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8 20:14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

조회 수 66 추천 수 1 2018.04.21 12:41:05

Me too 운동의 영적 실상 

출애굽기 강해 (48) 십계명 (8)

 

“간음하지 말라.”(출20:14)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27-32)

 

Me Too 운동이 활발해도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Me Too 운동이 한국에도 상륙하여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성폭행 혹은 추행을 한 가해자는 주로 특정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이라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는 자이다. 평소의 언행도 아주 의로워서 존경까지 받는 자들이라 충격이 크다.

 

피해 여성은 같은 분야에 갓 입문한 초년병이 대부분이다. 성폭행을 거부하자니 그 업계에서 출세는커녕 아예 발도 못 디딜 판이라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억울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치사하고 야비한 갑 질 중의 갑 질이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갑자기 사악해진 것은 아니다. 물론 최근에 여성의 사회활동이 급격히 증가했기에 어쨌든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 인간 사회에 지속적으로 있어온 범죄다.

 

지금까지는 성적 순결이 여성에게만 일방적인 책임으로 강요되어오다 이젠 남녀평등이 확보되었다. 또 소셜 미디어가 발달함으로 해서 그 동안 쉬쉬 해오던 것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뿐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소득수준이 높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일부 국가에만 있는 현상이다. 여전히 여성이 억압당하고 있고 발설했다간 오히려 손해가 더 크고 자칫 그 사회에서 추방을 당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나라들이 훨씬 더 많다.

 

말하자면 Me Too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해서 인간사회가 훨씬 더 깨끗해지리라 바라는 것은 섣부른 기대이자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앞으로는 더 교묘하고 음흉한 성적인 갑 질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인간 사회 최초의 범죄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살인 그것도 아무 잘못을 범하지 않는 친동생을 형이 엉뚱한 화풀이로 죽인 것이었다. 두 번째로 일어난 범죄는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 성적인 갑 질이었다.

 

창세기 4:19-24에서 라멕은 살인은 당연히 밥 먹듯이 범하고 있었고 그 위에 힘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는 유부녀라도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가인이 받은 벌의 열 배를 받더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하나님도 전혀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쳤다. 이때부터 벌써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쾌락과 사치만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되어있었다.

 

간음이 성적인 갑 질(?)

 

간음은 다 큰 어른 두 사람이 자의에 따라 서로 합의하여 행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사고로는 개인의 성적 취향이자 자유에 속하므로 범죄를 구성할 요소는 전무하다고 여긴다. Me Too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서구사회에서 간음을 정죄하면 앞뒤가 꽉 막힌 광신자 취급을 당한다. 한국도 개인의 사생활에 정부 권력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Me Too 운동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강제성의 개입여부다. 나의 자유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당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의 배후에 있는 더 근본적인 생각을 역설적으로 따져보면 성(性)적 문제는 개인의 전적인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여섯 인간관계에 대한 규정 중에 불신 세상도 다른 것들은 아직은 다 죄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오늘의 일곱 번째 계명만은 사정이 다르다. 십계명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바이블 벨트라 불리며 기독교가 대세인 이곳 미국 동남부 주에서도 십계명 기념물을 제거하라는 법원의 명령이 내려지고 있다. 또 일부 크리스천들마저 심정적으로 그 조치에 동의하고 있다. 왜인지 아는가? 교회 안에서도 간음이 알게 모르게 자행되고 있어서 간음은 더 이상 죄로 여기지 않거나 최소한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간음은 실은 성적 갑 질 중의 갑 질이다. 앞으로 Me Too 운동으로 폭력에 인한 갑 질은 많이 줄고 분명히 깨끗해질 것이다. 서두에서 성적 갑 질이 앞으로 더 늘어난다고 말씀 드린 것은 바로 간음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뜻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십계명에선 여섯째로 간단하게 간음하지 말라고만 언급하나 실은 모든 성적 범죄를 대표한 것이자 사실상 가장 악질적인 성적 범죄다. 레위기 20장과 신명기 22장에 온갖 추악한 성적 범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거의 모두 사형으로 엄격하게 다스리라고 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살인 이상으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죄다.

 

언뜻 간음은 성인 남녀가 자발적으로 결정했고 현실적으로는 두 사람만 비밀을 유지하면 제 삼자에게 아무 피해도 없을 것 같다. 왜 성적 갑 질 중의 갑 질이라고 말하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제가 임의로 해석한 제 의견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인용한 것뿐이다.

 

예수님의 간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意)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간음을 어떻게 풀어서 설명했는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 죄송하지만 19금 표현으로 예쁜 여자를 보고 수컷으로써 잠시 스쳐지나가는 호기심 내지 욕정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상대에 대해 뭔가 잘해보려고 궁리하며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영적 생명체를 자기 마음속에 완전히 지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 대신에 다른 여자를 자기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품고 있다면 아내를 마음속에서 지운 것이다. 아니라면 라멕처럼 일부다처제에 욕심이 있는 셈이다. 이는 간음 위에 살인까지 한 셈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특별히 부부 사이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상대의 잘못을 알 수 있다. 여자의 육감은 무섭다. 아내에게 거짓말하고 친구랑 호스티스 있는 술집에 가서 밤새 놀다 오면 금방 알아챈다.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반드시 발각된다.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그 여성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흔히 아내들이 남편이 하룻밤 외도하는 것은 어쨌든 용서를 해줄 수 있지만 다른 여인과 아무 육체관계 없이도 계속 만나 식사만 해도 난리가 난다. 정신적 간음이 훨씬 더 중한 잘못이라고 우리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간음은 간음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진짜로 살인이다.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육체적 생명을 없애는 것이지만 일곱 번째 간음은 영혼의 살인이다. 현실적 피해가 없어도 또 처음에는 그럴 의도도 없지만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핑계는 간음에는 절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 피해를 입은 배우자에게는 너무나 치사하고 야비한 갑 질이다.

 

모세의 이혼증서

 

예수님은 이어서 모세의 이혼증서에 대해 보충해서 설명했다. 율법에 따르면 아내를 취한 후에 수치를 발견하면 증서를 적어주고 내보내도 된다고 허용했다.(신24:1) 예수님 당시에는 이 규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요리를 못하거나 시기를 하는 것 등등, 아무 하자나 꼬투리 잡아서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렸다.

 

심지어 증서를 써주지 않고 내쫓았다. 당시는 여성 혼자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와 동거하면 다시 찾아가서 데려오기도 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유대인들이 제 멋대로 여자에게 성적인 갑 질을 하기는 라멕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았고 단순히 하나님만 믿었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혼증서를 써주면 내보내도 된다는 것은 여성의 재혼과 생계는 물론 최소한 그 인권을 보장해주라는 뜻이었다. 남편이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이혼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다. 음행을 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했다. 다른 것으로 핑계 대면 설령 증서를 써주고 내보내면 그 아내와 재혼한 남성이나 그 여자나 둘 다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혼증서는 지금으로 치면 가정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셈으로 재혼하는데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내가 간음하지 않았으면 버리지 말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법에선 여전히 원래의 부부관계는 지속되고 있고 재혼하면 그 아내나 그녀에게 재혼한 남자도 당연히 간음 죄를 범한 것이다.

 

실제로 신명기 24:1에서 말하는 여자의 수치에 대해 “데려온 후에” 발견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살아본 후에”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혼증서를 주기에 합당한 수치는 결혼 전에 실수로 순결을 잃은 것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누가 봐도 타당한 결정적 사유여야 한다. 쉽게 말해 도벽 같은 치명적 결점을 속이고 결혼한 경우다.

 

예수님 당시에 아무 꼬투리나 잡아서 증서를 써준 유대인들은 그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 적용했지만 따지고 보면 문자적으로도 엉터리로 해석한 셈이다. 유대인들은 세속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법마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제멋대로 왜곡 적용했다.

 

바꿔 말해 하나님 그분을 마음대로 갖고 논 것이다. 라멕은 그래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벌을 열 배로 주더라도 받겠다고 하면서 거역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말로는 믿고 따른다면서도 비겁하게 삶에선 그분을 조종 농간했다.

 

타락 전으로 돌아가라.

 

모세의 율법도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간음 외에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의 뜻이다. 일곱 번째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는 간단하고도 절대적인 명령 형태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면 이혼증서를 함부로 남발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중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이 문제를 두고 다시 논쟁할 때에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먼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남자와 여자를 각기 만드시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창세기 2:24을 인용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결혼 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결혼제도를 창설한 목적과 뜻 하나로만 판단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인간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결혼식 주례 때에 목사님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다. 결혼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헤어질 생각을 않는다. 불신자들조차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다. 죽고 못 살아서 콩깍지가 씌었던 어쨌든 평생을 함께 하려고 결혼한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보면 금방 속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모세의 이혼증서를 그런데 절대 써먹지 말라고 예수님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예수님은 참 절묘하다. 신자들마저 때로 후회가 든다. 죄송하지만 목사와 장로들 중에도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증서법이 그리운 사람들도 꽤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나 십계명은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가 대상이다. 신자가 대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신분과 위치에 있는 자라는 뜻이다. 구원을 받은 것은 죄, 특별히 아담이 타락한 그 원죄에서 구원 받은 것이다. 구원이란 그래서 타락 전의 상태로 되돌려진 것이다.

 

실제적인 우리의 본성은 아직도 탐욕 교만 악함이 그대로 많이 남아있으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우리를 타락 전처럼 의인으로 취급해 주신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이 신자의 첫째가는 인생 목표로 바뀌었다는 것인 전제가 된다. 신자의 현실 삶이 그런 방향으로 지향하지 않는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극히 일부라도 그쪽으로 나아진 모습이 전혀 없다면 신자가 아니며 구원 밖에 있는 것이다.

 

부부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숨길만한 죄나 허물이 없어야 하고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해 부부끼리는 이메일, 카톡, 지갑 등을 언제든 오픈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컴퓨터 외장 하드드라이브도 언제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간음은 부부 사이에 가장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허물이지 않는가? 첨부터 끝까지 모두를 감춰야 하니까 정말 죄 중의 죄다. 세상 사람은 자유와 인권을 주장하며 성적인 문제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왜 기독교가 간음을 죄라고 즉, 라멕처럼 왜 하나님이 막느냐고 큰소리친다. 그런데 신자가 간음을 하면 바로 라멕의 죄를 짓는 것이며 그렇다면 더더욱 하나님께 수십 배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 아닌가?

사랑의 배신

 

간음의 피해를 입은 배우자 쪽에선 사랑의 배신을 당한 것이다. 삼류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덕이다. 단순 히 남녀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결혼도 에로스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영국 속담에 결혼이란 사흘 간 신혼여행 기간 동안만 사랑하고, 석 달 간은 상대의 하자나 속은 것 없나 탐색하고, 삼 년 간은 그것 때문에 싸우다가, 삼십 년은 포기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결혼도 아가페적인 사랑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다. 세상 사람은 에로스 적인 사랑만으로 결합 유지하려니 이혼은 물론 간음을 밥 먹듯이 한다. 신자는 아가페 사랑으로 결합되었기에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그 전에 간음 같은 부끄러운 일은 아예 하지 않게 된다.

 

아가페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 그분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아담과 이브의 결혼은 타락 전에 이뤄졌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으로 그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다 죄로 타락한 후에는 사랑의 본성도 함께 타락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에로스 사랑만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사랑은 어떤 흉악한 죄인도 어떤 큰 절망에 빠져 있어도 사망 직전에도 살려낼 수 있다. 사랑으로 용서 못하고 품지 못할 사람이나 사건은 단 하나도 없다. 사랑만큼 더 강한 파워는 세상에 없다. 그 힘은 세상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 부부 사이에는 어떤 죄악도 나아가 이기심 감정 욕심 특별히 자존심을 절대 개입시켜선 안 된다. 개입되는 순간 부끄럼이 생기고 절대로 서로를 100% 온전히 오픈할 수 없다. 오직 사랑으로만 그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원죄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 한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한 목적은 당신께서 인간과 우주 전체를 맞바꿀만한 사랑을 베푸시려는 것이었다. 창조는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이뤄졌다. 잠깐 상상을 해보라. 지금도 인간이 없는 이 땅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진화와 창조 중에 어느 것을 믿느냐가 단순히 인간의 기원을 다루는 과학적 이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주 전체를 지으시고 주인 되시는 그분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는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내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는가?

 

피조물 그 중에서도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래서 오직 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사랑이 없이는 영혼에 생기와 활력이 절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기도 찬양 뜨겁게 하는 종교적 열정은 잠시 뿐이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에 실현되는 실제 체험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려야 한다.

 

불신자의 인생이 왜 고달픈지 아는가? 그들의 욕심이나 죄의 본성이 많아서가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 우리보다 더 검소하고 의로운 자들 많다. 끝까지 인간에게 활력을 줄 수 있는 첫째 아니 유일한 요소인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바로 사랑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요일4:8-11)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했는가?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살리려 죽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본체이심에도 하나 감출 것 없이 문자 그대로 벌거벗고 달리셨다. 인간의 죄악, 특별히 사랑을 제대로 못하는 그 허물과 부끄러움을 다 안고 가셨다. 바로 그 십자가의 은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신자는 모든 인간관계를 부부사이를 포함하여 이런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각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서로에게 나눠야 한다.

 

아가페 사랑을 하라.

 

에로스 사랑은 단순히 남녀 간의 그것도 성적 욕망으로만 정의하는데 잘못이다. 인간의 타락한 죄의 본성에서 기인하여서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사랑이 에로스다. 하나님 쪽에 기원하여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반대급부는 전혀 요구하지 않고 대신에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는 사랑이 아가페다.

 

간음은 세상 사람들 사이에선 유행가 가사처럼 인간의 사랑을 배신한 것이다. 반면에 신자에게 이 일곱째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간음에 대해서 신자들마저 예사로 여기고 또 간음이 만연해져 가는 세태에 무감각해진 이유가 하나 있긴 하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이 바로 용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놓치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다. 그 여인이 용서를 받을 때는 예수님을 알기 전이었다는 점이다. 주님은 그 불쌍한 여인 그 사람을 용서해준 것이지 그 죄까지 용서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이 죄를 짓지 말라고 엄격히 선언했다. 간음이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속한 것이라고 여기면 쉽게 말해 여자들을 내 멋대로 차지한 라멕의 갑 질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신앙 윤리 즉, 신자니까 더욱 성적으로 순결해야 한다는 차원으로만 접근해선 아직 많이 부족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내 존재 전체가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주제는 제가 계속 강조해왔고 앞으로도 가르칠 내용이 많다. 이 일곱째계명과 연결해선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신자가 자신의 인생을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오직 아가페 사랑을 제대로 실현했는지 못했는지 여부여야 한다. 불신자의 실패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럼 신자의 성공은 정반대로 그분의 사랑이 내 삶 전체에 실현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상대를 내보다 낫게 여기면 오히려 내 기쁨이 충만해진다고 했다. 우리 모두 그런대로 부부 간에, 성도 간에, 이웃에게 순수하고 진실 된 사랑은 분명히 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부부 간에는 더더욱 이 아가페 사랑을 실현하면 진정으로 성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일곱째 계명의 뜻이다.

 

3/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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