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38)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모세가 그의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출18:13-22)

 

모세도 몰랐던(?) 행정제도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의 첫 번째 대적인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후에 모세의 장인이자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그동안 떨어져 있던 모세의 가족을 데리고 찾아왔다. 모세는 출애굽의 모든 경과를 이드로와 나누었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며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를 드렸다.(1-12절) 시간 관계상 생략한 본문 앞부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드로가 모세를 보니 이백 만이나 되는 이스라엘의 모든 분쟁을 혼자 도맡아 일일이 재판을 하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가 백부장 천부장 제도를 권면했고 모세가 그대로 수용했다. 비로소 이스라엘의 국가행정 체계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정작 있었어야 하는 제도로 때 늦은 감이 있다. 그 동안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해 그럴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왕자로 40년을 지냈다. 애굽의 행정은 세계에서 최고다. 유목민으로 낙타를 타고 장사하는 변방의 민족 미디안도 수행하는 제도를 모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왜 그랬을까?

 

모세는 지금껏 동족을 상대해보니 그들의 영적 상태는 물론 정신 건강이 너무나 한심함을 알게 된 것이다. 사백 년간 노예 살이 타성에 묶이고 패배의식에 젖어서 매사에 의심 불평했다. 하나님의 권능을 불신했고 기록에는 없지만 우상숭배에 빠졌든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음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로선 당분간 자기가 직접 가르치고 이끌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물론 애굽은 히브리인들에게 상당한 자치제를 허용했다. 이미 장로를 비롯한 중간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한국처럼 지배국에 협조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애굽에서의 기존 체계를 새로 건설할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세울 수 는 없다. 어쩌면 백성들이 이미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했거나 멸시 천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는데 분쟁을(?)

 

모세가 혼자서 그 많은 일을 감당했다는 것보다 사실은 이스라엘에 분쟁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고난이 닥치면 한국의 IMF 때처럼 한 마음이 되어 외부의 대적을 물리친다. 그래서 아말렉 전투에 승리했다.

 

모세의 가족이 찾아왔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이 없고 평온을 되찾아 정상생활로 회복했다는 뜻이다. 외부의 어려움이 없으면 내부의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각자가 자존심을 세우기 바빠진다.

 

이스라엘은 지금 소유한 부동산이 없다. 국가가 세워지기 전이라 직책을 가진 자도 없다. 가나안으로 진군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여행하는 중이라 생업을 유지할 활동을 하지 않는다. 먹고 마실 것도 하나님이 다 마련해주고 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오래 전 폴 뉴만이 주연한 엑소더스(Exodus)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차 대전 후에 터키가 점령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을 연합국이 되찾아서 이스라엘 국가로 세워주기로 유엔에서 결의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유대 땅 본토로 돌아왔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당신의 백성들이 천지사방에서 예루살렘의 고토로 돌아오리라는 예언이 실제로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 며칠간의 항해 중에 배 안에서 서로 싸우는 꼴이다. 엑소더스 영화에선 이천 년 만에 나라를 되찾는데도 말이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은 사백 년 만에 애굽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싸우고 있다.

 

남녀 간에 삼각관계가 생기고, 돈 거래를 하다가 약속을 어기고, 가벼운 말싸움이 원수로 바뀌고, 자기 자랑하는 자가 꼴 보기 싫어 아예 상대하지 않는 문제들로 언제든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죄송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다. 애굽에서 들고 나온 은금 패물을 두고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도 많았을 것이다.

 

하나님 일의 최고 방해

 

모세 혼자서 산더미 같은 소송 파일에 파묻혀 있다. 인간은 당장의 특정한 직무, 사건, 환경, 사람에 관심이 집중되면 좀체 그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에마저 완전히 까막눈이 될 수 있다.

 

비유컨대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는 끙끙대며 궁리해도 못 찾는 묘수를 TV로 시청하는 아마추어 몇 급이 간단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실력이 더 좋아서가 결코 아니다. 대국자는 승리가 목적으로 상금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앞서서 그렇다. 제 삼자는 승패와 무관하기에 게임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쉽게 말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과 아닌 것의 차이다.

 

모세는 동족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게 하는 것이 일생의 소명이었다. 그래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자기 전부를,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을 감수했다. 이스라엘로 믿음을 키워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의욕에 불타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나 목회자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에 빠진 셈이다. 그 목표와 동기는 아주 선하고 의롭다. 최선을 다해 그 일에 헌신한다. 상당한 업적과 열매도 맺는다.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다. 그러니 자기가 아주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도취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더 완벽하고 오묘하고 풍성한 주권적 섭리가 있음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잘하고 있고 반드시 자기가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려는 열정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최고로 방해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유감스럽게도 작금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가 그렇다.

 

이드로의 제안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다. 모세도 애굽에서 익히 교육받고 실행했던 제도인지라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장인이나 미디안 제사장이라는 입장과 상관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모세는 응당 자기가 할 바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점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는가?

 

장정이 60만 명이면 백부장이 6천 명, 천부장이 6백 명이다. 방금 전까지 서로 자존심을 다투었다. 여호와께 불평하기 일쑤였던 사람들이다. 중간관리자들의 선임에 불만을 품고 서로 시기하고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모세가 출애굽 시킨 권능이 대단해서인가? 자기들 중에 기도를 가장 많이 하고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인정한 것인가? 그런 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나 정작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불평분자를 색출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가장 먼저 모세가 바로와 첫 대면 하여 출애굽을 요청했더니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하느냐며 문전 박대를 하곤 이스라엘의 노역을 몇 배로 강화했다. 그러자 애굽이 세운 이스라엘 패장들이 모세에게 여호와가 너희에게 벌주길 원한다면서 저주의 신탁까지 했다.(출5:21)

 

출애굽한 후에 광야로 우회하는 바람에 홍해가 가로 막았고, 마라의 쓴물을 만났고, 신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었으며, 르비딤에선 마실 물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은 계속 모세에게 원망했다.

 

어느 사회이고 정치적으로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이스라엘에도 사사건건 모세에게 불평하는 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중간에서 눈치만 보는 자들과, 말을 하지 않지만 모세를 지지하며 하나님께 순응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이백만 명 전부가 다 하나님께 원망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 만나를 욕심을 내어 이틀 치를 거두었다가 썩게 만드는 사람들도 속출했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 중에 믿음이 없는 불평분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진행한 것이다. 성경이 지겹도록 이스라엘이 원망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배경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벌을 주려고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가 분별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마지막 아말렉 전투에선 살펴본 대로 모세가 전투에 참여할 자를 택했다.(출17:9) 단순히 육체가 강건한 자를 뽑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동안 원망이 입에 붙은 자들은 제외한 것이다. 기꺼이 자원하여 믿음으로 헌신하는 자를 택했다. 그 전투 과정에서도 여호수아의 지휘에 순종하며 지혜롭고도 용맹이 뛰어난 자들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 동안 원망을 않고 묵묵히 침묵하고 있던 다수 중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당신의 남은 자를 두신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누가 반드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 모든 백성으로 알게 해주었다. 이드로가 능력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불의의 이익을 미워하는 자가 누구인지 살피라고 조언했다.(21절) 그 전에 사실상 이미 그런 자가 누구인지 다 판명 난 셈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하고 정말로 두렵지 않은가? 이스라엘이 자기들 생각과 감정과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가만 내버려두셨다. 대신에 수시로 고난을 허용했다가 원망하면 바로바로 해결해주셨다. 인간의 눈에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함께 세울 동역자들을 선별하고 계셨다.

 

그러는 사이에 믿음이 없어서 불평만 일삼은 자들을 자연히 도태되게끔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의 공의를 당신께서 반드시 세우신다. 대신에 숨겨진 참된 일군들은 반드시 보상을 하신다. 은밀하게 선을 행하는 자 은밀하게 보상하신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아무 것도 모르고 침묵 부재하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성격 기질 성품까지도 알뿐만 아니라 그분이 교정까지 해주신다.

 

멘토(mentor)를 붙여 주시는 하나님

 

출애굽 초기에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자는 모세 혼자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봐도 너무나 비겁하고 완악했다. 그래도 그 중에 하나님이 택하여서 남겨 둔 자들을 모세가 아닌 하나님이 지도자로 양성하고 제자훈련을 시켰다.

 

그분의 일을 종교적 의무로 감당시킨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반드시 망하게 하신 것이다. 반면에 순전한 믿음이 있는 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흥하게 하신 것뿐이다. 그 흥하게 하는 방식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것이 항상 문제가 되긴 하지만 정말로 그분을 순전히 따르는 자는 반드시 보상하신다.

 

모세는 당장 산더미 같이 쌓인 일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통치를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너무 뻔히 보였던 것이다.

 

이드로의 충고는 그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 바둑을 대국하는 자리에서 잠시 제 삼자의 입장으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일을 나눠서 하라는 충고는 지금 자기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생각을 180도 바꾸라는 뜻이다. 그 당사자가 한참 그 일을 하고 있는 중에는 불가능하다. 잠시 그런 틀에서 떠나 틀 밖에서 보아야만 가능하다.

 

이드로는 모세에게서 출애굽의 모든 과정에 대한 상세한 간증을 들었다.(출18:8) 그래서 기록에는 없지만 이런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그 일을 네가 계획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는 막연히 소망만 했고 나이 80이 되자 거의 포기했었지 않느냐? 하나님이 주도적 능동적으로 이끌지 않았느냐? 출애굽에서 네 힘은 물론 네 지혜는 한 치도 개입하지 않았지 않느냐? 너는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하나님에게 전했고, 또 하나님이 지팡이를 들어서 치라고 하며 치고 흔들라면 흔들었을 뿐이지 않느냐? 왜 지금 와선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하느냐?” 아니면 모세 스스로 성령의 간섭으로 그렇게 깨달았을 것이다.

 

모세는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재판하는 일을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 알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성장과 그분 나라 의 건설을 지체하게 만드는 죄인 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앞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가 도와주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여 승리했다는 점에도 생각이 미쳤다. 아말렉과의 전투 때에 하나님은 동역자와 기도의 후원자를 붙여 주셨다면 지금은 모세에게 멘토(mentor)를 붙여 주신 셈이다. 그것도 모세가 계획도 의도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멀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분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두말할 것도 없고 모세보다 항상 한 발, 아니 몇 발자국 앞서 가고 있지 않는가? 모세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우린 모세의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스라엘처럼 별 것 아닌데도 그저 염려만 한다. 자존심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성도는 물론 가족과도 다툰다. 하나님은 그 각각의 잘잘못에 비추어 반드시 보응하신다. 우리가 생각해도 부끄럽고 비겁하고 연약한 믿음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쨌든 당신을 믿고 의지하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기뻐하신다. 나아가 우리보다 몇 발 앞서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을 예비해놓으셨다. 그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는 체험을 해야 한다. 최소한 그런 진리를 알고는 있어야 한다.

 

본문과 짝이 되는 사건이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나온다. 사도들이 과부들을 공궤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진했다. 결국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두에게 신실하다고 인정받는 일곱 집사를 임명했다. 사도는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출애굽 본문 18장 뒤에 이어지는 19장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올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장 갱신했다. 율법을 수여하고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세울 당신의 나라에 청사진을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애굽과 아말렉을 거치며 온갖 기적과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고 특별히 그렇게 원망을 했음에도 아무런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순순히 다 들어주셨다.

 

그런 하나님의 긍휼 자체가 그분이 주시는 참된 복이 아니다. 시내 산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여호와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분명히 각인시키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율법과 그 계명들을 자원해서 따르고 싶은 마음 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한 번도 큰 벌을 주지 않은 것도 겁을 주어 의무감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제대로 알아 기꺼이 따르는 자에게만 당신의 일을 맡기려는 계획이었다.

 

옥석을 가려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정확히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기 원하셨다. 지금 권세에서 차별이 되는 계급제도를 제정한 것이 아니다. 그 맡은 역할과 기능으로만 구별되는 직분자들을 세운 것이다.

 

부끄럽게도 겨우 몇 명의 장로를 세우는 일로 이민 교회들은 쪼개지기까지 한다. 이스라엘이 그 많은 지도자들을 세우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옥석(玉石)을 가리는 작업을 이미 다 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하자마자 혹은 아말렉 전투 전에 모세가 천부장과 백부장을 선별했다면 틀림없이 불평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전쟁을 쳐보지도 못했거나 전쟁을 해도 또 다시 패배의식에 젖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예 눈코 뜰 사이 없이 힘든 일을 겪게 했고 얼떨결에 아말렉과 전투를 치르게 했다.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당신의 일을 진행시킨 것이 아니다. 믿음이 강하고 약한 것이, 정확히 말해 믿음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언제 드러나는가? 답은 간단하다. 고난 중이다.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는지 보면 된다. 고난 중에는 그 인간성, 자질, 성품까지 완전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거기다 지금 모세가 지도자 전부를 선출한 것이 아니다. 모세 혼자 이백만 명의 신상을 어떻게 전부 파악할 수 있는가? 교회에 이삼백 명만 넘어도 담임 목사가 교인들을 일일이 알지 못한다. 거기다 모세는 바로 궁정 40년간 동족과 깊이 교류하지 못했고 미디안 광야 40년은 아예 멀리 떨어져 살았지 않았는가?

 

모세는 그 선발을 장로들에게 일임했을 것이고, 장로가 천부장들을 선택하면, 천부장이 백부장을, 백부장이 또 오십부장을, 오십 부장이 십부장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드로의 충고는 묶여있는 틀에서 벗어나 밖에서 하나님을 보라는 뜻이었다. 모세는 그럼으로써 이 선별작업까지 하나님이 다 이뤄주신 것임을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종교적 관습의 틀에 묶인 신자들

 

지금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수준은 솔직히 어떠한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지 않는가? 바둑 대국에만 몰두해서 즉, 눈앞에 닥친 문제와 고난 하나에만 온 정신이 함몰되어 있지 않는가? 그래서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는 하지만 오직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여 해결해 달라고 목을 매단다.

 

그 응답이 더디면 내 믿음이 약한가 여기고 키우려 든다. 그러는 것이야말로 정말 연약한 수준의 믿음의 틀 안에 여전히 갇혀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적 관습의 틀에 묶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정작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 분인지에 대해선 완전 장님이 되어버린다. 설마 그런가 싶은가? 나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개신교단의 총회장이 이슬람 랍비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우리가 막상 그와 비슷한 경우에 닥치면 충고의 내용이 아무리 선해도 이단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틸 것 아닌가? 종교를 갖고 차별하면서 정작 중요한 진리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더 실감나게 말해 보자. 교회 안에선 성도끼리 서로 눈치 보느라 경건하게 위로하고 배려하며 다툼 없이 잘 지낸다. 그러나 부부끼리, 부모자식끼리는 정작 상대의 말이 분명히 옳은데 최소한 충분히 수용가능한데도 또 그런다고 별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이 전혀 아닌데도, 완강하게 거부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투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 표정이 내 자존심과 감정을 건드렸다, 어린애가 부모에게 순종하지는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한다는 식의 핑계부터 앞세운다. 또 감정의 골에 파묻혀서 정작 문제의 본질은 손도 대지 못하고 전체 상황은 도리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상대가 정말로 괴로워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는 완전히 봉사가 된다.

 

믿음이 나의 의지와 열성을 키우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이끌고 계시는지, 그리그 그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이 믿음이다. 또 그 앎에 따라 헌신 순종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닥쳐도 기꺼이, 최소한 포기하지 않고 그분께만 온전히 있는 그대로 의탁하는 것이다.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그렇다 치지만 모세라고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수준에 단계별로 맞추어서 하나님이 제자 훈련을 수행하셨다. 먼 장래까지 스케쥴이 다 짜여 있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인간들 수준이 너무 보잘 것 없어 하나님이 억지로 겨우겨우 끌고 가는 모양새이지 않는가?

 

모세라고 그 일정표를 훔쳐 볼 수 없다. 그에게도 당장의 고난에 의심 원망이 생길 수 있다. 다 지나고 나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가 무엇인가? 성품이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을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신뢰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지금껏 그렇게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않는가? 믿음은 그래서 훨씬 더 간단한 의미다.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분의 행보를 우리가 신령해서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큰 비전을 세워서 믿음으로 달성하면 그분이 함께 행보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그냥 간단하게 내 어깨에 힘을 빼면 된다. 왜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가? 당장 눈앞의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의 틀 안에 자꾸 묶으려 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관습과 틀을 깨트려버리는 작업이 믿음이다. 앞서 가는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 틀의 밖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는 정말로 오직 그분의 품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 전부를 광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안에 완전히 잠기도록 해야 한다. 정말로 그분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면 말이다.

 

12/3/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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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38 18:13-22 정말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master 2018-01-13 148
85 출#37 17:8-16 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master 2018-01-13 104
84 출4:8-9 하나님이 불확실하신 것은 아닌가요? master 2017-11-20 52
83 출#36 17:1-7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신자들 master 2017-11-16 81
82 출#35 16:15-20 만나 사건의 참 기적은 따로 있다. master 2017-11-11 439
81 출#34 16:1-8 정말로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master 2017-11-11 158
80 출#33 15:22-27 쓴물을 단물로 너희가 바꾸어라. master 2017-10-12 694
79 출#32 15:1-11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찬양 집회 master 2017-10-05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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