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위해 일하지 말라.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0-42)
현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적 기준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 기준으로 평가되어 그 동기, 원인, 과정, 결과를 따져나가다 보면 나름대로 이해해줄만한, 나아가 선한 부분이 다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도덕률로는 아무리 악한 일이라도 판단하기 나름으로 특유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고 믿습니다. 존재하는 것, 이미 발생한 모든 일은 다 선하다는 다원(多元)주의입니다. 한 마디로 악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게 된 시대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분이 절대적 진리이자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는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아무 가치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과는 아예 비교조차 불가능하기에 절대적으로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절대적 진리란 두 점을 최단 거리로 잇는 직선은 절대적으로 하나뿐인 것과 같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리 직선처럼 보여도 현미경으로 보면 어딘가 굽어 있고 더 깁니다. 그런데 완전한 직선은 눈에 안 보이는 차원에선 존재 가능해도 현실에선 아무리 오차를 최대한 줄여도 초현미경으로 보면 부분적으로 굽어있기 마련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그런 눈에 보이는 초현미경의 오차까지 바로 잡을 수 있는 분이자 그 기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 직선을 긋기 위해서 1 미터 나무 자를 사용 한다 칩시다. 말씀드린 대로 그 모든 자가 엄밀히 따지면 1 미터에서 미세하나마 +-의 오차는 있습니다. 정확한 1 미터는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BIPM)에서 백금으로 만들어진 미터원기(prototype meter)입니다. 최근에는 빛의 파장으로 기준을 바꾸어 이 원척(原尺)이 큰 의미를 잃었습니다만, 어쨌든 이 원척은 길이를 재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의 정확도를 점검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만약에 이 원척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자는 다 정확한 자가 됩니다. 또 어떤 지역에 자를 만드는 독점 업체가 실수든 고의든 110cm를 1 미터자로 만들어 통용시켰다면 그곳에선 계속 110cm가 1 미터로 행세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1 미터로 행세해도 1미터는 아닌 것입니다. 절대적 하나님을 부인하고 다원주의가 옳다는 주장은 바로 이런 사태가 옳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 진리와 기준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상대적 진리나 차원이 낮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진리로 떨어질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신자는 100% 진정성과 순수함을 가지고 그분을 경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라도 죄 때문에 그 본성이 여전히 굽어 있어서 삶에서 완전한 경배와 순종을 잘 못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존재와 일생에 있어서 100%의 절대적 의미와 가치는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All or Nothing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전자는 신자이고 후자는 불신자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겨드려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신자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해야 할 여러 일 중에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느냐는 문제로만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우선권도 단순히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도의 가치만으로 따집니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대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마르다는 그 반대였다고 이해하고 치웁니다. 근본적으로는 맞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선권을 드린다는 의미는 다른 차원입니다. 우선권이란 본질적으로 여럿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으로 당연히 다른 것들은 다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는 단순히 비교해서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가 따질 사항은 하나님이 그 일에 연관이 되어 있느냐 없느냐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데도 그 일을 그렇지 않은 일과 중요도를 따질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은 100점 만점이고, 자신은 90점 자식은 85점 부모는 80점 직장은 75점 건강은 70점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만점을 드렸으니 그분에게 최고 우선권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과 부모만 합쳐도 165점으로 하나님의 100점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우선권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절대적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과는 다른 어떤 것도 가치에 있어서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차원이 아예 다른 것입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문제를 두고 상호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한쪽에서 의미와 가치가 커더라도 저쪽에서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컨대 역도선수와 씨름선수가 누가 더 세느냐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지 않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접하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좋거나 급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녀는 대접에 100점, 말씀에 70점 식으로 상대적 우선권을 부여했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 나쁜 편을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둘 다 좋은 일이라면, 비록 중요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밥을 먹으면서 말씀을 들거나 먹고 난 후에 말씀을 들어도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마르다를 도와주라고 하지 않고 마르다만 두 번이나 그 이름을 부르며 안타깝게 타일렀습니다.
말씀을 택했다고 해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근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절대성과 완전성을 온전히 인정하여 그분과의 친밀한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동행이 이뤄져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절대적 하나님과 자신의 절대적 관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분과의 영적인 교제가 신자의 모든 삶에 절대적인 우선이 되어 있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사실상 다른 차원의 일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항상 그분의 임재 아래에 있음을 확신하므로 그분께는 겸비하게 그분 외에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과 사람 앞에는 꿇릴 것이 하나 없게 됩니다.
오스왈도 챔버스는 “예수를 향한 경건 생활에 가장 큰 경쟁자는 예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가 전제가 되지 않는 어떤 일도, 비록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라 해도 마르다의 경우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만 맞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사역자의 경우에 막상 본인은 기도할 짬도 없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너무나 바빠서 기도한다.”는 역설적인 책 제목처럼 신자는 아무리 바빠도 주님과의 일대일의 교제가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합니다.
주님을 택하면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해서 세상 일이 중요하지 않고 교회 일마저 등한히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을 택하면 나머지는 필연적으로 주님의 인도와 은혜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는 직선이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현실에서 직선을 최대한도로 곧게 그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인정만 해주면 다 직선이라는 다원주의에 빠질 뿐입니다.
혹시라도 지금도 기독교가 가장 좋은 종교라고만 평가하고 있습니까? 또 마르다가 한 일이 그리 잘못되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럼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the Best Way가 아니라 the Only Way입니다. 유일한 길이란 원천적으로 비교 평가하여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길은 당연히 절대적 진리가 되며 또 그 진리를 바라보는 인간의 입장에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분 외의 어떤 것도 그분과의 교제와 비교할 대상이 아예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언제 어디서나 All or Nothing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솔직히 마르다입니까? 마리아입니까?
1/1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