제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반드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 기준으로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마5:34) 하나님께 서원도 일종의 맹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형성할 때는 범사에 그분의 뜻과 인도에 따라 순종만 하면 됩니다.
서원은 아무리 자기가 결심하고 수행할지라도 장래의 일을 인간인 자기가 미리 확정짓는 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맹세는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함부로 맹세를 하지 말고 대신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약4:15)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서원은 주로 물건을 바치는 것으로 이뤄졌는데 하나님께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 생계에 큰 걱정 없이 제사장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그 용도로 백성들로 십일조를 바치고 제물 중에 일부를 제사장에게 돌아가도록 했지만 그대로 온전히 지켜졌을지는 지금이나 그 때나 의문입니다. 서원은 주로 제사장의 생계가 달렸으니 반드시 지키도록 했으나 점차 제사장 족속의 구분과 역할이 유명무실하게 되어졌고 예수님 당시는 회당에서 예배 보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물건이나 부동산으로 서원을 했는데 혹시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바치지 못할 때는 그것을 현금으로 환산해서 물리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속전(贖錢-벌을 면하고자 바치는 돈)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런 원리를 잘 몰라도 본문만 잘 읽으시면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문이 생기면 몇 번이고 천천히 뜻을 새겨가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뜻을 찾아보라는 것은 신자 본인의 의견, 선입관, 편견, 선지식 등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것들에 조금이라도 영향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성경 저자가 계시하고자 하는 의미를 중립적 객관적으로 추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네가 값을 정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서원을 완전히 취소하고 안 지켜도 된다고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무를 수 있는 것은 바치기로 한 부동산인 집입니다. 그리고 그 집의 시세에 1/5을 더 쳐서 처음 바치려 한 것의 120 %를 다시 드리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집이 여러 채 있어서 그 중에 하나를 드리려 서원했는데 다시 사용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돈으로 쳐서 무른 것입니다. 서원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꼭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일종의 위약금 내지 벌금까지 합쳐서 내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잘못을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라, 말로 형제를 모욕하지 말라, 등등 하나님이 직접 신자에게 명한 계명들을 솔직히 우리 모두는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일이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주님을 위해서 더욱 헌신하겠다고 한 서원을 미처 못 지켰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속이 좁고 인내심이 없으며 비정하고 율법적이며 강압적인 분이 아닙니다.
신자는 서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픈 열정으로 가득 차서 꼭 하고 싶다면 자기 형편에 맞추어서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반대급부를 조건부로 걸고 서원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순수하게 자신의 것을 바친다는 서원이어야 하되 자신은 어떻게 되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길 바라는 진심과 전심이 반드시 함께 따라야 합니다. 자기 이름이나 의를 높이려는 혹은 믿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서원이라면 하지 않느니 못합니다.
10/2/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