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1,2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가라.

조회 수 396 추천 수 22 2011.01.01 03: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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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가라.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출4:1,2)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 출애굽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 무례할 정도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소명 받기를 거듭 주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할”(14절) 정도였습니다. 우리 같이 믿음이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다면 두려워서라도 그 자리에 납작 꿇어 엎드려 그저 예라고 답했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온전히 순종치 못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으로만 예, 예라고 답할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는 결코 큰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 같이 당신께 온갖 의문과 불만 등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따지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니 그런 자라야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또 그분을 더 깊이 아는 자만이 그분의 일에 기꺼이 순종, 충성,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모세로선 소명을 사양하거나 하나님께 따지고 싶었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명을 거푸 사양할 때마다 각각의 구체적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럼 본문에서 모세가 내세웠던 핑계 내지 불만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들이 자기를 잘 믿지 않을 테니까 여호와를 만난 증거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못하리라는 근거는 또 무엇이었습니까? 양치기 노인이 갑자기 구원자라고 나서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전에 모세 스스로 백성들의 구원자로 나섰다가 오히려 배척당했기 때문입니다.

동족들의 다툼을 중재하려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2:14)는 비야낭만 들었습니다. 그 전날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관원을 죽여서 동족들의 환심을 크게 샀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로선 바로의 왕자라는 신분과 권력을 이용해 뭔가 동족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작정했겠지만 백성들이 볼 때는 그는 단지 비단 옷을 입고서 궁에서 호의호식하는 팔자 좋은 사람에 불과했건 것입니다.

모세가 다시 구원자로 그들 앞에 나서면 분명 과거 그 일을 기억하리라 염려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처절하게 실패했던 과거 경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불신도 문제지만 실패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겸손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의 모세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80이 되도록 들판에서 양떼나 치고 있었습니다. 인생 초반 40년의 바로의 궁에서 화려했던 기억은 까마득 잊었고, 중반 40년은 회한(悔恨)에 파묻혀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육신적 혈통인 이스라엘과 사회적 배경인 애굽 양쪽에서 배척당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자기와 무관한 제 삼의 종족과 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앞으로 한 발자국도 못 디디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그곳에서의 탈출은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전후좌우가 완전히 꽉 막힌 꼴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형편에 하나님이 그 척박한 광야의 산기슭까지 먼저 찾아오셔서 아무 풍채 없는 덤불에 거룩한 불꽃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사적으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는 일을 시작하려는 참이었지만, 모세 개인으로 보면 과거의 실패에 묶인 자를 풀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소망이라곤 없던 자에게 단 한쪽 뚫려 있는 방향인 위로부터 그가 있는 곳까지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모세는 현실적으로 사방이 막혔기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간구할 수밖에, 아마 거의 의심과 불만만 털어놓았겠지만, 없었을 것입니다. 땅에서 모세가 한숨짓는 소리를 하늘에서 하나님이 들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거하여 오직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에게 묶였던 과거의 멍에를 벗기고 새로운 소망의 미래로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흑암 속에서 세상과 죄악과 사망에 묶여서 도저히 하늘과 의와 생명 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디디는 자의 손을 이끌고 빛 가운데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신자란 그래서 어두웠던 과거의 굴레는 완전히 벗어버리고 오로지  밝은 소망을 향해 앞으로만 걸어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라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빛 가운데 이미 들어섰다 해도 신자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있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향해서 아름답고도 거룩한 행보를 매일 한 발자국, 아니 반 자국이라도 반드시 내디뎌야 합니다. 설령 넘어져 있어도 그분의 손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자꾸만 과거의 실패에 연연합니다. 바울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려 해도(빌3:13) 현실에선 전혀 그러지 못합니다. 쟁기를 잡고도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주님의 경고(눅9:62)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소명을 주시더라도 모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극적인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서 큰 이적을 한번만 일으켜 주시면 그와는 달리 당장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80년의 실패는 훌훌 벗어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도 다섯 번이나 하나님께 반문하다가 결국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우리의 핑계도, 특별히 하나님 앞에선 더더욱 끝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믿음이 견고한 자라도 과거의 쓰라렸던 실패를 벗어버리기가 결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일을 잊지 못한 상태에선 바울처럼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모든 사람이 착각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과거를 먹고 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시간적으로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든 지정의로 감지, 인식하면 이미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단 일초, 아니 백만분의 일초도 멈추지 않고 미래에서부터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인간이 지체시킬 수도, 붙들 수도 없습니다. 뭐가 지나갔는지 잠시 되돌아볼 틈도 전혀 주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먼 미래에서부터 먼 과거로 달음질해버리는 한정된 시간의 한 폭(幅)일뿐입니다. 사람마다 이 땅의 어떤 시공간을 점유하느냐만 다릅니다.  

과거를 버릴 수도 없고, 아니 실제로는 과거를 먹고 사는 인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거를 무조건 잊어버리려 하지 말고 나빴던 과거를 좋은 과거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되돌아보기 너무나 싫었던 과거 대신에 이제는 되돌아볼수록 입가에 넌지시 미소가 머금어지는 그런 과거들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예컨대 믿고 난 후에 죄책감으로 아주 괴로워하는 자들을 가끔 봅니다. 이전에는 죄책감과 거의 상관없이 살았는데 이젠 작은 일에도 자꾸만 부정적 감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드는 것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죄에 민감해지고 나아가 죄가 더럽고 추해서 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계속 묶여 있다면 문제지만 죄를 더 많이 더 세밀히 깨달을수록 더 깨끗하게 씻어내는 쪽으로 가면 됩니다. 회상하기 싫었던 과거 대신에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는 첫걸음이 바로 죄책감이며, 그 또한 신자에게 내주하는 성령님이 주시는 영적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죄에 둔감했습니다. 거꾸로 말해 거룩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죄에 아주 예민해집니다. 거룩에의 관심이 대폭 증가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죄에 완전 무감각했고 나아가 오히려 좋다고 여기며 즐겼던 과거를 씻어서, 거룩에 무감각하지 않는 나아가 거룩이 너무 좋아서 거룩으로만 향해 걸어가는 과거를 만들어 가는 싸움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기를 여전히 믿지 못할 동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모세의 핑계에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손때 묻은 낡은 지팡이에 주목하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물론 그 일차적인 의미는 이적을 일으켜 그에게 소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또 앞으로 그 지팡이로 온갖 이적을 일으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연히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숨겨진 뜻이 처참했던 과거 실패를 씻어달라는 갓이었기에, 하나님도 그에 맞추어 대답한 것입니다. 네 과거는 절대 실패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단지 기적만 불러오는 권능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항상 임재하고 있다는 표식이었습니다. 모세의 과거에도 함께 했었고 현재도 함께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보장이었습니다. 특별히 바로의 궁정에서 화려하게 살 때는 그 지팡이가 없었지만 처절한 실패와 회한의 세월을 보낼 때에는 오히려 더 가까이서 함께 했다는 의미입니다. 양치기는 누워 잘 때도 지팡이를 바로 곁에 두지 않습니까?

어두웠던 과거가 없었다면 새로운 과거가 얼마나, 왜 밝은지 전혀 모릅니다. 과거의 실패야 말로 미래의 소망으로 가는 디딤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의심, 불만으로 지샜던 미디안 광야의 40년간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현현(顯現)하셔서 큰 소명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두운 과거를 새로운 과거로 대체시켜 주는 작업을 그분이 시작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어두웠던 과거라고 해서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로의 궁정에서도, 미디안 광야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했던 과거를 부인하면, 아무리 힘들고 쓰라리며 이해가 되지 않아 정말 통한의 실패로만 여겨졌다 해도, 하나님 그분을 부인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도리어 바로 이 자리까지 이르게 만드는 필수 과정이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모세의 경우는 실제로 애굽의 왕자 40년은 출애굽시에 바로와 일대일로 맞상대하고, 또 양치기 40년은 홍해를 건넌 후 광야를 횡단하기 위한 사전 훈련이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어두웠던 과거 대신에 새로운 과거를 쌓아나가려면 가장 먼저 지난 모든 세월부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신비하고도 풍성한 사랑과 권능으로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해 연단, 준비시킨 은혜의 세월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바로 그래서 지금 혹시 큰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 해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새로운 과거의 신비스런 영광을 위한 필수적인 여정임에 전혀 의심치 않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이미 빛 가운데 들어섰어도 즉, 영생을 완전히 확보하여 그 취소란 절대 없어도 한 자리에 멈추어 서있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현실의 고난 가운데 한없이 실망하고 있다면, 사실은 그것이 밝은 미래를 향한 필수 여정임을 모르고서 의심과 불만으로 차있다면, 더더욱 안타까워하십니다.

아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더 간절히 원하는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왜 어두운 과거에, 이미 지난 일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을 말함, 묶여 있습니까? (인생의 모든 순간이 사실 과거임을 잊지 말아야 함) 과거는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아름답고 거룩하게 말입니다.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주인은 오직 그분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이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바로 “앞서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12/7/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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