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24,25 서로 벌거벗었는가?

조회 수 747 추천 수 15 2010.11.24 18:24:51
서로 벌거벗었는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4,25)


창조의 궁극적 목적

하나님은 당신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리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또 그 다스리는 일을 수행하는 최소 기본 단위로 가정을 세우셨다. 부부가 힘을 합해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결혼하여 가정을 갖는 것은 동물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최우선적인 통로다. 인간은 가정 없이는 그 창조목적이 성취되지 못한다. 창조가 다다를 종착지가 바로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들로 이 땅을 뒤덮는 것인 셈이다.    

여자 또한 그저 아이 낳아 키우고 살림살이하며 남편 뒷바라지 잘하는 것이 결코 그 존재목적이 아니다. 이브는 아담과 함께 이 땅에 드러날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초석을 세워나갈 조력자였다. 말하자면 둘 다 공(共)히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인간이 이런 신분과 위치를 벗어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간답지 못한 인간 즉, 동물과 같을 뿐이다.
    
그럼 그분의 동역자로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통치의 기본체계가 가정이라고 이미 정답을 말했다. 자기 자녀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자녀에게 유산 1호로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을 물러주라는 것이다. 그 자녀 또한 자기 자녀들에게 동일한 유산을 물려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지상 최대의 부귀영화를 누려봤던 솔로몬은 하나님 없는 형통과 호사는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했다. 오늘날 일류대학을 졸업하여 최고로 출세해도 솔로몬만한 위치에 오를 수는 없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차지해도 하나님이 없다면 공허한 신기루만 쫓은 것뿐이다.    

반면에 하나님 품안에 있는, 특별히 그분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신 가정을 가꿔나가는 신자는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정을 통해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는데, 다른 말로 그분의 동역자로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데 무엇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할 것인가? 이미 그분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다 당연히 그분이 지켜주실 것 아닌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가정이 그만큼 귀하고 그 안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단 한 명의 당신의 참 자녀를 데리고도 얼마든지 세상을 당신 뜻대로 변혁시킬 수 있다. 예수님도 제자들더러 당신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신자 한명이 불신자 수백, 수천의 인생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자 가정 한 가정이 숱한 불신자 가정에 거룩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남자가 기도하라.

본문은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려면 가장 먼저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한다. 데릴사위로서 처가살이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계(母系) 중심의 사회를 이루라는 것도 아니다. 부모로부터 독립 하는 것이 결혼이며 그 독립의 주체가 남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함께 살던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서 그들에게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동일한 보살핌과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독립이 더 이상 부모에게 심려 끼치지 않고 효도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자족이 되니까 얹혀 살 이유가 없다는 뜻도 아니다. 부부끼리 오순도순 재미있게 지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현대식 핵가족 제도를 선호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정신적, 특별히 영적인 독립을 하라는 것이다. 부모처럼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새로운 그분의 소왕국을 만들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 신자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주시는 까닭이 바로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서도 복음이 동일한 권능과 은혜로 실현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왜 꼭 남자가 주도해야 하는가이다. 하나님 당신이 남성이거나, 남성우위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창조하여 일을 맡기시고 여자는 그 돕는 배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는 나중에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으니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뜻도 아니다.    

미국은 각 독립된 주 50개가 모인 연방제다. 중앙정부는 외교와 국방과 연방 전체에 미치는 일만 전담하고 내치는 각주가 자치제로 수행하는 체제다. 그래서 국회도 연방하원 의원의 숫자는 주별로 인구 비례로 정해지지만 상원은 크든 작든 2명으로 제한된다. 주로 연방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다루기에 상원에선 모든 주에 동일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엔(United Nations) 총회에선 미국이든 아프리카 소국이든 투표권은 하나다.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聯合-United)하라고 했다. 연합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살펴본 대로 각 구성원의 투표권이 똑같이 하나라는 것이다. 남편(아버지)과 아내(어머니)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 자격, 임무, 특권 등에서 우열이라곤 없으며 정확히 동일하다. 하나님을 향한 발언권이나 그분께 받는 은혜의 질과 양에서도 전혀 차별이 없다.  

그런데 가정은 일반적 연합구조가 갖지 못하는 특성이 하나 있다. 남편과 아내가 매사를 합의하여 일을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정의 원주인이자 통치자는 엄연히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신자의 가정은 반드시 그분의 뜻대로 따라야 한다. 따라서 당신의 뜻을 올바르게 받아서 전할 자가 필요한데 바로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남자를 세우신 것이다. 또 그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라고 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남편과 아내 각각에게 보여주시거나, 둘에게 동시에 말씀하셔도 불완전한 인간으로선 혼동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가정에 질서가 생기지 않고 주도권 쟁탈전마저 벌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한 명의 대표자를 통해 가정 전부와 소통하길 원하신다. 당신의 뜻을 가장에게 계시하고 가장은 가족들에게 그 뜻을 전해 수행토록 해야 한다. 또 가장은 그 뜻을 수행하는 중의 제반 상황과 문제점과 결과들을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

신자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족 모두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대표자일 뿐이다. 자신의 독단적이고 인간적인 뜻과 계획으로 가족들을 이끌어 가선 안 된다. 불신자의 가정은 독재자 아버지 아래에, 심하게 말해 종들인 식구로 이뤄진다. 개중에는 민주적 합의제로 운영하는 인자한 아버지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화목해도 하나님 뜻을 자기 가정 안에 실현하고 나아가 이웃들 앞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인식은 아예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교회는 물론 가정도 당연히 포함됨, 남자들더러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다. 오늘날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자가 주로 기도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권면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자들 즉, 남자들이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가정과 교회 뿐 아니라 신자의 어떤 공동체라도 반드시 연합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또 그럴 경우에는 남자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 남자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해서 그분의 뜻을 깨달아 자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통해 그 뜻이 실현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를 가정의 대표로만 세웠지 당신 대신에 가정을 통치할 전권(power)을 준 것은 아니다. 단지 대표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고 또 그분의 뜻을 받아서 대신 준행할 권위만(authority)만 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자기 뜻대로 행할 자유와 힘이 있는 군주와는 달리, 선거로 뽑힌 대통령은 헌법이 제정한 범위와 국민들이 선거에서 보여준 총의(總意)의 틀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뜻대로만 운행되는 인간 조직체 안에선 대표자를 인간이 뽑는다. 대표자의 권한과 책임이 따로 규정되며 무엇보다 임기에 제한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라면 그 대표는 하나님이 세워야 마땅하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이자 최소의 교회다. 그 교회의 대표자로 하나님은 아버지를 세우시되 그 임기에 제한이 없도록 하셨다. 물론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그 역할을 어머니가 맡아야 한다.

대표자가 할 일은 가정의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참 목자로서 가족들에게 영적 생명력을 풍부히 공급해주어야 한다.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여서 가정 내의 범사를 하나님의 영적 진리에 따라 분별, 판단, 결정, 시행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하여야 한다. 가족들의 문제와 소원을 위해 주도적으로 또 합심하여 기도해야 한다. 예컨대 아이들이 아프면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 손을 얹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해야할 우선적 책임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사랑을, 아내는 복종을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가정에 관한 가장 상세한 가르침이 바로 교회론을 다루는 에베소서에 나온다. 바울은 가정이 바로 교회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5:22-6:4)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제정하신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주께 하듯 해야 하고,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하듯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선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5:31,32)고 덧붙였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큰 비밀을 찾아야 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는 동일한 관계를 부부사이에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공경하며 사랑하라는 상식적인 가르침을 말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책임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아내만 손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또 남편이 사랑해주는데 아내가 복종 못할 이유가 없다는 단순한 뜻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대표자로 세웠기 때문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의도적으로 남편은 그리스도에, 아내는 교회에 비교하였다. 우선 교회가 그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의 모든 대소사에서 무조건 남편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그 가정의 영적 지도자로서 남편을 대우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 말씀과 기도로 가족들을 영적으로 잘 양육시켜야 한다. 그래서 남편이 매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 결정, 시행한다면 아내도 어떤 일에서나 자연히 복종하게 될 것이다. 남편이 설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남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확신이 아내에게 있다면 그 잘못마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실 줄 믿기에 매사에 복종하게 된다.  

남편 또한 하나님의 결혼에 대한 뜻을 온전히 깨닫고 있다면 그리스도가 교회에 하듯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남녀 간의 애정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피 값으로 교회를 세웠다. 남편도 생명을 바쳐가며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아내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27절) 것이 하나님 뜻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결혼관은 단순히 부부가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며 끝까지 사랑하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가정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종교적 부담감이나 의무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성경 읽고 기도하며 예배 보는 습관을 가정에서 만들라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단순한 뜻이 아니다. 실제로 교회와 그리스도 간의 온전한 관계가 가정에서도 그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산 교회인데 어찌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가? 대신에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맡으셨다. 아버지(남편)가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아내와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찌 모두가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아비들더러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다.(6:4) 자녀가 아비를 노엽게 한다고 여기는 일반적 통념과 정반대다. 부모는 자녀를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부모의 욕심과 감정을 내세우다 보면 아무리 자녀의 앞날을 위한답시고 한 일이라도 자녀의 분노와 거부만 사서 오히려 더 망치게 된다. 역으로 부모가 자녀에게마저 주께 대하듯 하면 자녀가 부모를 노엽게 할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의 가정은 아버지이자 남편이 먼저 기도하는 가정이다. 가족끼리 단순히 화목하게 사는 정도가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온전히 바뀌어서 가는 곳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가족의 형통과 안일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기 위해서라면 모두가 기꺼이 수고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런 가정의 자녀라면 나중에 당연히 똑같은 모습의 가정 교회를 세울 것이다.

대표의 원리

현실에선 대체로 엄마가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며 교리도 더 잘 안다. 그럼에도 하나님 뜻은 아버지가 가정의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모세의 예처럼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대표자를 통해 다스린다는 원리가 가정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표자를 세우는 첫째 이유는 모두 다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200만 명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일일이 지시할 수 있겠는가?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 잡고, 특별히 당신의 뜻에 혼돈이 안 생기려면 그 통로가 확고하고 간결해야 한다. 아론과 미리암이 자기들도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받기도 하는데 왜 하나님은 모세하고만 대면하는 특별대우를 하느냐고 항의했다. 하나님이 그만 편애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의사소통을 위해 모세를 친구같이 대하면서 친밀하고도 정확하게 전했던 것이다.

모두가 똑 같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대표 원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볼 때에 모두가 똑 같은 죄인이기에 똑 같이 불쌍하게 여기신다. 당신의 공의로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대표되는 독생자를 대신 죽이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비는 가정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분께 세움 받은 영적 지도자로서 그 가정의 모든 일을 자기 생명을 바쳐가며 책임져야 한다.  

다른 종교에선 이런 대표 개념이 없다. 모든 이가 똑 같은 죄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히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기 다를 뿐 아니라  특별히 내가 더 우월하다는 자랑이다. 구원도 자기 능력이 뛰어난 자의, 그것이 아무리 선행이라 해도, 전유물이 되거나 우선권이 배당될 뿐이다.    

모든 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하다는 대표 원리는 필연적으로 연합의 원리와 연결된다. 동등하지 않으면 자격과 능력에 우월이 있다는 뜻이다. 자연히 그와 비례하는 계급과 지위가 발생하고 또 그런 공동체를 관리하려면 수직적 관리체계가 최선이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신자가 우월이 없기에 가정이든 교회든 어떤 기독교 조직체도  반드시 연합을 지향해야 한다. 결코 상하주종관계여선 안 된다. 불신자만의 혹은 신자와 섞여 있는 세상 조직체와는 달라야 한다. 요컨대 신자 가정에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절대군주 같은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연합의 의미

다시 말하지만 가정 교회에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수치로 표현하면 0.5 +0.5=1이 되어야 한다. 한 쪽만 있어선 한 몸 즉,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 아비나 엄마는 반쪽의 기능 밖에 하지 못한다. 둘이 합쳐져야만 완전한 하나로서의 역할이 유효해진다. 아내는 남편에게, 또 남편은 아내에게 영원한 반쪽일 뿐이다. 그래서 아담이 이브더러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묘사한 것이다.

신자의 부부관계나 가정은 바로 이런 점에서 불신자의 그것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이다. 불신자는 1+1=2라는 산수 밖에 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서 그렇다. 결혼해서 가정을 갖는 것도 둘이서 힘을 보탠다는 개념을 넘어서지 못한다. 혼자 살기 힘들거나 불편해서, 함께 사는 것이 경비도 절약하고, 나아가 맞벌이까지 하면 수입은 두 배가 되니까 결혼한다. 물론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것이 전제이긴 하지만 결혼하면 사랑마저 자연히 두 배가 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다 결혼의 목적이자 기대치인 2배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파열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는 1을 보태었는데 상대는 1만큼 기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랑도 결혼하면 더 뜨거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식더라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능력과 열심과 사랑에서 많고 적음을 상호 비교 평가하게 된다. 그 평가와 판단의 객관성 합리성 여부야 어떠하든 평생에 걸친 부부간의 힘겨루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불신자로선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또 그분의 뜻을 이루는 통로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오직 자신들의 소견에 따를 뿐인데 인간의 소견은 항상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다. 현실적으로 객관타당하게 따져도 한 쪽이 완전히 옳고 상대가 완전히 그른 법은 결코  없다. 거기다 둘이 합쳐야 온전한 하나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부족하고 불완전한 관계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따라서 부부가 단지 서로 힘을 보태는 관계에서의 힘겨루기는 오래하면 할수록 일방적 양보나, 알고도 속아주는 방식의 타협으로 밖에는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시쳇말로 정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둘 다 끝까지 상대에게 이기거나, 상대를 고치겠다고 겨루다보면 이혼으로 결말날 수밖에 없다.  

비록 힘을 보태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도 분명 선한 목적이긴 해도 하나님 없이는 인간적 한계를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온전한 부부 사이가 되려면 하나님 뜻 안에선 완전히 동등한 자격으로 연합해야 한다. 온전한 연합이란 바꿔 말하면 신자부부에겐 헤어지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합쳐서 연합하는 것이 목표인데 어떻게 헤어지겠는가? 반면에 결혼해 두 배 이상의 능률로 높이려는 불신자로선 그렇게 안 되면 간단히 헤어지고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것 같은 새로운 상대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의 연합된 부부관계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1+1=1이어야 한다. 성경도 분명 ‘둘’이 연합해 ‘한’ 몸을 이루라고 했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서 각기 동등한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선 각기 둘이었던 부부가 하나님 안에선 각기 동등한 하나로 만나서 진짜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결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부 각자나 가족 한 사람과도 상대하시지만 그와 동시에 부부, 나아가 가정을 하나로 보시고 역사하신다. 부부 중 한 사람이 혹은 가족 하나가 잘못하면 그 부부와  가정이 벌을 받는다. 반대로 한 사람이 잘하면 전체가 복을 받는다. 그렇다고 단체 기합 같은 성격과는 다르다. 신자간의 결혼은 아담의 고백처럼 이미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만나 결합한 것이기에 한 쪽의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은 자동적으로 다른 쪽에 그대로 영향과 결과를 미친다는 것이다. 또 부정적 여파일수록 부부와 가족 모두가 기꺼이 감수하며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더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연합을 이루려면?

아담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원죄 하의 죄인끼리 결혼해야 한다. 그럼에도 1+1=1 이라는 비논리적(非論理的) 기적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선책은 먼저 신자끼리 결혼하는 것이다. 부부가 되기 전부터 각자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제도에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제대로 깨달아서 그대로 따르도록 소망하고 실천해야 한다.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확신해야 한다. 비록 죄로 찌들어 그 형상이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왔기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아름답게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부가 공히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회복하여야 한다. 결혼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막중한 임무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안에서 결혼한 결과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5) 벌거벗었지만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이단처럼 이를 남녀의 성관계로 한정지어 해석해선 안 된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 대하여는 두려움이, 서로 간에는 부끄러움이 생겼다.(창3:7-10)

따라서 아직 그 둘 사이에 죄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초의 두 남녀가 육신적으로 나체였다 할지라도 아직 옷을 만들기 전이라 그것이 나체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육신적 부끄러움보다는 다른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죄가 개입되기 전이라 서로 감출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정말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의 부부사이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자 부부가 육신적으로 간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나 지당하다. 그보다 서로 간에 정신적, 영적으로 숨겨야 할 만큼 상대에게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짓을 해선 안 된다. 부부간에는 언제 어디서나 서로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숨기게 되고 이미 직간접으로 상대에게 죄를 범한 것이지 않는가?

혹시 잘못을 범하더라도 진정으로 고백하고 또 용서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그 이전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부부사이에 그러지 못하면 원수보다 배우자를 더 저주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고도 어떻게 함께 살을 맞대고 살 수 있겠는가?

에릭 시걸의 소설 러브스토리에도 “사랑이란 결코 미안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벌거벗는 것은 일차로 상대에게 죄를 안 짓는 것이기도 하지만, 죄를 지어도 벌거벗은 상대를 진정으로 용서하면 부끄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든 용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에선 미안해라는 말의 용도도 실제로 폐기 될 것 아닌가?  

물론 인간은 감성적 존재인데다 죄의 본성이 믿고 난 후에도 많이 남아 있기에 현실적으로 아주 힘든 과제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상에 불과하다고 제쳐놓아선 안 된다. 현실적으로 성취 가능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 전혀 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운 감정을 느낀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또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나님을 마음에 지웠기에 범죄하였고 그 결과 서로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데서 정반대로 치달았다. 불신자부부끼리 자기는 1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을 하는데 상대의 노력이 훨씬 못 미친다고 힘겨루기 하는 것과 같다.

그 부끄러움은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지어 입은 무화과 잎의 옷으로는 결코 가려지지 않았다. 그 심령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발단되었기에 겉으로 드러난 수치만 가리려 해선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 가시적 허물만 없애려 들면 아담과 이브처럼 상대에게 핑계 대는 것이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속에 곪아터진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 옷을 입고서야 최초의 부부는 번성하는 복을 누릴 수 있었듯이 말이다.    

신자 부부도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지 않고는 자칫 불신자 부부 같은 사이로 돌아가기 쉽다는 뜻이다.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둘 사이도 그렇게 된다. 부부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동일한 열심을 갖고 실천하라는 뜻이 아니다. 정말로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철두철미 부끄러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를 바라볼 때에 주님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죄인임을 절감하고 상대에 대해 주심의 긍휼하심으로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허물과 잘못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깨끗이 씻어서 원상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배우자를 자기가 사랑하고 용서하려 하기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죄인끼리 결혼한 것임을 절감하여서 그 결혼을 온전케 해줄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불신자 가정도 얼마든지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겠다는 인식은 전혀 없다. 아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한다.

신자의 가정은 달라야 한다. 엄청나고도 고귀한 하나님의 소명이 실현되는 그분의 일터다.  하나님은 신자 가정을 통해 인류 역사를 이끄신다. 단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는 연합된 부부사이를 통해서 말이다. 또 부모가 뜨겁게 기도만 하여서 자녀를 세상에서 출세시키려 하기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에 충성하는 자녀로 양육시키는 가정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진정으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된 가정을 통해 그 역사는 가장 풍성하고도 거룩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서두에서 했던 말로 다시 강조하자면 창조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은 바로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들로 이 땅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11/1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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