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5:2-9)
너무나 이상한 베데스다 연못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정말 믿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진정으로 믿으시고 그 믿음의 바탕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마저 능치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일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어떻게 된 사정입니까? 본문만 해도 예수님이 38년 된 중풍 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쳤지 않습니까? 그것도 당장에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갈 정도로 완벽하게 말입니다. 당시 이 중풍병자는 우리 같은 믿음은커녕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믿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과 우리 신앙 둘 중 하나에 뭔가 잘못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또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에도 하자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본문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읽는 신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참으로 은혜롭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나 부럽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살기가 너무 힘든 때에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런 이적이 나의 삶에도 부어져서 병도 낫고 사업도 흥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도 병이 낫고 예수님을 만나도 병이 나으니 어느 쪽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도 고치셨는데 기껏 10년도 안된 내 병이야 눈길만 한번 던져 주어도 나을 텐데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봐도 본문 기사에는 조금 이상한 내용이 두 곳에 나옵니다. 우선 베데스다 연못은 하나님 은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입니다. 천사가 가끔 와서 물을 동할 때에 그 못에 들어간 자는 병이 나으므로 너도 나도 물이 동하기만 눈이 빠지라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뛰어들 참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캠핑을 가서 알코올버너가 터져 뺨에 불이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제가 생각해도 슈퍼맨처럼 바위 몇 개를 훌쩍 뛰어넘어 물에 다이빙했었습니다. 맨 정신에 하라고 하면 도저히 흉내도 못 낼 것입니다. 베데스다 물이 움직이는 순간 모두가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다이빙 선수 양성소인 셈입니다. 결국 가장 힘세고 빠른 자부터 먼저 들어갈 수 있었기에 가장 증세가 약한 자부터 나았다는 뜻입니다.
또 인간이 사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죄악이 썩어 진동합니다. 어쩌면 당시 그곳에도 유대 마피아가 장악해서 자릿세를 많이 낸 자부터 차례로 물에 넣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조폭이 없었다 해도 한국 지하철에 서로 타려고 밀치듯이 베데스다 연못은 환자들이 죽기 살기로 다툼을 벌리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습니다.
성경은 천사가 물을 동한다고 했지만, 천사라는 표현이 때로는 사단의 졸개도 의미합니다. 연못은 사단이 공중 권세 잡은 불신 세상일 뿐입니다. 돈과 폭력과 권력과 명예와 사기와 술수와 학벌과 가문 등이 행세하는 곳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 방식이 통용되는 전형적인 예일 뿐입니다.
너무나 이상한 예수님의 질문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던진 질문도 이상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가만히 따져 보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질문 아닙니까? 병자에게 하는 질문치고는 너무 어이없지 않습니까? 낫고 싶지 않은 환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정부나 보험회사에서 주는 보상비나 타먹고 병원에서 무위도식하려는 사기꾼 환자 말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중병 불치병 환자는 나으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중국이나 인도로 장기 이식을 받으러 갑니다. 시한부 불치병 환자는 새로 개발된 신약의 임상실험에도 어떻게든 낫고자 하는 심정으로 참여합니다.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아랑곳할 여유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효력을 보는 것이 더 급할 뿐입니다. 불신자는 용한 무당을 찾아 크게 굿판도 벌입니다.
삼십팔 년 된 중풍환자의 평생소원이야 오직 병이 낫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대로 일어나 걷고 활동하고 싶은 마음뿐임은 너무나 빤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스운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법한 질문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대체 무슨 뜻일지 곰곰이 새겨봐야 합니다.
그 환자는 당시 평균수명을 따지면 중풍에 근 평생이 붙들려 있었던 꼴입니다. 아마도 나면서부터 핸디캡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예 낫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뭔가 큰 사고를 당했거나, 뇌일혈로 쓰러진지 38년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치료비로 재산을 다 탕진하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주위 모든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가족조차 외면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고립무원일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야 아직 굴뚝같지만 행동으로 옮길 현실적 수단과 힘은 완전 고갈되었습니다.
힘이 세거나 돈 많거나 조력자가 있는 형편이 전혀 되지 않는 이 환자는 우물에 아예 뛰어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우물과 가장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그저 드러누워서 낫기를 반쯤 포기한 상태로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쯤은 남들이 낫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작은 위안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예수님이 환자를 먼저 알아보고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네가 그 모양 그 꼴로도 진짜로 낫기를 원하느냐? 정말 실오라기 같은 소망이라도 끝까지 잃지 않고 붙들고 있느냐? 한 줄기 빛을 보길 진정으로 소원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혹시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곳에 모인 모든 환자들을 다 치료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간절히 병 낫기를 기도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 이 중풍병자만 고쳐 주었습니다. 고쳐 준 자보다 고쳐주지 않은 자의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폭풍우도 잠재우고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께 분명히 능치 못할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분에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치는 것쯤은 정말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지금도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이 땅을 말씀 한 마디로 몽땅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꿀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능치 못하는 하나님은 심지어 이방인들도 믿습니다. 마태복음 6:32에서 이방인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비록 대상은 다르지만 자기들 신에게 열심히 구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진술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너무나 확실한 진리입니다. 전혀 틀림이 없습니다. 신자가 평생을 붙들고 살아야할 믿음의 금과옥조입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 붙들고 있으면 여러 가지 신앙적 부작용이 생깁니다. 틀린 신앙은 아닌데 반쪽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은 하나도 없지만 능히 하지 않는 일도 얼마든지, 사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많다는 점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반쪽 신앙의 실태
하나님이 능히 하지 않을 일도 많다는 것은 당신께서 꼭 해야 할 일만 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당신께서 꼭 이루고 싶은 일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심지어 신자가 뜨겁게 기도해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문에서 보듯이 환자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찾아와 주셔야만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꼭 하셔야 할 일은 어떤 일입니까? 예컨대 본문 환자처럼 연못가 병자들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한 병이라 고쳐주신 것입니까? 우리로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지만 본문에서 그 해답을 얻을 만한 힌트는 있습니다.
이 환자가 얼마나 연못가에 누워 있었는지에 관해선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38년간이나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누워있었다고 보기는 아무리해도 불합리합니다. 아마도 38년 동안 모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치료해보다가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엔가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정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오히려 자신을 더 절망으로 몰아넣는 곳입니다. 자기로선 도무지 뛰어들 엄두도 못 낼 장소입니다. 연못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또 다시 과대허위광고에 속았다고 여기고 차라리 완전히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은 잘도 나아서 돌아가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도 자기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가진 반쪽 신앙의 모습이 바로 이 환자의 마음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까 기도하면 분명 낫게 해주신다는 확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눈물이 마르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낫기는커녕 오히려 증세만 더 악화됩니다. 반면에 주위에는 병원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기도만 해서 나았다는 간증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 내보다 믿음이 훨씬 못한 것 같은데도 하는 일마다 형통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왜 나에게만 이런 비참한 고난과 가혹한 시련을 허락하십니까?”라는 당혹감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히 하지 않을 일도 많은 하나님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내 기도 제목은 어차피 응답되지 않을 것이니까 포기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장래 하실 일을 인간이 미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나 큰 불경이자 죄입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천하범사에 기한이 있습니다. 신자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응답됩니다. 심지어 기도드린 내용이 틀렸음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라도 응답이 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 기도가 틀렸다고 깨닫는 순간 이미 그 동안 고통 받았던 문제가 말끔히 처리되었거나 더 이상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바울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어도 가시는 여전히 몸 안에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에게 가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축복의 통로로 변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일단 역사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는 엄청나고 위대합니다. 너무나 놀랍고도 신비하게 이끌며 완벽하고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는 안 될 정도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지게 됩니다. 질적 양적으로 좋고 커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인간이라면 도무지 상상도 못하는 완벽한 방식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변해지며 또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꾼 신자를 하나님 쪽에선 절대 포기하지 않는데 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포기합니까? 마지막 실 날 같은 소망이라도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지금도 어쨌든 38년 만에라도 이 환자에게 주님이 먼저 알아보고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전부를 주신 예수님
능치 못할 일이 하나 없는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만 일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때를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또 믿음이 약해 그분의 방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우리의 눈에 능히 하지 않는 일도 많은 것 같은 하나님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베데스다 연못 쪽으로는 전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치셨습니다. 아직도 자기 힘이 남아돌아 주체 못하는 자들은 자기 힘으로 실컷 놀아보라고 버려둔 것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가장 어둡고 침침한 변두리로 찾아가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낮아진 곳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 당신께서도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내려가십니다. 인간이 절망하고 절망해서 이제는 더 이상 절망할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절망의 맨 밑바닥으로만 다니십니다. 침상을 눈물로 적셨던 다윗처럼 눈물을 흘리다 못해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없이 말라버린 자의 손을 잡고 대신 울어 주십니다. 깨어지고 깨어져서 더 깨어질 것이 없는 자를 찾아가서 그 깨어진 것을 다시 붙여주십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생명력 넘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있는 유에다 유를 더 보태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항상 완전한 죽음에 부어져서 태동합니다. 그분의 역사는 기력이 약해진데 힘을 조금 보충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전부 인간이 고안해낸 철학과 종교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너무나 엄청나고 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엎질러진 물은 결코 다시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아무리 완전히 죽어 있는 인생이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선 이미 엎질러져 끝이 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주지 않았고 자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주리고 헐벗은 것을 먹여주시고 질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으며 상처를 싸매주셨지만 그 모든 일들도 결국 당신의 전부를 십자가에서 주시기 위한 예비 조치였습니다.
바꿔 말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조금씩 공급해 주어야 우리가 참 인생을 살아가는데 궁극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잠시 편해질지는 몰라도 일생 전부를 걸 수 있는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질병을 낫게 해주어도 또 다른 병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중풍병자도 결국 다른 병으로 다시 고생하다 죽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38년 된 병에서 일어나 걷게 해주는 것이 예수님이 이 환자에게 주고 싶은 선물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중에 다시 그를 먼저 찾아가시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병 나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중풍이 걸렸거나, 나은 후에 또 죄 지으면 더 큰 병이 걸린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 직접 택함과 나음을 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모든 이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이 중풍 병자도 그 영생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겠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은 신자는 더 이상 이 땅의 순간순간에 매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예수를 몰랐던 이전에 갖고 있던 삶의 방식일 뿐입니다. 신자는 이제 영원에 맞닿은 자이니까 하늘에만 소망을 두고 썩어질 이 땅에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저와 여러분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썩고 썩어서 없어질 존재요, 헛되고 헛된 삶이요, 아무 의미와 가치와 소망이 없는 인생이었지 않습니까? 그대로 가다간 영원한 흑암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지 않습니까? 거창하게 죽음 이후를 고려하지 않았어도 진정한 행복과 만족과 위로와 평강과 자유는 없이 오직 염려, 불안, 초조, 공허, 눌림, 분노, 두려움들뿐이었지 않습니까?
예수가 없었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안락했어도 갈급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허공을 치는 싸움과 향방 없는 달음질 같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어도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와 위로가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아무 주는 것 없이 밉고 싫었던 예수였지만 이제는 그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며 주일날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지 않습니까? 여전히 내 주변에는 문제와 질병과 고난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
예수님이 만약 이 환자에게 “네 병이”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다면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남편도, 네 아내도, 네 자식도, 네 교회의 장로나 목사도, 네의 보기 싫은 이웃이나 상사도 아닌, 바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네 실체의 전부를 골고다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서 내어 놓아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의로운 것이 있는지, 아니 스스로 생각해도 선하다고 여길만한 구석이 있는지 진짜 솔직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짜 솔직한 실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철두철미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 비참한 상태 때문에 절대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가장 참혹하고도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절망의 심연에 그분 또한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오시어 인간의 고통과 수치와 두려움을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씻어주신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돈과 권력과 학벌과 명예와 술수가 판치는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이미 새겼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사랑 가운데서 끊을 것이라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우리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어떤 고난이 닥쳐도 인내하며 소망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이 이미 보장되어 있기에 환난 중에도 오히려 그 소망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38년이 걸릴지라도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그분이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 환자와 동일한 질문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지금 그 모양 그 꼴인데, 즉 도무지 세상에선 나을 길이 하나도 없는데도, 병을 고칠 수단과 자원이 완전 고갈이 되었는데도, 기도도 수십 년간 했었음에도, 심지어 이제는 기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는데도,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그분으로부터 직접 받아야 합니다.
이 질문은 예수 믿고 난 이후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분과 전인격적으로 교제하지 않는 한 우리 영혼은 날마다 순간마다 썩어지는 옛 본성으로 자꾸만 돌아갑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세상사람 앞에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도무지 죽이려야 죽일 수 없는 교만과 완악함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그분의 은혜를 상고하며 나의 나 된 것을 그분의 사랑, 자비, 긍휼 속에 완전히 잠기도록 해야 합니다. 한 시라도 그분의 생기로 호흡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단에게 내 영혼이 팔려 감을 빤히 보고도 제대로 붙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제 병보다 제 자신이 낫기를 원한다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 치유기사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 많은 기사를 볼 때마다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예수님만 바라보자로 그치면 자칫 그 자체가 종교적 구호 내지 주문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에게 병을 고치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 아닙니까?
전부를 주신 분께 전부를 드려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분에게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고 선교사로 헌신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만 붙들면 반 쪽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믿으면 주님에게 반만 드리는 셈입니다. 나머지 반쪽의 신앙 즉, 능히 하지 않는 일도 많으신 하나님을 분별하여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하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 단순히 우리를 연단하여 믿음을 성숙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인내력 테스트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실체 전부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는 어떤 더러운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절대로 진실하고 절대로 선하며 절대로 아름다울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신자 또한 그분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과의 교제에 어떤 죄악, 욕심, 거짓, 이해타산, 불신앙을 개입시켜선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평생을 두고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또 주님을 그대로 받으시고 사랑과 은총을 베푸십니다. 신자 된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또한 100% 완전히 순수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 먼저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100% 가난해져야 합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 하나 없음을 철저히 깨달아 정말 애통한 심령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통회하는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 정말로 완전히 깨어지고 부수어진 것 말고는 내어놓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신자가 그렇게 될 때까지 주님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시기에 신자의 눈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여전히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내 병을 고치고, 사업을 흥하게 하고, 주위 여건을 풍성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기보다는 내가 낫기를 원한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완전한 항복 선언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솔로몬 같은 영광에 둘러 싸여 평생을 지내는 것보다 여호와의 궁정에서 문지기로 하루만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되면, 비로소 능히 하지 않은 일도 많은 하나님은 사라지고 능치 못할 일이 하나 없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처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아도 전혀 두렵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을 알게 됩니다. 내 능력이 약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족해지는 체험을 날마다 순간마다 실제 삶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목사가 가장 목사다우려면?
그간 이 교회를 섬기던 K 목사님을 새로운 사역지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리게 됨을 함께 축하드립니다. 만약 목사님도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만 열심히 믿고 사역에 임한다면 자칫 그런 하나님이 내 뒤에 있으니 목사인 나도 능치 못할 일이 하나 없다고 과신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크고도 풍성하게 맺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전임자보다 실적을 더 올려야겠다는 양적 성장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능히 하지 않는 일도 많으신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목사마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하고 말씀만 보고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의 가장 큰 자격요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신학교 졸업장에, 목사 안수를 받은 권위에, 큰 교회를 섬기는 모습입니까? 물론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건이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과 사람들을 보며 우실 때에 같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웃을 때에도 함께 웃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울면 목사가 울고, 목사가 울면 신자도 울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신자가 울 때에 목사가 울고, 목사가 울면 예수님도 울게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울려면 그 자신부터 마음이 가난해지고 심령이 애통해져야 합니다. 절망의 맨 밑바닥이 어떤 곳인지 목사부터 철저하게 체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가장 외진 변두리를 찾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마다 그 속에는 두려움, 눌림, 한숨, 슬픔, 분노, 부끄러움, 더러움, 추함, 거짓 등이 각자만의 특유한 모습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도 38년 이상 된 것들로 말입니다. 사람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너무나 비참해지는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 목사님도 예수님처럼 베데스다 연못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런 불쌍한 자들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바꿔 말해 지금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 그 동안 본 교회에서 쌓은 사역의 경험과 지혜, 재료공학 박사까지 취득한 학술적 지식, 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는 영성, 목사까지 된 굳건한 믿음 등등을 빨리 전수해주어서 큰 사역의 열매를 맺어야지 하는 강력한 결단과 헌신부터 완전히 빼내어 버려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로도 새로 부임하는 교회 안에서 분명 아름답고도 선한 결과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일부를 주어 사람들의 일부만 얻은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숫자가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 개인으로 따져서 정서적으로 감동을 준 것이지 그 영혼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자기 가진 것을 신자나 불신자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진 것을 주는 것은 구제 활동가나 스승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전부를 주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살고 죽는 것뿐입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서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전부를 살려내어야 합니다. 교회 안팎에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으나 예수님이 진정으로 찾아가는 사람은 의외로 적을 수 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목사님을 새로운 사역지로 떠나보내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십시오, 말씀과 기도에 성령의 권능으로 입혀 주십시오, 사역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 항상 함께 하여 주십시오.” 등등의 기도와 후원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정작 목사님을 위하신다면 “오늘도 깨트려 주십시오. 낮아지게 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해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서 절망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게 하십시오.”라는 기도도 동시에, 아니 먼저 해주셔야 합니다.
요컨대 성도가 믿음으로 승리하여 자신의 전부를 낫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성도를 다스리는 방식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을 통해서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12/13/2009
(Ca Anaheim 소재 임마누엘 침례교회 12/13 주일 예배에서 행한 설교문입니다. 이전 저희 유학생교회의 교인이었던 분이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 대전에 있는 교회의 부목사로 청빙되어 부임하게 된 것을 함께 축하, 기도하는 예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