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2:1-10) 목사가 잘못하면 고소하라.

조회 수 53 추천 수 0 2019.04.16 10:47:34

(민12:1-10) 목사가 잘못하면 고소하라. 

구약성경강해(20) / 민수기강해(10)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민12:1-10)

 

하나님이 세운 종 목사

 

하나님은 모세와 동역할 70명의 영적지도자들을 세우면서 백성들에게 당신께서 인준하셨다는 증거로 당신의 신을 부어주어 예언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만으로 그치게 했는데 그 까닭은 만약 항상 그러면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모세의 지도자 자리를 시기 위협하는 자가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 염려했던 그런 사태가 당장 가족 안에서부터 그것도 여호와께서 신을 거두어 가서 예언을 중지한 후에 일어났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대놓고 모세에게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불만의 초점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모세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더러 독선적 강압적 지도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가 ‘갑자기’ 그 세 명을 소집합니다.(4절) 갑자기 소집한 것은 그만큼 격노하셨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누나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는 벌을 내렸고, 나중에 형 아론의 간청으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여서 낫게 해주었습니다.(13절)

 

그래서 이 기사를 민수기 16장의 고라당의 반역사건과 함께 목사는 하나님이 세운 종이므로 거역하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다는 성경적 근거로 종종 제시됩니다. 그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목사가 교인들을 속인 것이니 겁을 먹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가르침에 결정적 하자가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모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거역했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목사로서 자격이 없고 알고도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누락했다면 오히려 그렇게 가르친 목사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만성질병이 있어서 운동을 하지 못하는 청년을 그 체격만 보고는 허우대가 멀쩡하면서 게으르다고 비방하는 꼴입니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은 깡그리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강조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목사가 성도를 어린아이 취급했습니다. 성도의 성장을 목사가 바라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한 것입니다.

 

장로에 대한 고소를 받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라고 명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오늘날의 목사와 가장 유사한 직분이 장로입니다. 우리말로 목사라는 명칭은 에베소서 4:11에 유일하게 나오지만 그 구절에서의 뜻은 목양하는 자로 오히려 오늘날의 장로에 더 가깝습니다. 장로교에선 그래서 목사를 장로 중의 한 명이라고 간주합니다.

 

장로 즉, 목사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우월한 특권이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모든 송사에는 반드시 증인이 두세 명 이상 있어야만 합니다. 특별히 장로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한 것은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인지라 그만큼 교인들에게 영향력이 크므로 그 소송을 신중히 취급하여서 확실한 잘못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목사에 대해선 함부로 증언을 서기가 주저되는데도 두세 명의 증인이 나설 만큼 확실한 잘못이 있다면 송사를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교회 분쟁은 송사하지 말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고린도 전서 6장은 지금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교인들 스스로 잘잘못을 얼마든지 가릴 수 있는데 왜 세상에 맡기느냐는 뜻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데 왜 거꾸로 세상의 판단을 받느냐고 야단치는 내용입니다. 디모데전서는 이미 두세 명이 증언을 설만큼 잘못이 확연한 것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 부끄럽게도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실정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이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장로들을 회막에 소집했는데 메닷과 엘닷이 거역했지만 모세와 하나님은 용서 포용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도자를 거역해도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과, 분명히 잘못했음에도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사랑과 뜻에 비추어 더더욱 지도자로서 그분과 성도들 앞에 겸손해지겠다고 결단 헌신하는 사람, 둘입니다.

 

그 사건에 바로 이어서 본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론과 미리암은 첫 번째의 부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만약 메닷과 엘닷에게 큰 벌을 내렸다면 아론과 미리암도 쉽사리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이 그럴 정도라면 대부분의 사람들도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은 좋게 말로 타일러선 들어먹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일차적으로 가족들 사이에 그랬기에 성도들이 목사에게 거역하는 것과 성격이 다릅니다. 나아가 아론과 미리암은 에닷과 멜닷처럼 이미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선지자 내지 영적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담임목사와 부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 사이의 다툼입니다.

 

본문을 갖고 목사를 거역하면 벌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담임 목사만 되면 부교역자들을 시쳇말로 “졸(卒)로 본다.”는 반증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여호와가 우리와도 말씀하셨다고 따진 것은 우리도 사역자이므로 모세 네 혼자 담임 목사직을 독점하지 말고 함께 나누자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건의 발단과 경위

 

가족이라면 모세의 사역을 말없이 뒤에서 적극 후원해주어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성경에 대한 질문은 성경 안에서,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바로 본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을 성경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절) 모세의 본처는 십보라인데 출애굽 직후에 모세와 다시 상봉한 것을 끝으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이전에 모세는 상처하고 구스 여자를 후처로 들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 쳐도 당시로는 일부다처제가 허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본처 사라에게서 난 이삭과, 자기 몸에서 후손을 얻으려고 시도하여 애굽 여종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 두 아들뿐인 줄 흔히 알고 있습니다. 역대상 1:32에는 첩 그두라를 두었고 그에게서 아들 여섯 명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방 여인과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통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상숭배의 죄악과 이방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려는 예방 조처였을 뿐입니다. 모세의 본처 십보라부터 이미 이방의 미디안 여인이었습니다.

 

만약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정말로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여겼을 것 같으면 “왜 우리와 의논도 하지 않고 재혼했느냐? 그 여자는 이런 저런 하자가 있지 않느냐? 이왕이면 히브리 여인을 취하지 왜 이방 여인을 취했느냐?”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여호와가 우리와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기도해봤더니 이번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모세를 진정으로 염려해서 하는 말이므로 그 후의 하나님의 반응이 그렇게 진노할 이유도 없습니다. 평소에 모세에게 잔뜩 불만이 쌓였다가 구스 여자를 빌미로 폭발시킨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모세에게 야단은커녕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편애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말로 명해서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명했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을 쳤다고 필생의 꿈이었던 가나안 땅의 입경하지 못하는 벌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경우에도 불완전하지 않고 지도자들에겐 더 엄격히 적용하십니다. 분문에서도 아론과 미리암을 갑자기 소집해서 야단치고 벌을 내렸지 않습니까?

 

반면에 모세에게는 모든 사람 중에 최고로 온유하다고 칭찬을 해줍니다.(3절) 형이나 누나에게 고분고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동안 모세의 행적도 그렇지 않습니다. 애굽인이 동족을 학대하자 격분해서 살인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에겐 다섯 번이나 따지고 들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음란하게 섬기자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새겨준 두 돌 판을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던져서 깨트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석에 말로 명하지 않고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습니다.

 

본문에서 온유하다는 표현이 온순하고 오래 많이 참고 차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져 고삐와 재갈이 물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속에는 열정과 힘이 엄청나지만 겉으로는 절제하는 성품을 말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8절에서 모세와는 직접 대면해서 말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모세가 당신이 대면해서 이야기 한 것들에게 전혀 토를 달지 않고 순전하게 충성 순종한다는 것이 바로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불평을 터트린 아론과 미리암은 전혀 온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상징적 계시와 직접적 대화

 

아론과 미리암의 여호와가 우리와도 이야기했다는 불평에 대해 정작 하나님은 너희와는 이상과 꿈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확한 문장으로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징적 묵시적으로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확신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모세는 그렇게 은밀히 말하지 않고 명백하게 대면해서 육하원칙에 따라 문장으로 정확히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모세 또한 그대로 대언 대행했기에 모세가 행한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호와는 그 두 사람에게 “모세의 지시를 받을 때에 너희가 꿈과 이상으로 받아 짐작만 했던 내용과 일치하고 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지 않느냐? 한 번이라도 모순 상충 된 적이 있다면 말해 보라”고 추궁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너희의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너희가 모세더러 네 멋대로 한다고 불평했지만 너희가 오히려 모세보다 더 멋대로 하지 않느냐”고 야단친 셈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한 번도 제 멋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히 인식하여 그분 말씀을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일에는 세상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기에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심지어 모세를 당신의 형상을 보는 자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칭찬으로 새겨볼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중에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단지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을 뿐이지 그분 형상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일차적인 뜻은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과 일대일로 개인적이고 가시적인 대면을 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시고 반드시 당신의 영광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영광을 모세가 가장 먼저 확인하고 그 은혜를 절감하여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리게 됩니다. 목사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고 완전하기에 정확하게만 풀어내면 가장 먼저 본인에게 가장 많은 은혜가 임합니다. 또 그런 후에 그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아론과 미리암 너희들도 이미 목격했지 않느냐? 애굽에서의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반석에서 생수를 내는 일과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었던 일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릴 때에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나의 형상을 실현한 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는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동일한 불만을 표한 아론은 벌을 주지 않고 미리암에게만 문둥병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남녀를 차별한 뜻은 전혀 없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자로서 그 모든 이적에 참여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어떻게 교통 헌신 순종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만약 그가 모세를 실제로 시기 질투하여 불평했다면 틀림없이 그부터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미리암이 먼저 아주 세게 시기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여성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에 구스 여자 일로 비위가 상하자 그 동안 속에 꾹 담아두었던 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에 대한 시기가 훨씬 약했거나 단순히 미리암을 달래느라 동조했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지금은 대제사장제도를 막 설립한 때로 아론이 초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스스로 속죄제를 지내면 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직접 벌을 내리면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중보하는 역할의 권위가 아무래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고달픈 최고 지도자

 

이렇게 본 사건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살피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의 일생이 참 고독하고 개인적인 안식을 누릴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평을 하므로 혼자선 업무를 감당할 수 없어서 백부장 천부장 제도를 만들고 70명의 장로를 세웠습니다. 이제 아내가 없어서 너무 외롭고 쓸쓸해 구스 여자를 취했는데도 가족마저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바로의 궁정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80년간 침묵하여 고뇌 갈등한 것보다 동족과 가족에게서 당하는 시달림이 더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영적인 지도자, 그것도 최고 대표되는 자라면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죄에 찌들어 있습니다. 신자가 되어도 연약하고 시기질투가 많고 아무 쓸 데 없는 자존심 덩어리입니다. 교회 안에도 죄악과 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모세 같은 영적지도자는 그 모든 갈등과 분쟁 와중에 혼자 서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로 부름 받은 뜻이자 소명입니다. 지금 성경이 부목사, 중간지도자, 가족들 간의 시기 다툼을 기록하고 있듯이 가장 가까이서 자기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마저 등을 돌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신자들이 결코 목사를 쉽게 추종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모든 비방 시기 멸시를 감당하며 혼자서 쓸쓸히 걸어가야만 합니다.

 

지금 목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따르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숙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신자들마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그 반대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순전하게 따르면 오히려 반발이 따릅니다. 그래도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생명을 걸고 그에 따라 살고 죽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구체적으로 계시를 받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없고 조금 부족하게 헌신해도 되지 않는가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성경 66권에 하나님의 뜻이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본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모세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즉 다른 세대의 신자들에게까지 미치는 뜻은 구체적으로 몰랐을 것입니다. 우린 성경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더 정확히 풀어서 더 잘 가르쳐야만 합니다.

 

예컨대 당장에 성경에는 목사를 거역하면 하나님이 벌을 준다는 그런 말이 없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오히려 디모데전서에는 목사를 고발해도 된다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법정이 아니라 교인들의 총회에 먼저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왜곡해서 신자를 협박하는 잘못을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는 목사를 대적하면 그 때는 하나님이 벌을 반드시 주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목사를 거역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했기에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를 거역해서 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했기 때문이듯이 말입니다.

 

목사라면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최소한도 내가 혹시라도 잘못하면 언제든지 나를 고소하라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목사에게 거역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는 유치하고 비겁한 협박을 할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나아가 목사는 자기를 반대 거역하는 부교역자들을 모세가 그랬듯이 용서하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사역에 더 헌신할 수 있도록 자꾸 격려하며 더 많이 세워주어야 합니다.

 

신자가 목사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지금 일부 목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치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목사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고소를 하라고 하는데 그럼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목사 이상으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최소한 목사와 같은 레벨이 되지 않으면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목사와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면 목사가 가르치는 그 잘못에 동참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럼 목사가 먼저 더 엄중한 벌을 먼저 받겠지만 그런 목사를 추종한 신자들도 그 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일부 한국교회의 현재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동일한 잘못에 대해서 크게 꾸짖었습니다. 마태복음 23:13절 이후에 보면 그들은 교인 한 명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나 막상 하나님의 진리는 가르치지 않기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교인들뿐 아니라 자기들도 들어가지 못하니 화 있을찐저라고 야단쳤습니다. 주님께 야단맞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 문이 닫혔으니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을 연구하는 일은 전임 사역자인 목사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모세처럼 은밀히 아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일반 신자는 아론과 미리암처럼 이상이나 꿈에 신경을 더 쓰고 아무래도 애매모호하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에게 성경에 관한 질문을 퍼붓고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써야 합니다. 교회 안에 성경공부 모임을 많이 개설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은 신자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자습할 수 있는 자료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지난주 결론이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 모두가 당신의 신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길 원한다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신자 모두 성경을 연구하여 목사처럼 되라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사의 책임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엄중히 책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게을러서, 그보다는 성경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열망 아니 소망조차 없었던 큰 잘못을 그분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벌을 받는 것은 사실상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한번 고난을 겪고 나면 끝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벌입니다. 초자연적 기적을 맛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얻을 하나님이 맺어주는 열매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의 보물이 이 땅의 자기 인생에 옮겨져 심어지는 일을 평생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의무적 형식적으로 주일 성수만 하여 하나님의 벌만 받지 않으려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으로 시종될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가시적으로 실현됩니다. 신앙으로 세상과 죄악과 사탄에게는 당연히 승리해야 하고 또 자기 인생에서도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이 목사를 거역하면 큰 벌 받는다는 엉터리 가르침을 분별하여서 겁먹지 마십시오.

 

대신에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사는 배로 존경하여야 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그렇게 하라는 것이고 그럼 목사도 존경하게 됩니다. 신자와 목사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신자들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명을 걸고 그 말씀으로만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3/3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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