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4 20:7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

조회 수 81 추천 수 0 2018.04.21 12:28:53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 

출애굽기 강해(44) - 십계명(4)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한국인들은 부모님의 성함을 아예 입에 담지 않는다. 꼭 불러야 할 경우는 박(朴)자 진(辰)자 호(浩)자라고 한 자씩 따로 말한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선 그보다 더한 예의를 보였다. 구약성경을 옮겨 적는 서기관들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쳐 자세를 바로 잡고 붓을 물에 다시 빨아서 적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는 그 단어 전부를 나의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아예 바꿔서 읽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이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멸시 비방하며 부르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불신자라도 천벌이 두려워서 하나님 이름만은 막 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의와 존경을 최대한 갖추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미국 아이들은 부모를 성도 안 붙이고 이름(first name)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의도 없고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부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서 이 땅에 실존케 해준 뿌리일 뿐 아니라 보호 양육 지도해준 은혜가 하늘보다 높다는 뜻이다. 셋째 계명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과 인생에 베푼 사랑과 은혜를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분을 감사 찬양 경배하는 마음이 없이는 당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 이름의 비밀

 

하나님 이름에 대해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제가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한 직후에 당연히 ‘하느님’으로 부를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라고 해서 놀랐고 이상했으며 솔직히 별로 은혜가 되지 않았다. 절대자나 신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런 상징이나 은유의 의미도 없어서 거룩하고 신령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주변 사람에게 왜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기독교의 신의 이름이 당연히 그런가보다 여겼지 그런 의심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도 했다.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했던 강도사님께 그 뜻을 듣고는 그 이름이 아주 합당하고 참 좋다고 깨달았다. 신학을 하고 무엇보다 삼십 년 넘게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며 하늘보다 더 큰 신령한 존재라는 의미가 있다. 이 땅의 온갖 허물 탐욕 분쟁 죄악으로 찌든 인간과는 전혀 다르며 이 땅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고상한 존재다.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거룩하게 좌정해 계신 분이다.

 

당연히 절대자의 첫째가는 중요하고도 아주 좋은 의미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늘에만 계시면 이 땅과는 무관하다. 신학적 용어로 초월자에 머문다. 이 땅의 인생사를 주관하지 않으면 사실상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하느님이라 부르는 종교들에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이 땅의 기초를 만드신 분이라고는 인정한다. 그러나 다 만들고 나서 피조세계가 저절로 작동되도록 운행법칙을 부여한 후에 손을 놓고 있다고 믿는다.

 

자연히 모든 생물은 진화의 법칙에 종속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그 진화의 정점에 있으므로 이 땅을 주관할 수 있다. 하늘의 거룩하고 신령한 존재가 인간을 아주 똑똑하고 선하게 진화되도록 했기에 비록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서 시행착오는 겪을지라도 끊임없이 개선하여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끼리 유토피아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필연적으로 구원론도 행위구원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땅에 절대자는 부재하기에 인간의 전적 책임 하에 맡겨져 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았던 것을 심사하여 성적을 매기고 우등생은 구원을 얻고 열등생은 심판을 받는다. 따라서 각 종교가 가르치는 윤리적 종교적 계명들을 착실히 수행하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하자가 하나 있다. 어떤 인생사도 주관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계이기에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공경 효도하는 것이다. 남의 부모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인간의 삶에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 특별히 자신의 개인적 삶과 인생에 어떤 의미도 주지 않는다면 인간의 경배를 받을 근거도 자격도 없다.

 

하나님 이름의 비밀

 

기독교의 개신교만, 정확히 말해 한국의 개신교만 유일하게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성경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절대자의 명칭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하면서 그 의미를 살렸다. 영어로는 ‘God’ 혹은 ‘Lord’로, 일본어로는 가미사마(神樣)’인데 우리말로는 ‘신님’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영어로 바꾸면 the Only One (Being)이 되는데 부르기도 힘들고 절대자라는 의미도 없어 어색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1883년 캐나다 선교사 존 로스가 번역한 누가복음에, 당시는 아직 성경 전권이 번역되기 전이라,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또 1800년대에는 식자나 양반은 한글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한자만 사용했다. 한글은 천민이나 여자가 사용하는 글이라고 천시 받았다. 당연히 문법체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아래 아(.)자를 많이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도 신적 절대자의 존재는 인정하고 또 ‘하느님’으로 불렀던 것 같다. 캐나다인 선교사의 귀에는 ‘아’인지 ‘으’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되어 처음에는 ‘하’자 다음 니은 아래에 아래 ‘아’를 붙였다가 나중에 하나님으로 바꾼 것 같다. 그러다 문법체계가 정립되면서 ‘아래 아’를 전부 아로 바꿀 때에 하나님으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개신교에선 그 뜻이 아주 성경적이라 계속해서 하나님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우선 유일무이(唯一無二)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다. 절대자, 신, 창조주가 여럿일 수는 없다. 능력과 지성에서 그분과 겨룰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생물은. 당연히 인간을 포함하여 그 활동은 물론 생존도 자기 외부의 다른 것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 외부의 여건들은 그 생물과 인간이 실존하기 이전부터 이 땅에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생물은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만약 운행하는 법칙만 있다고 절대자는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다면 인간의 수명도 모두가 혹은 거의 같아야만 한다. 법칙이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 없어야 하나 현실은 갓난아이가 간암으로 죽기도 한다. 하나님에겐 출생과 죽음 자체가 아예 해당되지 않고 영원히 실존한다. 다른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존하는 유일한 존재가 하나님이다.

 

이름이 없는 하나님

 

이미 배운 대로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께 이름을 무엇이라고 동족에게 말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가르쳐준 이름은 영어로 치면 “I am” 주어와 Be동사 둘로만 대답했고 우리말로 직역하면 “내다”가 된다.

 

이름을 가르쳐 준 것인가? 안 가르쳐 준 것인가? 가르쳐 준 것도 안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이름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성경의 절대자는 이름이 없는 유일한 존재다. 이름이 있어서도 안 된다.

 

히브리인의 사고로는 이름은 특성과 인격과 삶 전체를 대변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고, 이스라엘은 당신과 싸워 이긴 자라고 하나님이 부쳐주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어떤 이름이든 붙여지는 순간 그 한 가지 특성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 한해선 수천 조분의 일의 설명도 안 된다.

 

출애굽 직후에 모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이 합심하여 아말렉과의 전쟁을 승리한 후에 그분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불렀는가? “여호와 닛시”라고 했고 직역하면 “내다. 깃발”이 된다. 대적과의 전투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대적을 사용해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한데 그 점을 도무지 설명하지 못한다. 여호와 닛시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붙여주지만 하나님에게 부모가 없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신 그분이 어떻게 이끄시는지 각각의 경우에 따라 느끼는 대로 여러 이름들을 붙여서 부를 수밖에 없으나 그분의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이름이 없다. 단지 당신께서 스스로 당신을 증명하실 뿐이다. 그분이 직접 계시하시는 것 외에는 당신을 바르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신구약 성경 66권이다. 그 중에는 사탄을 활용해서라도 욥의 믿음 성장을 위해 최악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있다. 또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극악무도하게 학대하고 잔인하게 살육한 니느웨 백성마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우주의 주인으로 우주를 통괄하시고 우주를 아우르며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 자신을 ‘내다’라는 한 마디 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폐가 있지만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당신의 이름을 표현할 더 좋은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은 야훼라는 이름이 입에 익었지만 성경이 기록된 초기에는 ‘내다’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어감과 의미도 이상하고 읽기도 어색해서 아도나이로 바꿔서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어 성경만이 ‘하나님’이라고 호칭하는데 그분 당신께서 당신을 계시한 의미에 가장 근접한 명칭이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입술의 말과 심령의 생각까지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것들을 심어주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초월만 하신 분이 아니다. 안 계신 곳이 단 한 곳도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초월자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초월자이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까지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수 있다. 나아가 승천하신 후에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내주하시어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다.

 

망령되이 부른다는 정확한 의미

 

하나님을 ‘망령되이’ 부른다는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한다. 히브리 원어 “쏴브”는 악하게 교활하게 거짓되게 부른다는 뜻도 있지만 영어로 in vain으로 번역되었듯이 헛되다는 의미가 강하다. 원어로 텅텅 빈, 아무 것도 없는,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는 말과 행동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 이름을 불경스럽게 부르지 말라는 것보다 헛되이 찾지 말라는 뜻이다. 그분을 절대로 무익하고 의미 없는 분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하다 보면 흔히 듣는 반발이 있다. 세상에 모순과 고난과 죄악을 그대로 두고 보는 기독교의 신은 방관자요 불공평한 존재니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늘에 초월해 있으며 이 땅에 손을 놓고 있는 신이 옳으며 또 그래서 착하게 살면 구원해준다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를 찾아간다.

 

이 땅과 연관이 없는 신이라면 기도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로 그런 종교인들은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는 지극히 위급한 경우를 빼고는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개신교인들이 일상의 사소한 일을 두고 미주알고주알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이해도 못하고 이상하게 여긴다. 스스로 노력하기는 포기하는 나태하고 비겁하다고 비방한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분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이 바로 망령되이 즉, 헛되게 그분을 부르는 것의 대표다.

 

십계명은 그 구조에도 의미가 있다고 누차 강조했다. 오늘의 계명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그 순서에도 주목해야 한다. 바로 앞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해 스스로 신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만든 신은 그 이름이 아무리 고상해도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아예 능력이 없다.

 

이 경우에 붙이기는 너무 아름다운 시(詩)이고 그 경우와 의미도 다르지만 김소월시인의 초혼(招魂)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르다,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문자적으로 이런 의미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헛되게 즉, 망령되이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성경에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 혼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바알 선지자 450명이 하루 종일 전심과 진심을 다해 불러도 응답이 없어서 나중에는 몸에 상처까지 내었다. 피를 보인 것은 자기들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그런 최고의 치성까지 바쳤지만 끝내 감감 무소식이었다. 문자 그대로 부르다, 부르다 바알 선지자들이 죽은 이름이었다. 바알 즉, 응답할 신 자체가 없는데 응답될 리가 없다.

 

여호와는 절대로 그런 신이 아니다. 엘리야 혼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조용히 기도했다. 도저히 저절로 불이 붙을 수 없는 물에 흠뻑 적신 나무를 하늘에서 불이 내려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엘리야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다. 삼 년간의 가뭄도 작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뭉게구름으로 바뀌고 홍수가 날 정도로 해갈시켰다.

 

우상숭배야 말로 헛되게 부르는 것의 대표다. 결국 셋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풀어 설명한 것이고 둘째 계명은 지난주 설명 드린 대로 첫째 계명을 풀어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세상의 주인으로 오직 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분이 객관적으로 초월해 계신 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말로 바로 너에게 오직 한 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다’라는 의미로 그분을 찾지 않으면 헛되이 찾는 것이다. 친아들에게 ‘내다’라는 아버지의 한마디 말 안에 모든 사랑과 권능이 다 포함되어 있고 또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되기에 아들이 안심하듯이 말이다.

 

정작 주목할 셋째 계명의 후반부

 

우린 어떠한가?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우상처럼 취급할 리도 없다. 지금껏 말씀드린 초월자이자 동시에 내재자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도 정확히 안다.

 

그러나 그분을 부르다, 부르다 내가 죽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은 없는가?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다보니 솔직히 하나님이 침묵 외면 부재한 것 같은 적이 있지 않는가? 나중에는 해결할 능력이 없는지 의심과 불만까지 생긴다.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 또 기도에 응답 받은 적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응답 받지 못한 회수가 훨씬 많다.

 

그래서 습관적 형식적 신앙으로 변질 된지 이미 오래 아닌가? 주일 예배를 드려도 기쁨과 승리가 없다. 기도하고 찬양하면 잠시 평강을 찾으나 금방 또 걱정이 겹친다. 그럼 경건히 예배드린 것, 간절히 기도한 것, 뜨겁게 찬양한 것, 모두가 허사 아닌가? 하나님을 헛되게 아무 의미 없이 즉, 망령되게 부른 것 아닌가?

 

왜 이리 오래 침묵하시는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가? 의심과 불만이 많아진다. 마치 하늘에 멀리 떨어져서 세상 특별히 내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하느님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지 않는가?

 

이 셋째 계명은 후반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는 자로 여기지 않겠다고 한다. 인간의 믿음이나 판단으로는 죄가 아니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 않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주일예배에서 눈물로 찬양하고 기도하며 목사 설교를 듣고 찔림이 생겨 회개하고 바르게 살아가기로 결단한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기까지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고 여긴다. 이 문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또 마지막의 이것만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바로 그 마지막 양보 못하고 남은 것마저 깨트리려고 연단을 주신다. 그런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은 왜 이리 나만 힘들게 하시는지 의심 불평하며 기도해봐야 헛되다. 도 바로 그래서 고난이 더 겹쳤는데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여 자기 욕심과 세상 죄악에 쉽게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성장하기는커녕 자꾸 퇴보하거나 정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일예배 드리는 것은 불신자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는 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러나 예배 중에 기쁨으로 승리하는 것이 없으면 신자로 행할 바를 다 한 것이 아니다.

 

죄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의 또 다른 뜻은 죄가 아니지만 죄라는 것이다. 교회까지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주도 지난주와 똑 같은 모습이라면 교회 마당만 밟고 간 것이다. 그것은 헛된 것으로 죄라고 이 셋째 계명이 선언하고 있다.

 

신자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

 

신자가 마지막까지 놓거나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자존심이 아니다. 십계명의 대전제는 출애굽 하신 여호와의 절대적 명령이라는 것이다. 애굽의 종 살이에서 오직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내신 하나님이다. 신약 성도는 예수 십자가의 승리를 생각하며 이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끝이 났다고 하는 순간 그분은 죽음에서 생명의 승리를 하셨다. 하나님이 와도 도무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때에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지 않는가? 또 바로 그 분이 성령으로 신자에게 내주하고 있다. 신자는 영원한 부활 생명을 이미 소지하고 있다.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시어 공사역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신과 똑 같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당신은 천국보좌에 좌정해 계시어 안 보이실지라도 당신과 동일하신 성령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자의 내면에서 동일하게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소외되고 멸시 받고 고난 중에 있는 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한숨 쉬며 또 때로는 기뻐하셨다. 지금 성령이 신자에게 행하고 있는 일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한 것처럼 반드시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신자에겐 유익이 되는 자리에 기어이 이끄신다.

 

우리는 정말로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가 있다. 너무 낙심이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이름이 텅텅 빈 것 같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내 자신에게 들릴 때가 있다. 현실의 고난이 너무 겹쳐 죽기 일보 직전 같은 바로 그 때에도 주님은 오히려 더 크게 귀를 여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나아가 우리가 빌 바를 모를 때에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신다.

 

지난주에 신자의 인생은 자기 가진 것을 포기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과 맞바꾸는 씨름이었다. 내 것을 버려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채울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 그 일차적 이유다.

 

또 내 것을 깨트리지 않으면 신자 자신의 발전과 진전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껏 신앙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지나고 나면 내 길과 생각이, 결코 악하지 않고 선한 것이었고 또 내 욕심이 개입된 것도 아님에도,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훨씬 더 선하고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옳고 더 풍성합니다, 아니 반드시 옳습니다.”라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체험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안에 하나씩 내 것을 버려야 하고 또 버려지는 것이다. 그런 과정 전부가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고 인정했기에 외아들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여정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 이르도록 그를 깨트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쯤 이 고난이 끝날지도 모른다. 자꾸만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더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내 인생 전체를 그분 앞에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분의 능력에 져서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선 안 된다. 내가 버림으로써 더 큰 은혜로 승리로 이끄셨던 체험을 통해 저절로 나오는 진정한 고백과 함께 기꺼이 그래야 한다.

 

하나님은 초월자로만 머무를 수 없다. 그분은 너무나 광대하시고 완벽하신 분이다. 그런 분을 내 생각과 계획 속에 묶어 제한하려는 끈질긴 습성이야말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에만 붙들리면 왜 이 일을 안 해주시나 불평과 원망이 생기고 그분을 내 길과 생각으로 묶기 쉽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믿음이 무엇인가? 광대하신 그분의 생각에 맞추어 내 생각을 키워나가는 씨름이다. 그래야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비록 우리 모두는 아직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 같은 위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주님의 제단에 나올 때에 눈물과 한숨을 뿌리고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 십자가의 승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럼 기쁨의 꽃다발을 듬뿍 안고 일어설 수 있다.

 

터널 끝이 안 보일지라도 그 끝은 반드시 있다. 터널 끝을 하나님이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럼 누구라도 믿음 생활을 쉽게 할 수 있다. 터널이 없다고 여기는 것만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는 신자에겐 터널의 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에는 깜짝 놀랄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2/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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