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성령질문 5/5-完)
[질문]
지금의 교회에는 배교와 신사도운동, 이스라엘이 키워드입니다. 조금만 예언, 환상, 이란 단어만 나오면 신사도로 찍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다하며 신사도로 몰립니다. ihop, 예수전도단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북한 선교를 하는 모퉁이돌 선교회까지 신사도로 묶어버립니다.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데 "이스라엘" 이 문제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서 기도해오고 있습니다. 근데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의 시선이 극과 극입니다. 아예 관심이 없는 분들이 더 많지만...... "회복"이라는 다큐를 만드신 김종철 감독이 이번에는 '제3성전'을 찍으시고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분의 홈피에서는 제 3성전에 대해 신학자들의 찬반토론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성령사역자들도 많고, 재림에 대해 얘기하고 선포하고, 극우파적 성향도 있고 프리메이슨이나 영적기류, 영적도해에 대해 공공연하게 설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지만 그렇기에 더욱 주목을 받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과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때야하며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지?
[답변]
땅 끝은 어디인가?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대화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정치적 해방의 미련을 못 버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 때는 너희 알바가 아니고 대신에 곧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직접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면 당신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당신의 이전 말씀과도 그 의미가 일치합니다. 따라서 복음이 온 민족에게 즉, 땅 끝까지 전파 되면 주님이 재림하시어 마지막 구원과 심판을 시행할 것입니다.
그럼 대체 땅 끝은 지리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대표적 해석 둘만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고,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고, 또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천사들이 증언했으므로 재림도 예루살렘으로 하실 것으로 봅니다. 또 지구를 지그재그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간다면 결국 출발한 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며 그것이 가장 먼 거리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로마서 10,11장에 이스라엘에 복음이 이방인보다 나중에 전해진다는 진술에도 부합됩니다.
“땅 끝”이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에서는 먼 나라를 뜻합니다. 사마리아를 넘어 우상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에게도 전하라고 하셨기에 땅 끝은 이방의 오지(奧地)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나 남미의 원시종족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먼 나라가 이스라엘의 대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원수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해석 중 하나만 아주 강조하거나, 옳다고 내세우면 균형을 잃게 됩니다. 상호 비슷한 의미를 주장할 때는 그런 현상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상반(相反)되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더 혹은 자기만 옳다고 강변하게 됩니다. 즉 양 극단의 진영들이 서로 상대를 향해 성경 해석을 잘못했다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땅 끝”을 복수의 의미(ends)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이면 어디라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민족, 문화, 관습, 언어, 사상, 제도, 종교를 초월해서 십자가 복음은 외모의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확실한 사실은 예수님이 땅 끝으로 이스라엘이나 이방 둘 중 한 곳으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를 물었는데 주님이 땅 끝까지라고 답했으므로 이방 땅도 당신께서 회복될 땅에 이스라엘과 함께 포함됩니다. 또 십자가 복음이 유대인을 필두로, 당연히 북한도 포함해, 모든 민족에게 편만하게 전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믿어 구원 받은 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다시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없을 때입니다. 나아가 오히려 참 신자가 찾아보기 힘들 때에 오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 때의 대환난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분명히 소수일 것이며, 사람들이 자기와 돈만 사랑해 부모까지 거역하는 판에 하나님은 더더욱 찾지 않을 것이며(딤후3:1-4). 주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0고 한탄하셨기에 말입니다.
이스라엘 회복 운동과 문제점
작금 정말로 이스라엘 구원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한쪽에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그곳으로 강림하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자며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습니다. 다른 쪽에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구원계획을 갖고 있는 것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재림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단적 사상일 뿐이라고 비난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주장하는 쪽은 그 신학적 배경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에 두고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고 있다고 하셨으니 이미 기본적 이해를 갖고 계실 테고 지면 관계로 구체적 설명은 생략하고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세대주의는 영국의 존 다비가 창안하여 미국의 스코필드 박사(관주 스코필드 성경의 저자)가 발전시킨 신학이론으로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교리를 견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되 시대(다비와 스코필드는 7시대, 워치만 니는 8시대로 구분) 별로 다르게 이끈다고 즉, 각 시대별로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특별히 계시록을 상징과 예표 등을 분별하지 않고 너무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인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점입니다.
그 세대 구분에 따르면 현재 이미 6세대까지 지났고 마지막 7세대가 되었기에 임박한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또 문자적 해석을 하기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 때에 교회가 공중 들림 받았다 7년 환난 후에 다시 함께 지상 재림을 하여 천년 왕국을 지낸 후에 마지막 심판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러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 왔지만 그들이 거부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하여 이방인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재림 때는 그렇게 보류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을 다시 성취하려고 예루살렘에 재림하여 유대인만의 왕국을 세워준다고 합니다.
이런 사상은 필연적으로 어서 빨리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예수님 재림을 맞이하자는 Back to Jerusalem 운동으로 결말지어집니다. 구약의 언약들이 예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 보류되었기에 종말에 다시 이스라엘을 육적, 영적으로 회복되어 그들만의 구원이 따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고 구약 제사를 드리자는 최근의 동향은 유대인들 스스로 자기들 전통과 구약의 구원관에 따라 행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동의 동참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단순히 종말의 한 가지 사소한 징조로 참조하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징조라고 표현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성전이 완성되면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시한부 종말론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꼴이 되므로 공개적으로 말세의 징조라고 이야기할 성격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현세대의 영적 흐름의 한 가지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교회는 신약 교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고, 또 인류 역사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보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사상입니다. 특별히 종말에 이스라엘만의 특별한 방식의 구원과 그들만의 특별한 왕국이 따로 세워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의 모든 족속을 위해서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에 이뤄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의미는 실종되며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도 완전히 허사로 돌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대체가 아니라 계승과 성취다.
이스라엘 회복 운동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극단인 대체신학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버려졌고 대신 그 자리를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완전히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에 그들에게 행하는 박해와 차별 즉, 시오니즘이나 홀로코스트 등을 당연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 안에서 성취한 것입니다. 우선 신약 서두에 침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즉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인물로 성경이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열두 사도를 유대인으로 세웠지만 그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전도사역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위임했습니다. 당신께서도 직접 이방인들을 구원했으며, 그분의 혈통에마저 이방인의 피는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을 뿐 아니라 세상의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을 불러내어 그로 인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언약을 세운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바로 이 제사장 나라의 소명이고 교회는 그 소명을 이어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은 신자는 아브람의 혈통이 아니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의 혈통적 후손들도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새로운 이스라엘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따라서 정통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은 대체신학을 주장하지 않고 그런 용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특별 구원을 주장하는 쪽에서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특정 신학자가 그런 이름으로 특정 신학이론을 발표 내지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중세 가톨릭이 교회가 구원을 독점하고 있음을 변증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교회가, 할례를 유아 세례가, 제사장을 사제가 대체했다는 등의 이론을 내세우며 그대로 실행한 적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교회가 그 위치를 대신 차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일부구절을 곡해한 신자들이 유대인과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빈민을 박해하는 오류를 범한 적은 있었어도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예수님은 당신의 피 값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사시고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는 자는 누구라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 둘이”라고 명백히 밝혔지 않습니까? 제 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릅니다. 첫째 아담 안에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전혀 없었듯이, 둘째 아담 안에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만 따로 특별히 우대하거나, 그 반대로 특별히 차별 할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을 우대하라.
설령 이스라엘 우대 혹은 별도 구원관이 옳다고 해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정해서 말한 것임,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미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종족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기술된 유대 전통과 관습을 그대로 지키는 정통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안에 다수가 아니라 소수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유대인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요셉이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할 때부터 혈통적 단일성은 사라졌고, 가나안 정복 이후로 더 심화되었습니다. 거기다 개종한 이방인을 다 받아들였고 디아스포라로 세계 각지에 흩어졌습니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유대인은 종족이라는 개념보다는 모세오경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라고 봐야 합니다. 요컨대 꼭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원하면 아직도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도 함께 회복시켜야지, 그러지 않고 “백 투 예루살렘”만 강조하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통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 중 일부일 뿐만 아니라, 가장 종교적인 도시 예루살렘에서도 전체를 대변해주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 15~20% 정도를 차지한다. ...중략... 따라서 한국 교회가 눈물로 외치는 '이스라엘 민족'은 명확히 그 대상을 가리킬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셈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종교적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인지, 관습적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인지, 백인·흑인·황인 혈통의 유대인 중 일부 혹은 모두를 말하는 것인지, 세속적 유대인을 말하는 것인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시민들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모두를 통틀어 부르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추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사용돼왔음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참조하시라고, 뉴스 앤 조이에서 금년 4월에 이스라엘의 실상을 다룬 4회 시리즈 기사에서 극히 일부만 발췌 인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마저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박해했던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려면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저지른 동일한 잘못에 대해서도 동일한 열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운동을 함께 전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그릇된 종말관에 따라, 혹은 이스라엘만의 특수구원을 교회가 나서서 돕거나 촉구시키겠다는 의도라면 비성경적인 일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이차대전 후로 기독교 교회는 이스라엘을 도리어 편애해 왔습니다. 미국은 정재계를 움직이는 유대인들의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오바마 이후 변화의 기미가 약간 생기긴 했지만, 친이스라엘 정책을 고수해왔습니다. 미국교회도 마찬가지였고, 미국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도 그랬습니다. 아니 초창기 선교사들이 당시 미국 신학계의 주류흐름이었던 세대주의 출신이었던 관계로 처음부터 친이스라엘이 한국교회의 일관된 흐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껏 이스라엘을 편애했던 서방기독교 국가들은 물론 함께 동참했던 한국교회들은 이제부턴 그 반사적 불이익과 박해를 받은 종족들에게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직접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회복을, 넓게는 중동의 무슬림의 선교에 더 주력해야 합니다. 최소한 중립적으로 공정한 입장에서 동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편애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에서 특별한 위치와 특별한 은총을 누린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의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4,5)
그들은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조상 됨 등을 받아 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진중에서 항상 함께 행하시며 당신의 능하고 의로운 손으로 세밀하게 인도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세상 어느 민족이 알지도 못하는 온갖 이적들을 베풀었습니다.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랐기에 그분의 오묘하고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조상되는 은혜 즉,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진술에 주목해야 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말씀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려면 반드시 특정 민족, 특정 가문을 통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나 어떤 가문이 선택 받을만한 충분한 조건과 자격을 갖추었기에 주님이 그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가문은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을 따로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그 반대로 당신께서 먼저 불신자, 아니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람을 택한 후에, 성육신 진리의 의미를 가장 잘 계시할 수 있는 제반 조건과 상황을 당신께서 조성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역사 전부는 그 택함 받음에서부터 AD 원년까지 골고다 언덕의 절정을 더 확실하고도 밝히 보이기 위한 배경으로써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도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구원도 그분의 일방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의 반석에서 생수가 날 때도 그리스도가 함께 했다고 성경(고전10:4)이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 선택의 이유를 명시적으로 밝힌 유일한 구절에서도 유대인들이 절대 남들보다 의롭거나 예뻤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가장 적은 민족을 택했으니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두면 다른 민족으로부터 멸절될 너무나 적은 종족을 선택했기에 어느 민족도 체험하지 못한 이적으로 보호 인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러니까 그들의 놀랍고도 신비했던 역사가 유대인 스스로 달성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은혜였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준 까닭도 그런 하나님을 택함 받은 관계에서 친밀하게 아는 백성답게 우상을 믿는 모든 족속 앞에 당신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드러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은총을 많이 입은 민족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더디 믿으니까 초대교회 당시의 많은 이방인들이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두 사도 모두가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 교회가 첫 교회였음에도 그러니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11:25)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먼저 많이 믿게 한 후에 유대인들도 믿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가장 더디게 회개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과 종교성에서 가장 의롭고 경건함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님 십자가의 차별 없는 의로움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유대 종족은 지금도 가장 똑똑하고 의로우며 민족적으로는 하나가 되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택함은 인간의 의로움과 교만이 십자가 은혜와 얼마나 상충되는지 보여준 극명한 예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0, 11장에서 말하는 바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전후 순서일 뿐입니다. 바울 당시에 복음을 쉽게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유대인들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변증입니다. 마지막 때의 이스라엘 민족의 거족적 회개를 뜻하지 않습니다.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는 말에 민족 전체라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또 이방인의 충만한 수자와 그 들어오는 시기는 물론 재림의 장소에 관해 인간으로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특정하게 한정 지어 말해선 안 됩니다. 이전에 복음이 왕성했던 서구는 지금 오히려 신자 수가 현저히 줄고 있지 않습니까? 또 계시록(3:12, 21:2)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예루살렘과 동일시하는 세대주의적 오류를 답습해선 안 됩니다. 새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는 모든 이를 지칭하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구원의 절대적 두 요소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벌이는 쪽과 그들을 비방만 하는 양 극단 다 결정적 오류가, 최대한 양보해도 성경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사상 전개에 구원의 절대적인 두 요소를 감안하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은 절대 개인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가데스 바네야 사건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구원 받았고, 심지어 쌍둥이 중에 에서는 심판을 야곱만 구원 받은 예에서 보듯이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도 오직 개인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한 민족의 전체적 구원은 아예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은 그들 전부를 구원코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특별히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특별한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많은 유대인들의 회심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와 숫자는 정확히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아주 많은 숫자라고 확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바울조차 “더러는”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했지 않습니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환난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소수이며, 말세에는 온전한 믿음을 보기가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을 집단적 의미에서 회복시키겠다는 발상 자체는 비성경적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런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동일하게 한 사람씩 복음으로 초대해야지 집단적인 선교 운동을 벌여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지에 들어가거나 외국에 있거나 간에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에 정통하고 지난 역사 관습 문화 언어 등을 숙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유대인 제자를 양성해서 그로 전도토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한국교회가 집단적 일회성 행사로, 그것이 정기적이라 해도, 시행하는 것은 복음을 현지 사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토착화 상황화(contextualization)에도 역행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구원은 물론 부흥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인위적으로 부흥이나 구원을 확장하거나 앞당기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개인적으로 순종만 하면 됩니다. 종교개혁도 루터 혼자서 시작했지 않습니까? 노예해방도, 미국의 영적 각성도, 동독의 자유화도 여러 교회가 연합한 조직적 운동으로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작은 주의 종이 주님께 받은 그 소명의 작은 불씨가 너무 소중해서 지키고 키워나가니까 성령의 큰 불로 주님이 붙여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부흥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지난 죄를 통회 자복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도덕적으로도 성화된 삶을 실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죄에서 회개와 성결의 동기와 목표가 조금이라도 퇴색되거나, 인간의 전적 낮춤과 주께 전적 의존이 상실될 때는 부흥은 사라졌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회복 운동은 각 개인의 전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스라엘 전체를 회복시켜서 주님 재림의 영광에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확히는 인간들이 아무리 힘을 합쳐도 절대로 재림을 앞당길 수 없습니다. 시기와 장소를 예측하는 것도 금물이며, 아니 그런 시한부종말론은 이단입니다. 최대한 양보하여 특정 지역을 땅 끝으로 오해하고 그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겠다는 것도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재림을 예비하는데 주력하면 다른 지역의 수많은, 바로 우리 종족인 북한의 불쌍한 영혼들은 외면하겠다는 뜻입니까? 바울이나 모세처럼 동족의 구원을 위한다면 자기부터 심판 받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자기 혼자만 구원 받고, 자기 혼자만 주님의 영광을 보거나, 최소한 마지막 때에 자기는 큰일에 동참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헛된 욕심이 그 깊은 속내에 있지 않는지 모든 참여자들이 깊이 솔직히 성찰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취할 태도
비록 이스라엘은 복음이 시작된 곳이니까 그곳에서 복음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또 성경의 관련 구절들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재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추측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도 즉, 모든 예언이 달성된 후에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삼 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며 직접 배운 제자들마저 그랬습니다. 오직 성령이 깨우쳐주신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약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과 맞대면하여 구원이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대하게 주님을 마중하려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는 주님은 일부러라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정말 이름 없는 선교사가 아무 빛도 없이 섬기는 너무나 초라하고 열악한 곳으로 재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영광중에 심판하러 오시기에 초림 때와 달리 권능을 갖추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주님은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에 온전히 순종하는 신자 곁에만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스라엘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모든 나라와 동일하게, 정확하게는 불신자라는 개인적 차원으로 대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마음에 안타까우면 그냥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주면 됩니다. 선교사의 소명을 정말로 받았다면 다른 나라에 선교 가는 것과 동일한 준비와 각오로 실행하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이라고 특별 대우할, 특별 차별할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은 땅에 떨어져 썩어 죽는 밀알이 됨으로써 다른 이로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덧입어 살아나게 하는 모습으로만 실현됩니다. 모든 신자는 땅 끝까지 가야하는 선교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땅 끝은 아프리카 오지도, 예루살렘도 아니라 그 모두를 포함하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모든 곳, 정확하게는 불신자들 모두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학교도 심지어 교회도 선교지입니다. 그 선교 사명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가 아니라, 자기 죽을 때까지 열심히 충성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선교는 정말 소명을 받고 전문 훈련을 받은 자에게 맡겨 두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집단조직으로 운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불쌍하고 소외된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하셨고, 제자들은 그 일을 보고 배우게 하려고 동반시켰던 것입니다. 돈 궤 맡은 회계 한 명과 칼 한 자루만으로 충분했던, 조직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조직이었습니다. 그 조직마저도 결정적인 순간에 다 붕괴되었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만 빛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의 말씀만이 부흥과 구원의 주역입니다.
신자는 평소에도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종말을 위해 특별한 일을 계획하거나, 심지어 종말을 대비해서 기도하거나 종말에 대해서 성경 공부하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말주의가 되며 알게 모르게 혹은 결과적으로 종말과 구원을 인간이 주도하려는 꼴이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항상 자기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충성하며 자기에게 맡겨준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 복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일 당장 종말이 임할지 모르는데, 그래서 지금 내 앞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수천 마일 떨어진 말도 안 통하는 유대인을 돌볼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또 그러다 멸망한 자 가운데 친구 친척 친지는 물론 배우자와 자식과 부모가 포함되어 있으면 대체 어떡하겠습니까? 그 구원이 과연 영광스러울 것이며, 무엇보다 주님께 칭찬 받을 구원이겠습니까? 도리어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기쁨을 받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분의 재림을 영광 가운데 마중한다는 말입니까?
한 마디로 신자가 이스라엘을 종말적으로 대하는 자세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선교는 전문선교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현재 있는 자리에서 주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또 그러는 것이 바로 깨어서 경성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성경적인 올바른 모습입니다.
11/6/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