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1-14)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평생을 두고 끝까지 해결 못하는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관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사춘기 이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많이 배우거나 적게 배운 것, 많이 가지거나 적게 가진 것, 몸이 건강하거나 병약한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누구나 동일하게 고민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해 “지금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내가 바른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듭니다. 최소한 무엇인가 부족하고 완전하게 다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꼭 나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바른 길을 가는 데도 만족할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차 좋은 집을 목표로 미친 듯이 살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도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상처를 주고받음으로써 생기는 깨어진 감정도 아닙니다. 남편으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학생으로 맡은 역할과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초조, 불안, 허망함, 무력감, 갈급함이 번갈아 들어 짜증과 분노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뒤틀린 감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 활동마저 위협될 때도 있습니다. 자기 인격과 품위에 훼손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제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런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스런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OOO 야! 너는 결코 이런 수준의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이 정도로 만족하며 인생을 끝내고 말 것인가?”라는 내면의 아우성을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욕심이 비정상적으로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는 교만 때문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좀 더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입니다.
사람들은 그 부족감을 어떻게 보충합니까? 공부 잘하는 자는 지식을 많이 쌓는 것으로, 운동 잘하는 자는 몸을 우람하게 가꾸면서 충족감을 구합니다. 고매한 철학과 심오한 사상을 파고들어 깨우치려 합니다. 독선과 편견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 아예 막무가내 인생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육체적 쾌락을 좇아 마약, 도박, 섹스에 탐닉하는 자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아예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포기하여 불가지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일을 함께 해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락가락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고 말지 “이게 아닌데”를 극복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런 낭패와 부족을 겪고 있지 않는 양 가면을 쓰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선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며 절대 남들에게 뒤쳐진 자가 아닌 양 과시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날 수는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은 좀 더 멋진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인간으로 품위를 더 완벽하게 갖추고 싶다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되어야 할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인간은 원래 항상 고급한 차원을 추구하며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선과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 본성 속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모든 자가 공통적으로 “이게 아닌데”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절대로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소원이 생길 수 없습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외부 상황에 좌우되는 인간이라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가기를 원할 리 가 없습니다. 더구나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꿀 것입니다.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아래 창조되어진 존재입니다. 그것도 인간 스스로 기대하고 예상하고 계획하는 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선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당신 대신 거룩하게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그 속에 당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인간 아담은 너무나 교만하게도 그 분 없이도 이 땅에서 제 마음대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마음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공포와 수치만이 남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그의 후손에게 단 한 번도 온전한 평강이 없는 인생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게 아닌데?”라고 후회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입니다. 죄를 많이 지었거나, 돈이 모자라거나,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았거나, 몸에 중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에레미야 선지자가 한탄한 대로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신자마저 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잘 살아 보려 하면 할수록 반드시 똑 같은 낭패를 겪게 됩니다.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가 “인간은 기생집 문을 두드릴 때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술 먹고 방탕에 빠져 있든 죽기 살기로 돈을 벌든 결국 그 모든 것은 자기 증명과 과시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속을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여전히 그 인생이 궁핍하고 갈급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로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해 봐도 애당초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려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상하게도 기생집을 갖다 온 그 다음 날이 가장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기생집을 찾아 가보지만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갈수록 더 허무해질 뿐입니다. 체스트톤의 당시에 ‘기생집’이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으로 치면 마약 같이 상실감을 메워 보려는 가장 고단위 시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의 시도에 무엇인가 효력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 번 찾아가야 하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이 세상에선 도저히 그 웅덩이를 채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파스칼은 “우리 각 자 안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빈 공간이라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 모양을 한 빈 공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빈 공간이 있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공복감(空腹感)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불신자들이 말로는 나는 하나님을 찾아 본 적도 없고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항변조차 인간 속에 하나님의 모양을 한 빈공간이 없다고는 증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알 수 있는데 불신자의 영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니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짝하고 신나게 지낼 때는 아무 고민 없이 지냅니다. 그러나 배 속에 음식이 다 소화되고 비워지면 자동적으로 공복감이 느껴지듯이 혼자 떨어져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갈급하고 허무한 심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공복감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채워야 하니까 또 다시 세상으로 나가 더 자극이 센 쾌락을 찾게 됩니다. 기생집 문을 계속 두드리는 자 치고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지’라고 끊임없이 후회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우리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한 죄들을 용서하시기 위한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십계명의 첫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부터 시작해 “도적질, 간음하지 말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 대신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입니다.
'다른 신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 외에 신들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속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그분을 닮은 빈 공간이 있는데 절대로 그 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우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상, 돈, 지식, 권력, 명예, 자존심, 체면, 위신 등등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어떤 것이라도 채우면 채울수록 인간의 삶이 더 고달파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제사와 제물을 받는 것을 좋아해 당신만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품 안에서 살 때에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기에 우리더러 제발 당신의 인도와 보호로부터 벗어나지 말라고 간절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한국의 110 볼트 전기기구를 미국의 220볼트에 꽂으면 어떻게 됩니까? 작동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꽂는 순간 고장이 나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순간 그 인생은 반드시 고장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따르면 결혼에 다섯이나 실패했었고 지금도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한 불쌍한 여자와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물을 두고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항변은 단순히 우물이 깊고 물길을 그릇이 없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해 봤지만 자기 인생이 허무하고 갈급하기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조상의 유전대로, 부모의 가르침대로 살아도 봤지만 내면으로부터의 갈급함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선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해도 다시 목마르게 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처럼 매년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봐야 그것으로 인간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이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위로와 평강으로 자기 영혼에 채워야만 인간이 참 인간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동행해야만 평생을 괴롭혀 온 “이게 아닌데”라는 고민이 비로소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화살같이 빨리 지나가며 단 한번 뿐입니다. 실패를 회복할 수 있게 두 번 세 번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뿐인 인생마저 대부분이 ‘이게 아닌데’라고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형통과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고 큰 업적을 남긴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영혼 속에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10주기 추모 예배로 모인 것이 교인이니까 제사 대신에 예배로 대체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생각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절대로 육신적인 것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살아생전에 호위호식하며 즐긴다고 그 삶이 복 받은 것도 절대 아닙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서 그분의 영으로 그 영혼이 깨끗이 씻음을 얻고 항상 그분이 주시는 생수를 먹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만나 그분의 은혜 안에서 그분 뜻대로 살고 있으면 세상에선 비록 궁핍하고 갖춘 것이 없더라도 완전히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나는 족하고 너무나 기뻐.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아무 의미가 없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요컨대 비로소 “이게 아닌데”라는 한숨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말씀보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묵상하여 이런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