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가정의 세 가지 모습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예수를 처음 믿게 되면 전혀 예상치 않은 일들이 발생해 깜짝, 깜짝 놀랍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란 당연히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며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도 못해본 일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놀라는 것은 성경에 이미 그럴 것이라고 다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경 지식이 모자라 잘 모르다가 그런 내용을 발견하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성경에는 심오하고 경건한 권면과 계명만 기록되어 있을 줄 예상 내지 기대했는데 그런 내용까지 있으니 더 놀라는 것입니다.
여러 예를 들 수 있지만 본문과 직접 연결되는 경우 하나를 들어봅시다. 처음 예수 믿으면 가족으로부터 반대가 가장 심합니다. 가족이 다른 종교에 심취한 것도 아닙니다. 무식하거나 비상식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아주 지성적이고 교양이 있어도 그렇습니다. 가족의 일원이 힘든 인생사에서 그나마 신앙의 힘으로 위로와 능력을 얻으려는데 훼방을 하니, 종교 자유의 권리를 들먹이기 이전에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론 한두 가지 이유는 있습니다. 우선 예수 믿으면 집안에 우환이 더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갓 믿은 신자나 그 불신자 가족 모두 그런 일들이 어떻게 하든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들려는 사단의 훼방임을 알지 못합니다. 또 바로 그래서 더 근본적인 두 번째 이유가 생깁니다.
불신자들은 이상하게 예수가 싫고 밉습니다. 그 원인을 제대로 대지 못하면서 무조건 맘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이 거짓의 아비 사단에 미혹되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의 부조리나 신자의 불찰을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로 들먹입니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말이 안 됩니다. 교회나 신자나 인간이 잘못한 것이지 예수님 그분의 하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를 온전히 믿을 필요가 있는데도 극렬히 반대를 하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리라 이미 정확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이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가족 간에 종교 문제로 불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께선 오직 사단의 수하에 있던 자를 건져내어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려 오셨습니다. 자연히 가족 간에도 당신을 따르는 자와 여전히 사단 편에 남아 있는 자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서 하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무례한(?) 것 같은 이 말씀을 알기 쉽게 풀면 세상에서 어떤 오해나 취급을 받더라도, 심지어 가족과 원수가 되어도 당신을 믿는 일이 인간으로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사람들 눈치가 보이고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것이 싫어서, 특별히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다툴 수는 없기에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실제로 예수 믿고 나선 불신자 가족보다 교회 구역 식구가 더 가깝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형제를 사랑하고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만에 가족을 만나도 이전처럼 신나고 즐겁지 않습니다. 그리 할 말도 없어집니다. 중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습니다. 종교 사상의 차이라기보다는 심령 깊숙한 흐름이 같은 방향으로 동조(同調)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쳇말로 영적코드가 달라진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집니다. 이전에는 세상에서 잘 나가는 형제, 사촌을 보면 배부터 아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는 대신에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니 속이 탑니다. 전도라도 하려면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고 미웠던 참인지라 아예 씨가 먹히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 말씀의 문자적 의미처럼 집안 식구가 정말 원수 같이 여겨집니다. 또 그러니까 그 반작용은 분명 아니지만, 구역예배가 기다려지면서 성도 간의 교제의 귀중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요한도 마땅히 그에 순종하여 마리아의 자식 노릇을 감당했습니다. 단순히 윤리적 효도 사상을 고취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친구의 부모는 자기 부모님처럼 공경하고 꼭 그럴 경우가 생기면 대신 모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삼강오륜에 철저한 동방예의지국 한국이 또 그런 면에서 가장 잘하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개념의 가족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이미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의 범위를 새롭게 정해주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처럼 동족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자만 이웃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현실적 신분과 위치가 어떠하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라면 전부 다 이웃이니까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전혀 혈연관계가 없어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꼭 같은 피를 나누지 않아도 엄마와 아들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선 모두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바람에 육신의 가족과 원수가 된 자에게 하나님이 새 가족으로 성도들을 만나게 해주는 셈입니다.
아니 실제로 같은 피를 나누었지 않습니까? 다 같이 주님의 보혈로 거듭났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신자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새 부모에 의해 제 2의 탄생을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에게 당신께서 육신적으로는 아마 가장 사랑했던 마리아를 부탁했지 않습니까? 그 두 사람이 새로운 모자 관계가 되는 결정적인 고리이자, 두 사람이 공통으로 소유한 것은 주님의 사랑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가르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호3:1-3)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며 영적으로 음란하게 타락한 것을 통박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음란한 아내 고멜은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지만 호세아는 사랑으로 그들을 다 받아주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다른 종교로 인해 핍박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원수들을 가족으로 삼았고 또 그 원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했습니다.
가족의 개념이 어디까지 넓어졌습니까? 아무 피를 나누지 않아도 동료 신자가 가족이었다면, 이제는 종교가 전혀 다른 원수까지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행음한 것까지 먼저 다 용서하고 받아주었으니 앞으로는 상대도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음란한 원수라도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미 호세아를 통해 그 가정 안에서부터 직접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당신으로 인해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효성, 존경, 섬김이라는 인륜적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과 불화하느냐 화목할 수 있는지가 오직 당신의 십자가만 기준이 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사단에 묶인 원수마저, 그것도 실제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준, 가족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다른 이와 간음하여 낳은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여 사랑해야 하는 것만큼 큰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이가 갈리는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 안 되면 다행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를 믿는 신자가 가져야 할 가족의 완성된 개념으로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로 인간 예수로 오신 주님이 육신의 아비 요셉에게서 그런 사랑을 받았지 않습니까? 요셉은 물론 꿈에 천사의 계시를 받았고 정혼녀 마리아의 품성을 익히 아는지라 성령에 의한 잉태임을 믿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또 사실이 아님을 믿으면서도, 불현듯 의심의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해도 주위 사람들의 곱지만 않았을 시선과 온갖 숙덕거림을 믿음으로 잘 감당해 냈습니다.
흔히들 마리아의 믿음만 칭송하지만 오히려 인간 (아기) 예수에게 요셉이 끼친 영향도 절대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요셉의 예표였고, 요셉은 또 호세아와 함께 원수까지 사랑하여 가족으로 삼으라는 주님을 따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될 가족의 개념을 이미 실천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가족이 되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모든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한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극도의 죄악에 빠진 도성 니느웨의 모든 사람을 아니, 그 육축과 하루 만에 시드는 호박 넝쿨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기후와 환경이 각기 다른 곳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나눈 자들은 반드시 서로 끌리는 구심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부모를 반드시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닮아 바로 그분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중간에 들어서 그 구심력을 깨트리고 반대로 원심력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거역하며, 인간끼리도 사랑은커녕 서로 시기하고 다투다 미워하고 저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태로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당신 가정(?)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이 땅에 새로운 혈연관계를 형성시킨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 가운데는 바로 이 온전한 가정의 개념의 회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원수도 가족으로 받아들여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을 내주케 하여서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이제 그 첫 열매로 피를 전혀 나누지 않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것입니다. 이제 신자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이브가 서로 전혀 감출 것도 없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사랑했던 그런 가정 같이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가정의 모습은 위에서 말한 셋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 예수 믿었다고 집안 식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하고 핍박하는 단계입니까? 집안 식구가 도리어 원수입니까? 격려는 못해줄지언정 종교의 자유는 인정해주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으니까 도리어 원망이 되고 또 슬프고 힘듭니까?
이제는 그 정도는 벗어나 성도들 간의 교제가 불신자 가족보다 더 친하고 따뜻한 정이 많이 오고갑니까? 정말로 교회에 함께 모인 것의 소중함을 절감하십니까? 그래서 한 성도가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혹시라도 시험과 유혹에 쓰러지면 자신의 가슴이 오히려 더 쓰라립니까? 그럼 주위 성도들과 예수님의 피를 함께 나눈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호세아, 요셉 같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도 자녀, 배우자, 부모로 받아 들여서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와 새롭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선 자기는 예수 믿었다고 원수 된 나머지 가족을 사단의 자식으로 포기하거나, 종교자유도 인정하지 않아 몰상식하다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선교하는 자세로 그들의 구령(救靈)을 위해 간절히 끝까지 기도하고 참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또 비록 예수를 같이 믿고 있는 직계 가족이 때로는 자기에게 원수 같아질 수 있지만, 그래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한 마음을 품고 진정으로 상대의 유익만을 위해 희생하고 섬겨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식을 노엽게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게 주께 대하듯 해야 합니다.
나아가 원수들도 실제로 자기 가정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들 모두가 고아원이나 양로원 원장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을 원수가 아니라 가족 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진리와 경륜 안에서 그들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그분의 심장을 갖고 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불쌍하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주님의 자식인지라 주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유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의 형식적 종교인의 모습을 띄어선 안 되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부흥의 길이 따로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신자의 가정만 온전히 회복되어도 됩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 되는 데서 출발하여 원수를 집안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아니 구태여 그럴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신앙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거의 다다른 상태입니다. 솔직히 우리 대부분이 평생을 두고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에 훨씬 못 미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의 가정만 회복되어도 됩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 끌고 가지만 안 해도 됩니다. 예수의 피를 함께 나눈 자들끼리 새 가족으로서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해도 세상은 기독교 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교회의 허물만 드러나지 않아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권능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역사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아니 첫 번째 단계의 가정만 제대로 되어도 부흥이 더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원수처럼 구는 집안 식구들에게 먼저 기독교 교리가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섬긴다면 말입니다. 어떤 핍박에도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자신이 다 감내해야 합니다. 또 그것들을 십자가 앞에 조용히 들고 나가 대신 사죄함을 간구한다면 말입니다.
5/23/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