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실존에 관한 도박논증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그 표현법이 아주 사실적이다. 추상적 용어를 사용해서 상징적 암시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성경을 여는 첫 구절이자 믿음의 시작이 되는 창세기 1:1을 보라. 태초와 하나님과 천지와 창조 네 단어뿐이다. 환상, 동화, 전설, 신화적 요소들이 전혀 없다. 태초가 언제인지? BC 몇 년쯤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왜 유독 개신교만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하는지? 천지는 무엇인지? 창조가 인간에게, 특별히 지금 내 인생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없다.
다만 이 땅과 그 위에 실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당연히 인간도 포함하여 하나님이 존재케 했다는 선포뿐이다. 그래서 독자가 느끼는 본문의 뉘앙스는 굉장히 저돌적이고 일방적이며 독선적이다. 마치 이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하나님은 전혀 알 바가 아니며, 전적으로 인간 독자의 판단과 책임에 달렸다는 어투이지 않는가?
불신자를 전도하다 보면 자주 접하는 반응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지금도 살아계시어 인생만사를 통치하며 내 운명을 주관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누가 믿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안 믿어지는데 왜 자꾸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는가?”
하나님의 실존 여부에 대해 고래(古來)로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다양한 이론과 방식으로 변증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하거나, 샘플을 채취해서 실험하거나, 비디오로 그 실체를 찍어서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확정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신학자였던 파스칼이 그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도박논증’이라는 특이한 가설을 하나 제시했다. 하나님은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는 엄연히 사실이기에 사람들은 내기하듯이 베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자기 인생을 걸었다가 나중에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큰 낭패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이 계신 쪽에 걸어서 나중에 없다 해도 아무 손해를 보지 않으니 이왕이면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 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다들 처음 듣는 이론일 텐데도 이상하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처럼 아주 익숙하게 여겨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혹시 우리 생각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뜩이나 외롭고 고달픈 이민생활인데다 갈수록 세태가 각박하고 험난해지기에 신앙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여기지 않는가? 주일 교회에 나오면 설교는 지겨워도 찬양하고 기도하면 그나마 마음에 위로와 평강이 생긴 것 같지 않는가? 거기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고 하니 천국보험 드는 셈치고, 말하자면 파스칼의 말대로 밑져야 본전 식으로 믿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실존할 확률
지금 그런 생각을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왕 베팅을 하려면 더 확실한 쪽에 화끈하게 걸어야 한다. 져도 상관없다고 내기하는 바보는 없다. 어떡하든 이길 확률이 높은 쪽에 걸게 마련이다.
그럼 하나님이 실존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니까 50%인가? 힘든 일이 겹쳐서 새벽기도마다 울부짖으며 기도한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니 하나님 계실 확률이 한 20-10%나 될까? 아니면 비록 내 삶이 고달프긴 해도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으니 약 70-80% 쯤 되는 것인가? 이 모두가 정답은 아니다.
축구 시합을 하기 전에 양 팀 주장이 동전을 공중에 던져서 어느 면이 나오는지 알아맞히는 쪽이 선공(先攻) 혹은 진영을 선택한다.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라는 불변의 상수(常數) 두 개가 분명히 있다. 공중에 던져서 어느 면이 나올지 변수(變數)는 열 번쯤 던지면 번갈아서 다섯 번 정도 나오니 그 확률은 50%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존 여부를 따지면서 그분이 계신 것도 맞고 안 계신 것도 옳다는 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하나님에 관해선 변수가 발생할 여지가 전혀 없다. 불변의 상수 하나 뿐이다. 한 쪽이 맞으면 다른 쪽은 무조건 틀린다. 하나님이 있으면 100%의 확률로 완전히 있고, 없으면 0%의 확률로 무조건 없는 것이다.
지금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너무나 심각하고 진지한 주제다. 확률이 0%라는 말은 그 자체로 틀렸다. 확률은 일어날 가능성이 아무리 적어도 조금은 있어야 한다. 예컨대 무생물에서 아메바가 합성되어서 우연에 우연을 거쳐 오랜 시간을 지나 인간이 탄생할 확률이 아무리 소수점 이하에 제로가 수천, 수만 개가 붙어도 어쨌든 제로가 아니니까 진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확률 제로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일이다.
불신자들의 삶이 세상에서 재물, 권력, 명예 모든 것 다 갖추어도 여전히 갈급하고 허무한 까닭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의 탐욕이 끝이 없어서가 아니다. 탐욕이 많기는 신자도 마찬가지다. 무소유를 주장하며 실천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도리어 신자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구하지 않는가?
그들은 인생의 기원, 다른 말로 자신의 뿌리가 되는 부모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실존할 확률 0%에 걸었기에 친부모가 없는 고아 신세다. 아니면 소수점 이하에 제로가 수천, 수만 개 붙어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에 자기 인생을 걸었다. 고아가 인간이 고안해낸 입증하기 힘든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을 자기 친부모라고 떼쓰는 것과 같다. 본인이야 친부모라고 착각을 하든 말든 자유일지 몰라도 실상은 고아인 채 평생을 마치게 되니 그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 자아 자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무슨 일을 한들 자아 충족이 될 수 없다. 자기 인생관을 처음부터 아무 의미와 가치와 보람이 없는 허무의 철학 위에 세웠으니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작 문제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 쪽에 있다. 지금껏 하나님의 실존여부나 창조를 증명할 수 없기에 둘 중에 더 합리적인 창조를 선택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배워 왔을 것이다. 이는 틀린 말이다. 창조나 종교는 선택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믿음으로 영접 받아야만 되는 존재도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계신 확률 100%에 자기 인생을 건 자다. 100%의 확률이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니 무조건 일어난다는 뜻이다. 더 정확한 뜻은 따로 있다. 확률이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이다. 제로 %가 확률이 아니듯이 100% 또한 확률이 아니다. 즉, 미래에 속한 가능성으로 따질 이슈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 사실, 진실, 진리다.
하나님의 실존하시고 지금도 신자와 동행하심은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말로 창세기 1:1은 인간이 고안해낸 사상, 철학,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본문이 아주 무미건조하고도 담담하게 선포하는 까닭은 인간이 베팅하던 안 하든, 선택하든 안 하든, 믿든 안 믿든, 절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아름답게 혹은 자세하게 수식하거나 보충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칫 하나님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만 생긴다.
이 세상에 당장 종말이 닥치든, 이 지구상에 예수 믿는 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물론 그분의 영광에 전혀 변함이 없음은 절대적 진리다. 실감나게 이야기 하자면 여러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고난이 겹쳐서 출구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독방에 갇혀 있어도,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늘에서 감찰하고 계신다. 여러분이 울 때에 그분은 울고, 여러분이 한숨지을 때에 그분은 더 크게 한숨짓는다.
하나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신자들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인용되는 예화이지만 가장 적합하기에 들어보겠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가 주위의 온갖 훼방과 핍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혼자서 로마 카톨릭의 그 큰 세력에 대항하려니 힘에 부대껴서 큰 절망에 빠졌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까만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 장례식에 다녀오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하나님 장례식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루터가 “아니,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계신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다그쳤다. 아내는 곧바로 “지금 당신의 몰골이 꼭 하나님이 죽어서 없어진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
작금 기독교와 교회와 신자들이 아주 힘이 빠져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권능과 직분을 이미 하나님께 받았는데도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러다 못해 세상이 오히려 우리를 걱정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교회와 스캔들이나 목회자의 비상식적인 행태 때문인가? 신자들이 뒤로 호박씨 까는 위선적 모습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진짜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택한 탓이다. 믿어보려 한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절대적 진리가 정말로 진리로 받아드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처럼 이왕이면 신앙을 가지는 쪽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교회나 신자가 루터처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와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역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어찌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이 없어 고아처럼 살며 허무의 인생철학을 갖고 있는 불신자들이 어찌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와 성령의 전이 되어 있는 신자들을 걱정할 사태까지 일어나겠는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했더니 갑자기 슈퍼맨이 되었는가? 결코 아니다. 할례 없는 백성이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하니까 어른들은 두려워서 비겁하게 숨었는데도 소년이 하나님 대신에 그들을 징계하려 나섰기 때문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지 않을 리 있겠는가? 루터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일마다 최고 멋진 옷을 입고 나와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존재조차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기에 인간이라면 반드시 만나야 할 존재다. 짧고도 한번 뿐인 인생으로선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야 한다. 그분의 너무나 크신 권능과 은혜 앞에 완전히 엎드리며 항복하여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걸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사실과 진리는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가능성으로 국한 될 때에 믿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그분을 아는 것보다 그분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당신이 예정하신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도록 한 시도 쉬지 않고 이끌고 계심을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스스로 자존하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다. 당신의 영광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 당신이 말씀하신 약속은 그 단어, 아니 토씨 하나조차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신다.
하나님은 100%의 가능성도 초월하신 분이다. 단순히 전지전능한 정도가 아니다. 오로지 선하시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유일한 분이다. 인간은 저를 비롯한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그분에 비해 너무나 더럽고 추하다. 지혜, 능력, 자비, 공의, 위로, 평강, 기쁨, 자유, 사랑, 생명 등 모든 선한 면에서 100% 완전하신 분이다. 진화론자와는 전혀 반대로 소수점 이하 제로가 수천, 수만 개 붙는 정도의 눈곱이나 먼지보다 적은 잘못과 하자는 물론 그런 부족함조차도 없다. 여러분은 지금 바로 그런 은혜와 권능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단어를 하나님으로 대치하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고 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니까 일단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죄이다. 어떤 죄를 말하는가? 윤리적인 죄인가? 아니다. 율법 혹은 도덕으로 좋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니까 신자는 윤리적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신자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응당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럼 주일성수하지 않고 교회 봉사에 빠지고 기도와 말씀에 게으른 것인가? 이 역시 “종교로 좇아”라고 하지 않았다. 이 구절에선 믿음을 하나님으로 대체해서 생각해야 한다. 믿음의 대상이 도덕, 종교, 목회자, 심지어 신자의 기도의 능력이나 믿음 자체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좇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그대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아는 신자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반응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죄다.
로마서 문맥에서의 뜻도 그러하다. 당시에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여부가 문제 되었다. 우상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까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광대하신 하나님은 그런 종교적 의식과 절차를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 1:1을 절대적 진리로 알지 않고 창조를 선택하여 믿어 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이민 생활이 고달파서 형편이 나아지기를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해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의기소침해진다. 자기가 힘이 빠지면 하나님의 능력도 줄어드는 것 같다가 힘든 일이 더 겹치기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의심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좇지 않는 가장 첫 번째 죄인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친부모인지 의심할 수 있고 때로는 친부모라도 싫고 미워질 수 있다. 반면에 부모는 자기 배속에 낳은 자기 자식을 친자식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법은 절대 없다. 아무리 입으로는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 불평해도 속마음으로는 자기 목숨과 바꿔서라도 자식이 살아나는 길을 택한다. 하나님의 본심도 바로 그러하다. 우리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100% 확률로 실존하시거나 0%의 확률로 부재하거나, 이 표현이 불합리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사용하지만, 둘 중 하나가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 그분이 모든 인간에게 all 아니면 nothing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all이요 불신자에겐 nothing이다. 그분이 신자에게 모든 것, 생명까지 바치며 순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신자에게 당신의 전부를 주신다는 것이다.
아담이 원죄 후로 모든 인간의 영혼이 타락했다고 해서 포악한 죄를 즐기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부모가 없거나 모르는 고아로 태어나서 제 멋대로 행한다는 뜻이다. 저 또한 33살이 되도록 그랬다.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쳤다. 전도하러 온 친구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을 내 눈앞에 데려다 보이라고 대들었다. 완전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내 주먹보다 적게 취급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큰 벌을 받지 않은 것이 아찔하고 또 너무나 큰 은혜일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교만하고 완악했던 나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사시어 지금 이런 영광된 자리에까지 이끄셨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죄인인 저를 사랑하셨다. 그와 동시에 나의 그 모든 더럽고 추한 죄를 당신이 죽기까지 저주하셨던 것이다. 그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지 다른 길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100% 가능성만 믿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능력만 붙드니까 계속해서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투정밖에 하지 않는 이상한 교인들만 생겨났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100% 완전성, 절대성, 영원성, 거룩성을 믿는 것이다. 그분의 완전하신 진선미(眞善美)가 나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풍성히 드러나길 간절히 소망하며 실제로 조금씩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그 맛본 것을 주위에 나눠주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지금도 실제로 풍성하게 활기차게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주 전체와 맞바꿀만한 크신 사랑으로 이 우주에 단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시고 있다. 단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이미 통과한 자에게만 그러하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답게 인정하고 그분의 살아 계심을 아는 자다운 모습이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자에게만 그러하다.
하나님이 100% 확률로 살아계시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절대적 진리라는 것에는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남았다. 100%의 확률이란 그것을 막거나 훼방하거나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힘 혹은 존재가 우주 전체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확률은 99.99 %식으로 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신자에게 베풀어지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부족하게, 모순되게 만들 세력은 절대로 없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여기서 은사는 방언 신유 같은 능력이 아니라 공짜로 선물을 주신다는 뜻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심지어 사망까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그저 힘든 일을 기도해서 이겨내는 정도가 아니다. 물론 그 일도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힘든 일이 생기면 기도해서 겨우겨우 해결 받고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다시 열심히 기도하는 일을 평생 반복한다. 그러다 천국가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텐가?
물론 인생을 살다보면 내가 계획은커녕 예상도 하지 않았고 이해도 안 되는 고난이 불시에 덮칠 수 있다. 너무나 힘이 빠져 기도할 기력도 기분도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억지로 교회라도 나와 찬양을 들으면 그나마 위로와 평강을 얻을 수 있다. 또 마누라 등쌀에 밀려 교회에 나왔을 수도 있다. 이민 생활에 교제하고 정보를 얻으려 교회에 나오고 파스칼 식으로 밑져야 본전 식으로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절대로 여러분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의 놀랍고도 오묘하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은혜와 권능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올 자는 아무도 없다. 또 그렇게 나온 자는 단 한명도 예수님이 소홀히 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목표 둘
하나님이 신자에 대해 갖고 있는 궁극적 최종적 목표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예수님처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신분과 능력과 권세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성품을 주님처럼 거룩하게 바꾸신다는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사실 때에 그러했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신자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에나 선하고, 무엇에나 진실하고, 무엇에나 아름다울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자는 신자뿐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줄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하나님은 필요하시다면 강권적으로라도, 쉽게 말해 두들겨 패서라도 그 자리로 끌고 가신다.
비록 우리의 게으름과 죄로 인해 그 자리로 가는 속도가 더디고 방향도 지그재그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인생 말년에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 이르게끔 하나님이 인도하셨듯이, 우리도 반드시 그런 자리에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지 않는가?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당장의 단기 목표도 있다. 신자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신다. 루터처럼 절망에 빠져 하나님의 실존여부조차 의심하거나 알아도 잊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어 자기를 너무나 큰 사랑과 권능으로 붙들고 있음을 안다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지금 미국이 동성애나 낙태 같은 문제로 요란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비성경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어서 신자마저 어떻게 살아야할지 심란하다. 아무리 세상이 요동을 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오, 그 일을 신자가 대행하고 있다. 세상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는 자는 신자뿐이다.
여러분더러 선교사, 목사, 대통령 되라는 뜻이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바로 여러분의 직장, 가정, 교회에서부터 행동하라는 것이다. 당장 부부 사이, 자녀와 부모 관계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달라고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한다. 교회가, 직장이, 가정이 지금과는 전혀 딴 판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 불신자들이 바라보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부러워서 샘이 날 정도로 말이다.
아니 최소한도 여러분 자신만이라도 변해야 한다. 정말로 한 번뿐이며 짧고도, 무엇보다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인생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한번은 그분을 직접 만나봐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소원하는 자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반드시 깊이 깨달아 알게 해주시고 그 후 그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뒤집어주신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삶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를 받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친 것이 그분에게 기쁨은 될지 몰라도 무슨 큰 도움과 소용이 되겠는가?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기 인생의 소망과 목적과 능력으로 삼는 것 외에는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아갈 길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풍성한 어떤 일을 해도 허무하고 갈급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7/7/2013
(미국 LA 인근 Pasadena 소재 “사랑의 빛 선교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한 것임)
좋은말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