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5:8-11 갈릴리 호수 가의 이상한 배 두 척

조회 수 693 추천 수 16 2009.09.19 15: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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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가의 이상한 배 두 척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눅5:8-11)


갈릴리 호수의 어부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그런데 한 이상한 랍비가 나타나 이상한 방법으로 그로선 평생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많은 양의 고기를 잡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고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 도움을 받을 정도로 잡게 되었으면 응당 기뻐해야 할 텐데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는 죄인이니 떠나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아서 불법어로 죄라도 범한 것입니까? 아니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ㅁㅏㅊ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라고 예수님을 잠간이라도 온전히 믿지 못한 죄를 용서해달라는 뜻입니까?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의 어부로 호수 속을 눈감고도 그려낼 만큼 훤했습니다. 그럼에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해 그날은 공치는가보다 단념하고 호숫가로 배를 끌고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 참에 목수로 고기잡이의 경험과 상식이 전혀 없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한 말은 그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했습니다. 고기잡이는 주로 밤에 하는데 지금은 태양이 활짝 비취는 아침인데다, 그물도 적당한 깊이에 내려야 하는데 깊은데 내리라고 했고, 이미 깨끗이 씻어 정리하고 있는 그물을 다시 내려야 하는 번거로움마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밤새 얻은 것이 없지만은”이라고 의아심과 불만에 차있는 자기 속내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리겠다고 말한 것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고기가 잡히리라고 온전히 믿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전에 뱃머리에서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여타 랍비와는 다른 권세가 있음을 느꼈기에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그래도 한번 믿어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물이 터질 정도의 고기가 잡혀 두 배에 싣고 보니 배가 물에 잠겼습니다. 말하자면 갈릴리 어부조합이 생긴 이래 초유의 일이, 아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어디에 물고기가 많이 모였는지 아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호수 속의 고기를 자연의 법칙과 전혀 상관없이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는 뜻입니다. 물의 온도와 흐름,  풍향과 풍속, 날씨와 지형 등을 시간대와 연관해 고기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인간의 지식수준을  엄청나게 초월한 것입니다. 아니 아예 그 차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원래 전문가가 전문가를 더 잘 알아보는 법입니다. 갈릴리 최고어부 베드로로선 이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다른 말로 그는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이 랍비가 하나님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눈이 뜨인 것입니다. 자기 두 눈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죽는다는 것을 무식하지만 유대인이었던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난 인간에게는, 유대인 같은 신학적 상식이 없는 자라도,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먼저 두려움은 공포심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죄책감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떨림은 너무나 큰 경외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서게 되면 자신은 너무나 왜소하고 무능하게 여겨지는 반면에 그분은 정말로 위대하고 거룩해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 보입니다. 그 크고도 찬란한 영광 앞에 감히 눈을 떨 수도 없고 오직 눈감고 엎드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베드로는 평생을 통해 쌓은 지식과 경험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어찌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이 랍비가 자기를 어디로 어떻게 인도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단번에 자기 생명마저 앗아갈 수 있는 절대적 존재임을 안 것입니다. 그로서 최고 상책은 어서 빨리 이분 앞에서 벗어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첫마디는 “무서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더러 떠나달라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죄인으로서 죽을지 모른다는 염려와 또 이분 앞에는 자기가 잠시라도 서있을 수 없는 엄청난 권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당연히 그 두 가지 염려를 다 제거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을 직접 뵈도 죽지 않게, 즉 그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살아계신 주님이 죄에 찌든 피조물에 불과한 그를 계속해서 직접 만나주고 동행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로선 절대적 절망에서 구원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그가 이렇게까지 신학적으로 정리된 사고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초월적 권세 앞에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지고 당혹되어 오직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그 말 한마디로 그 불안감이 씻은 듯이 제거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했을 때 베드로가 품었던 반신반의는 이제 완전한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몰랐어도 최소한 이분이 말하는 대로만 하면 세상에서 보지 못하며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에 찌든 베드로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는데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과 직접 동행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분이 맡기시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절대적 절망이 절대적 소망으로 변하였고 세상 사람은 도저히 누리지도, 아니 알지도 못하는 권세와 은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요 누리는 특권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최소한 세 가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자가 그 모든 죄와 허물의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너무나 고귀한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일을 동역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영접하여 그를 따르는 순간 이 셋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첫째를 제외하고는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그런 신분으로 바뀐 것은 확실합니다. 참 신자라면 이 셋 중 하나라도 빠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너무나 큰 권능과 은총 앞에 선 베드로는 한 죄인으로서 한 피조물로서 반드시 보이게 되는 필연적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문제는 그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오늘 날의 신자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셋 중에 오직 하나 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만 그것도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믿어주기로 했으니 그 보상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진정으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아가 너무나도 거룩하신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경외감에 휩싸여 숨도 크게 내쉬어보지 못하는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임재와 동행 아래 있어보지 못해 두렵고 떨리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윤리적 죄를 범해 혹시 벌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간혹 느낍니다. 그러나 죄를 범해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불신자도 본성적으로 깨닫는 일입니다. 또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복 받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전히 믿었으니 복 받아야 한다는 심보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너무나 거룩하고 온전하기에 살이 떨리는 경이로운 감격을 맛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런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베드로와 야고보과 요한을 제자로 삼아 사람을 취하는 자들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훤한 아침에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도 고기를 수없이 잡을 수 있는 능력을 보인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그 세 어부는 두 배가 잠길 정도의 그 많은 양의 고기뿐만 아니라 배와 그물 등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고기포를 떠 말리거나 어묵을 만들어 저장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호수 가에 배 두 척과 그물과 거기에 잔뜩 실려 있는 고기가 주인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세상을 전부 살만한 황금이 있어도 예수를 따라 사람을 취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생생한 표적 아닙니까?        

그런데도 작금의 강대상에서 가르쳐지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만 믿고 따르면 대낮에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도저히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가 가라앉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십니다. 능력의 주되시는 그분께만 무슨 일이든 온전히 맡기십시오.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더 많이 받도록 곡간 문을 넓히기만 하십시오.” 물론 주님만 온전히 믿고 따르면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바뀐 세 가지 신분 중에 완성된 것은 오직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완성되지 못한 나머지 두 가지는 신자더러 주님의 도움을 받아 완성시켜 나가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첫째는 이미 완성되었기에 믿은 후에 믿음으로 이룰 일은 둘째와 셋째가 됨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로 성숙되어서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완성된 첫째만 붙들고 그것도 예수님이 다 완성하신 것을 두고 마치 신자 자신이 이룬 양 대가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나아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 잡는 것은 이 세 가지 목적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데도 예수를 영접하고 난 이후에 신자가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양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고 성경지식이 연약한 평신도로선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따름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그물이 찢어지게 고기가 잡힌 것은 그를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리도록 하기 위한 것뿐이었으며 두 배에 가득 찼던 고기들은 그대로 버려졌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필요하다면 오대양에 있는 고기 전부를 단번에 한 곳에 모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전 세계의 인류를 지금이라도 몽땅 다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코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구원해주어도 됩니다. 귀찮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실 이유가 하등 없었습니다. 한 죄인더러 구원 이후의 삶을, 즉 사람을 취하는 어부로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두 배에 가득 찬 고기라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은 신자로서 세 가지 신분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특별히 둘째, 셋째의 권세를 기쁨으로 실행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이 셋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그물에 고기를 채우는 일에만 전념하려고 믿음(?)을 동원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1/3/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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