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6-28)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는가?
인간 타락 담화 (3)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절대적 진리가 없어졌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인간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진리는 없어졌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는 세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고 반발합니다. 실은 그런 비판 자체가 불합리하고 자가당착적인 오류입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부터 사실상 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되므로 그렇게 단정지어선 안 됩니다.
사람들도 이제 그런 모순을 알기에 다른 이의 사고나 믿음에 대해서 일절 간섭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연히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이 진리이거나 최소한 악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죄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세태로 굳어졌습니다.
현 세대가 이렇게 된 까닭이 인간이 탐욕적이거나 사악해서가 아닙니다. 문예부흥 이후에 사람들이 이성과 지성의 발달에만 집중하여 진화론을 받아들이고서 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절대적 진리의 자리에 올라서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지니까 그저 연약하고 어리석고 수시로 죄에 빠지는 인간들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할만한 자격도 근거도 필요도 없어져버렸습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물질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제 인간은 이 땅에 실존하고 있다는 한 가지 진리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그냥 어쩌다보니 이 땅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와 가치가 없어졌다는 뜻이므로 결국 인간은 물질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가 인생을 YOLO(You live only once)라고 정의내리고 자기 삶의 최고의 목적도 죽기 전에 자신이 정한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현 세대의 인류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물질만능주의 하나뿐입니다. 돈이 최고이고 돈으로 못할 것이 없습니다. 돈이 하나님을 대신해 온 세상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제 멋대로 조종하고 있습니다. 돈 자체는 아무런 인격도 감정도 의지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경제활동을 편리하게 하려고 결제수단으로 만들어놓고 오히려 그것에 코가 꿰어서 노예 노릇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 양심 아니 이성과 상식에 따라서 돈이 절대로 세상의 주인은 물론 내 인생을 주관하게 할 수는 없고 돈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고 돈에 좌우되는 것도 싫으니까 무소유 내지는 검소한 삶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면 그분 뜻대로 경건하게 살아야 하고 어쨌든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도 옳다고 시인해주어야 하는데 둘 다 기분이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본체이신 주님으로선 아주 굴욕적인 선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놓고도 인간들 스스로 경멸하는 돈이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와 권능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존재라곤 전 우주에 단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격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보다 높은 존재는 피조세계에는 없습니다. 영계의 하나님과 사탄만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쳐서 자신들의 뜻대로 이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면 사탄이 주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탄이 인간을 조종하는 최고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돈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인간더러 돈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탄에 미혹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최초 인간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생긴 원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속으로는 돈을 경멸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에게 굽실거리는 이유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만 높이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고 진화가 옳다고 믿는 불신자들로선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안락과 형통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스스로 의도치도 않았는데도 가끔 내면에서 들려오는 선한 양심의 소리에도 구태여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물질로 이 땅에 묻혀서 썩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돈이 전부인 인생관을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으니 신자를 향한 경고였습니다. 신자들마저 하나님을 이용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를 이 땅의 현실 삶에서 남들보다 위에 세워서 자랑하고 싶다는 옛날 본성에 잠시 넘어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고 선언했습니다.
신자가 그렇게 실패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처음으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자기 인생에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는데도 그 형상대로 온전히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신자의 삶에 충만히 발휘되면 하나님만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실 것이므로 돈이 주인이 될 만한 빈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으로 닮게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봐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따지면 너무 광범위하기에 알기 쉽게 간단하게 접근해보겠습니다.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했기에 동식물과 다른 인간 고유의 특성이 바로 그분의 형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원숭이의 그것과 70% 이상 일치하지만 동일한 자연 환경에 살아가야 하니까 하나님이 생체학적 시스템을 비슷하게 만든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진화론자들이 착각하는 겉으로 비슷해 보이는 그런 모습 말고 동식물에는 아예 없는 인간의 내면을 따져봐야 합니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구원이라는 주제에 맞추어서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첫째 형상
첫째로 동식물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나 인간만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 땅에 장구한 세월 동안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물질에서 진화된 존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고대인들의 지성이 열등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자기가 아무 의미 없이 이 땅에 던져진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 것입니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나 엄청나고 신기하고 오묘한 일들이 많습니다. 매일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데 단 하루도 거르는 적이 없습니다. 때로 불규칙적인 자연 재해가 있긴 해도 때에 맞추어 비가 내려 식물들이 자라고 그것을 식량으로 삼아서 동물도 자랍니다. 특별히 인간은 그 중에서도 과일과 채소를 골라서 재배하고 양념과 향료도 개발해 온갖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불을 이용해 다양한 문명의 도구들을 만들어서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였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일부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직후부터 볼수록 자연은 소름이 끼치도록 규모는 엄청나고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석양에 지는 노을은 물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마다 각기 사연이 있는 것 같고 멀리 하늘 너머에는 이 땅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윗이 그런 감동을 받고 지은 시편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1-6)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만물들이 정교한 질서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분의 창조증거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특별히 진화론이 절대적 진리가 되면서 대놓고 하나님을 의도적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물질이라고 자처했으니 그 인생은 썩어 없어질 물질에서 시작해서 썩어 없어질 물질로 끝날 뿐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짐승보다 도덕적으로는 선하다고 자랑할 건더기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했으니 인간사회에 통용되는 윤리는 인간끼리 서로 피해주지 않고 질서유지만 잘하려는 차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때로는 사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미와 꿀벌은 물론 하이에나의 공동체에도 자기들 나름의 질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식물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 질서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시적인 상징이지만 피조세계의 바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창조주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살고 죽음이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일부 동물들도 자기 죽음이 다가왔다고 본능적으로 감지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거나 창조주를 찾아서 영원한 구원을 소망 간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자신의 나고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뿐입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가 있고 그분이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있음을 누구나 본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9,20)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그분을 모른다고 절대 발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고 신묘한 자연만 자세히 살펴보고 또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만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그분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첫째로 그분에게 보일 반응도 순전한 경배여야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앞에 자신은 일개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고백부터 해야 합니다. 백년도 살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으로선 삶이 행복하던 불행하던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적 진리 되시는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둘째 형상
인간으로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다는 두 번째 뜻은 인간에게 언어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선 식물은 파장 냄새 색깔 곤충 등을 이용해 교신한다고 합니다. 동물들도 소리를 내어 의사를 전달하지만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인간 언어로는 의성어로 밖에 표기할 수 없는데 예컨대 닭은 꼬끼오, 개는 멍멍, 돼지는 꿀꿀 정도로 그칩니다. 자음과 모음이 구별이 안 되면 음절이 형성되지 않아서 단어가 생길 수 없습니다. 동물들끼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육 번성의 축복을 달성하는 데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소통만 가능할 뿐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되고 그것들이 순차적으로 합쳐서 음절을 형성하여 단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단어를 만든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의미를 인식해서 표현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동산의 모든 동식물에 이름을 붙였듯이 처음에는 단어에 눈에 보이는 기존 사물에 대한 의미만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해와 달이 뜨고 짐으로써 계절과 기후가 바뀌고 그에 따라 동식물의 생태계 사이클이 조화롭게 적응되는 모습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자신의 감정과 생각 등을 문장으로 구성해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로서 그 생각을 정리해서 언어로 체계화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두 번째 뜻입니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의도한 바에 따라 분별 판단 선택 결정 시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대로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언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반드시 닮도록 해주어야하는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게 할 청지기로 창조했다면 당신의 존재는 물론 그 뜻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말을 준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지 않고 또 그 뜻을 문장으로 체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주시지 않았다면 청지기로 세워서도 안 됩니다. 당신의 뜻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분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서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인간에게 말을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또 목걸이로 매단 짐승처럼 강제로 조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더러 자유롭게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하도록 허락하고도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현하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그분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광대하고 초월적이며 그와 동시에 굉장히 오묘하고 정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더더욱 말씀으로 하나님과 소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인생만사를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인간을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로 지으신 그 목적을 깨닫게 하고 실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 그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자기를 창조해 이 땅에 실존하게 하신 목적을 분명히 깨닫는 자라면 당연히 평생을 두고 그 목적을 실현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젠 인간의 직무태만이 됩니다.
바꿔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사실만 알아선 온전한 인간답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2:19,20)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자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야곱은 더 나아가 귀신도 한 분 하나님이 계신 줄은 안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형통과 출세만 구하지 그 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대로 행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자에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당연히 죽은 믿음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의 진짜 의미
다윗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게 움직이는 우주의 질서 안에 충만히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소리와 말씀을 그는 알아들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다윗처럼 자연에 이미 계시해 놓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좀 더 확실하게 당신 뜻을 알리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까지 주셨습니다. 나아가 모든 여건이 무르익자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18)
요한 사도가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8-10)
이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드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하나님 당신부터 온전한 사랑이신지라 인간도 당신의 사랑을 알아서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없어도 당신의 영광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인간만 특별한 방법으로 만드시고 만드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시고 당신께서 다스려나가는 모든 근거와 능력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그분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도 당연히 오직 사랑으로만 자연을 다스리고 인간끼리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는 신자란 바로 그분의 사랑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반면에 돈을 주인으로 삼는 것은 물질로서 자신을 풍요케 하려는 뜻입니다. 물질은 인간을 편리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인간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인간끼리 순전하게 사랑하는 일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절감하듯이 온갖 시기 다툼 죄악만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물질로 간주하는 불신자의 평생이 갈급한 것은 풍부한 물질로 생활은 편할지 몰라도 자연과 이웃과 가족과 특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에서 진화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인간과 차이는 오직 참 사랑을 하고 있느냐 하나뿐입니다.
구원 확신과 의심의 차이
이제 기독교 구원의 의미도 밝혀졌습니다.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자신과 주변을 주님의 사랑으로 다스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과 말씀으로 교제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정독 묵상해서 깨달은 진리대로 삶에서 순종하여서 그분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해야 합니다. 또 그 체험한 사랑을 주변 이웃에 나눠줘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특별히 그분 특유의 사랑이 계시된 성경을 온전히 절대적으로 신뢰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어려우면 성령님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하고 그것이 진리인지 실제 삶에서 실현해 보아야 합니다. 현실 삶이 어려워서 내 코가 석자이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고난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성경적 관점에서 분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주시는 것도 신자의 믿음만 테스트 해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을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는데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라면 반드시 그대로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뜻도 오묘하고 신령한 은혜를 부어주시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신자가 된 의미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고귀한지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주변 이웃들을 위로하고 함께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의심이 생기는 이유도 분명해졌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사회 질서 유지 차원의 윤리 도덕은 거의 없습니다. 일부 있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 대신에 기록 당시의 인간들의 어리석은 사고와 관습에 맞춰준 것들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두 다 동원했다는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선 당신의 백성을 이방인에게 오래 동안 노예살이를 시켰고 신약에선 당신의 종들을 목숨바쳐 순교하는 자리에 까지 이끄신 것입니다.
그 모두가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이고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이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면 오히려 인간을 좀먹게 하고 당신께도 진정으로 감사 경배는커녕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과 다릅니다. 인간으로선 전혀 예상치도 않는 상황과 장소와 시간에서 사랑을 베푸셔도 세상에 없는 완벽한 사랑입니다. 일단 그분의 그런 사랑을 받아본 신자는 세상에서 헛된 기쁨과 만족을 구하지 않으며 그런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통치하는 원리에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시대 장소 인간마다 표출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당신만의 완벽한 사랑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삼는 자는 자신이 어떤 수치를 당해도 돈을 얻으려고 돈과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들에 비겁하게 굽실거립니다. 하나님을 주인을 삼아 그분의 사랑을 받는 신자는 세상에서 특별히 돈으로 인해 어떤 수치를 당해도 돈과 그와 관려되는 모든 것들에 절대로 굽실거리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는 대상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뿐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애꿎게 옥에 갇히는 등 큰 핍박을 받았으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지 않습니까?(행5:41)
성경의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깨달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이미 구원을 얻었고 그 확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부터 성령님이 심어준 것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읽지 않는 자는 인간의 생각과 다른 그분의 뜻을 온전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 순종하려는 소원과 열정이 없으니까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는가, 혹시 잘못한 것이 있어서 구원을 취소하는지 염려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 수양도 아니고 마음을 통제해서 담대해지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천국행 증서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실제로 의사소통하면서 평생토록 그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몰랐다면 천하를 얻고도 정말 헛될 뿐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일은 무엇이든 어떤 희생을 치르고도 행하고 싶고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상을 잘 활용하여서 그분과 교제 소통하며 그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까? 최소한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모습으로 이곳에 살게 해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대로 실현하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습니까?
(5/8/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