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산의 경계를 넘어섰는가?

출애굽기 강해 (40)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니라.” (출19:7-15)

 

경계선을 넘지 마라.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올려 이스라엘이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면 제사장 나라로 세우겠다는 언약을 계시했다. 백성에게 통보해 동의를 구하라고 지시했고 모세는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했다.(7절) 가감 수정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일절 개입시키지 않았다. 백성도 여호와의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겠다고 즉,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순종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백성들더러 삼일 간 성결 기간을 갖고 또 시내 산의 일정구획에 경계선을 쳐서 넘어오지 말라고 명했다.(10/11절) 그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죽이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룩하시기에 추하고 악한 것과는 일순간도 절대 공존하지 못한다. 죄에 찌든 인간이 그분을 대면하는 순간 곧바로 소멸된다.

 

하나님은 백성이 밀고 들어와 보려하다 많이 죽을까 염려한다고 했다.(21절)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군중 심리가 발동된 것이다. 벳세마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여호와의 언약궤 안을 들여 보다가 엄청난 재앙을 겪었듯이(삼상6장) 당신을 절대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는 열 번째 재앙에서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밖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살았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실을 이미 철저히 목격하고 체험했었다. 또 옷을 빨아 입고(10절) 아내와 관계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15절) 어차피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태여 경계선을 쳐야 하거나 꼭 3일 간의 성결 의식을 거쳐야만 하는가?

 

바울은 기도하는 일 외에는 부부가 분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전7:5) 그럼 기도하기 위해선 분방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첫 걸음이다. 각자가 삼일 간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하여 그분과 관계를 바로 세우고 다시 헌신하라는 것이다. 옷을 빨아 입는 것은 그런 내적 성결을 이뤘다는 외적인 표시이자 순종의 서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결 의식을 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홍해를 건넌 직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린 적은 있다..(출15장) 또 출애굽기 기록에 따르면 모세가 율법을 한 번 만에 받은 것이 아니다. 시내 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고 두 번이나 40주야를 산 위에 머문 적이 있다. 지금 모세는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른 모든 계명의 절대적 전제가 되는 십계명을 수여 받기 직전이다.

 

삼일 간 성결 의식을 마쳤더니 여호와가 산 위에 나팔 소리, 우레, 번개, 빽빽한 구름과 함께 강림하셨다.(16절) 나팔이 우렁차게 울리자 백성들이 듣고 떨었고 불과 연기가 자욱하고 산이 진동하는 것을 목격했다.(18절)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언약 백성으로 그 동안 많은 기적을 통해 여호와의 큰 능력은 목격하고 체험했다. 비록 상징이라도 하나님 당신께서 임재 하신 모습은 처음으로 대면했다.

 

마땅히 성결의 예를 반드시 거행해야 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스라엘도 그 정도는 익히 알고 있다. 그보다 이제부터 받을 하나님의 말씀, 정확히 말해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들을 그만큼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목숨을 걸고 그것들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모세는 죄가 없는가?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내용은 모세와 아론은 경계선을 넘었는데도, 특별히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는데도 죽이지 않은 이유다.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따로 불러내었기 때문이긴 하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대신에 율법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다스릴 소명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아셔야 할 사항은 모세가 대면한 것이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수요일 아침 일찍 아내를 공항에 배웅하고 오는 길에 마침 해가 자동차 정면 유리창에 가득 찼다. 선글라스를 쓰고 햇빛 가리개를 내려도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칫 사고 날까봐 덜덜 떨며 기어가듯이 속도를 낮췄다. 교차로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좌회전하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수많은 해 중의 하나도 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얼마 전 개기일식 때에도 보호 안경 없이 보면 장님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 그분을 인간이 쳐다보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대면했거나 음성을 들은 것은 전부 그분의 상징이거나 대리하는 중간매체일 뿐이다. 인간의 지정의 범위 안으로 당신께서 스스로를 축소 제한한 것이다.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해주기 위해서다.

 

모세를 당신의 종으로 따로 세웠기에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옳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화시켜 버리면 율법을 받아쓰기와 낭독하는 실력이 최고인 사람을 부르면 된다. 실제로 말이 둔한 모세 대신에 아론을 그의 대변자로 붙여주셨고 지금 함께 불러올렸다. 그런데 모세와만 직접 상대하셨다.

 

출애굽기 전체를 통해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너무 특별 대우하는 것 같지 않는가?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리 불평과 원망을 했어도 너무 별 볼일 없는 존재로 홀대하는 것 같다. 지금 우리는 과연 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모세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홀대를 받고 있는 신세인가?

 

내가 누구관대?

 

떨기나무 불꽃에 임재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 당신의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돌아가느냐고 감히 하나님께 대꾸했다. 애굽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출애굽이 불가능하다고 의심한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살인죄인 현상범이라 돌아가는 즉시 잡혀 죽을 것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쥐 죽은 듯이 40년간 은둔 도피생활을 했기에 애굽의 자기를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나님도 그 때 바로 알려주지 않고 모세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하자 비로소 통보해주었다.

 

그전에 하나님이 정녕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은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난 80년간 그가 간절히 기도했어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세로선 하나님이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가, 부재(不在)하는가 거의 포기할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 판국에 애굽 동족을 구하라고 하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품에 넣었더니 문둥병이 발하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이 또한 모세는 애굽의 술사들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순순히 애굽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한 후에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는 바로 이 약속을 붙든 것이다. 시내 산에서 예배를 하려면 반드시 출애굽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면 모세 본인의 생명에도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출애굽을 요청할 때 어떻게 요구했는가? 애굽에서 나가게 해 달라, 노예 생활을 종식시켜 달라, 혹은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다시 합의 하자, 등등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시종일관 광야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영악하게 잔머릴 굴린 거짓말도 바로의 기분을 부드럽게 만드는 유화책도 아니었다. 모세에겐 정말로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자 자신의 평생소원이었다. 동족과 80년을 떨어져 조국도 히브리 이름도 없이 살았다. 여호와 그분의 공동체에서 함께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나님의 확정된 미래

 

그도 이 단계에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실지 어떻게 출애굽이 가능해질지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이처럼 하나님은 구체적 과정을 전혀 밝히지 않은 채 당신의 뜻과 계획이 반드시 이뤄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확정된 미래로 약속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잊었나보다 거의 체념 한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을 만드시고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에게 시제를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출애굽과 시내 산 예배는 그분에겐 확정된 미래를 넘어 이미 실현된 과거 시제가 되어 있었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시내 산 예배를 약속하셨을 것이다. 모세는 어떻게 되든 자기가 죽을 염려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또 최소한 출애굽이 아니라 시내 산 예배가 일차 목표로 바뀌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노쇠하여 생산이 불가능했음에도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긴 근거와 본문 모세의 경우는 동일하다. 모세는 출애굽을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이 나이에 아들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다 모세가 나중에 시내 산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도 후손이 창성하여 비록 애굽의 노예로 섬기겠지만 사대 만에 가나안으로 돌아온다고 약속했다. 그도 아들이 있어야 후손이 가능할 것이니까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도 믿은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덧붙였는가? 바로 그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라고 했다. 역으로 말해 시내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단순히 미래에 이뤄질 비전(vision)으로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약속이 인간 쪽에선 화정된 미래이지만 하나님 쪽에선 실현된 과거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네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11:1에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의미다. 모세는 이런 믿음으로 이미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서 소명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스라엘에겐 아직 이런 믿음이 없었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그들은 시내 산의 경계선을 넘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순종하겠다고 고백했다. 십계명을 받기 위한 성결의식도 거행했다. 더 중요하게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서 설명해주자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다시 동의했다.(출24:1-8) 나아가 소를 잡아 그 피로 성막을 만들기 전이라 여호와의 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며 실제로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까지 행했다..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이 위반할 리는 만무하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헌신하겠다고 스스로 서약한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처음 40주야를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자,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고 있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광란의 파티를 즐겼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여지없이 거역하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다.

 

그들은 모세처럼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즉사하는 상태요 신분이었는데도 지금도 그분의 선민(選民)이라는 교만에 차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다. 그들이 단순히 완악했다고 단정 짓고 치울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여호와의 명령을 다 행하겠다고 다짐했다.(8절) 하나님이 그 때 그들의 내심과 영혼의 실상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는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알고도 속아준 것이며 그것을 어려운 용어로 긍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무한한 자비와 무조건적 긍휼을 베풀 만큼 사랑했기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요1:1) 말씀이신 예수님이 참 빛이 되어 세상에 오고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골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경륜 안에서 확정된 미래를 넘어 이미 실현된 과거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다. 모세마저 그분을 완전하게 보지 못했다. 오직 독생자 하나님에게만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속아주는 척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이며, 인간 특별히 죄인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대속 구원을 완성하셨다. 특별히 당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음을, 실현된 과거로서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서 재현해 보이셨다.

 

창녀 세리 고아 귀신 들린 자 이방인은 물론 바리새 서기관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눴다. 변화산에서 천국의 영광이 얼마나 경이롭고 엄청난지 제자들에게 맛보게 했다. 제자들은 여기가 좋으니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고 싶다고 했다.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를 살려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고귀함을 다시 누리게 했다.

 

결정적으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는 영광을 오백 명이 넘는 당신의 택하신 남은 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도래한 천국을 초대교회 신자들로 침노하여 차지하게 만들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차지했는가?

 

스데반더러 그가 이미 소지한 부활 생명을 실현하게 했다. 유대인들의 핍박에 생명을 걸고 맞서며 복음을 당당하게 전했다. 당시 복음은 교리적 신학적으로 복잡한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도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뿐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 천국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다. 부활은 그분의 실현된 과거였다. 스데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에 맞아가면서 천국 영광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가 이미 소지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고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강에 가득 찼었다.

 

스스로 물어야 할 진지한 질문

 

지금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물을 질문은 이것이다. 스데반처럼 순교할 수 있는지가 아니다. 시내 산의 경계선을 모세처럼 수시로 넘을 수 있는가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정말로 그분을 인격 대 인격으로 대면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정말로 살아 역사하고 있는가?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언약의 제사를 이미 드렸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살아가는 방식이 이전과 정 반대로 바꾸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분의 확정된 미래를 내 가정 교회 직장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이미 실현된 과거로 만들어야 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만이 차지할 수 있다.

 

다음 주는 예수님이 오신 기독교 최대 절기이다. 단순히 예수 믿었으니 먼 미래의 천국이 보장되었을 것이고 이제 이 땅에선 힘든 일을 기도해서 응답 받을 일만 남았다고 여겨선 결코 안 된다. 이일만 이뤄주시면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쉽게 서원한다. 그분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분의 오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을 너무나 경홀히 여기는 짓이다. 벧세마스 사람이 언약궤를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정도 밖에 안 된다.

 

모든 신자는 부활생명을 이미 받았다. 변화산의 영광은 확정되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정말로 함께 하신다. 심지어 내 잘못과 죄도 날마다 그분이 깨끗케 해주고 계신다. 어떤 고난, 영적 눌림, 죄악, 사탄, 사망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 싸우기 위해서이고 그러면 또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한다. 후히 되어서 넘치도록 주어야 하고 그래서 또 나눠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반복해서 넘치게 받는 체험을 삶에서 해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풍성하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실현된 과거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순전히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간구하라고 했는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뤄졌다고 과거 시제로 말한다.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뜻은 확정된 미래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 땅에서도 실현되었다. 그래서 주님이 보이시고 실현하신 천국의 모습을 가정과 교회와 직장 등,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 안에 얼마든지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2/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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