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잃어버린 자인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8-10)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에 대해서 주저함과 심지어 반론마저 만만찮게 있습니다. 십일조는 재산이 아니라 단지 소득(사업자라면 영업순이익)의 10%인 것에 비하면 전 재산의 50%를 하나님 일을 위해 드리겠다는 삭개오의 헌신은 엄청난 셈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으려고 찾아 온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눅18:22)고 했고 그 사람은 근심하고 돌아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50%만 바쳤는데도 구원을 얻었고 부자 관원은 100%를 바치지 못해 얻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사람들로부터 욕을 들어 먹는 자로 토색했을 수 있는 반면에 관원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율법대로 선행을 많이 한 자였지 않습니까? 삭개오가 키가 작아서 봐 준 것입니까? 예수님이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돈이 많고 적음에 또 그 돈을 선행에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에 달렸지 않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구원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잃어버린 자”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관원이 실망하여 돌아간 후에 부자가 하늘나라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비유했습니다. 본문과 대조해보면 부자들이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한 “잃어버린 자”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미 따져본 대로 자기 소유를 잃어버리거나, 적거나, 남을 위해 사용한 자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잃어버린,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입니다.
부자 관원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상에서 존경 받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면서 관원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재산의 반만 처분하여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으면 흔쾌히 동의했을지 모릅니다. 그가 구제 자체를 반대한 것은 분명 아니며 언제든 기꺼이 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단지 세상의 명예, 권세, 소유를 누리면서 영생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생부터 얻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지 않습니까? 영생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바쳐서라도, 아니 바친 후에 얻는 것으로 자기 생명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미련 때문에 영생을 포기한다면 자기 생명보다 부귀영화가 더 좋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영생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안락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지금 부자 관원을 탓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 가운데도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으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생도 얻고, 아니 이미 얻어놓은 것 같으니까 이왕이면 세상에서 품위를 유지하고 존경도 받으려고 열심히 믿음을 동원하지 않습니까?
삭개오가 세리장이 된 것이 어쩌면 키가 너무 작아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부자가 된 것도 직업에 따르는 반사이득일 수 있습니다. 그가 토색을 전혀 하지 않을 만큼 선한 자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세상의 조롱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선뜻 올라갈 만큼 사람들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세상에서 품위 유지하는 것보다는 더 가치 있는 어떤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관원과 정 반대의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참 위로와 평강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금을 낼 때 말고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세상에선 완전히 내어놓은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먼저 이름을 부르며 아주 친근하게 자기 집에 들어와 교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평생에 그런 기쁜 일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단순히 세상에서 욕을 듣고 버림받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구원해 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이미 잃어버린 자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선 그 잃어버림을 결코 다시 되찾을 수 없음도 철저하게 인식했습니다. 도무지 어떤 수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과 허망함으로 날마다 괴로워했던 자입니다. 그로선 세상에선 잃어버린 자신을 하늘에서라도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도 잃어버렸던 자였습니다.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겠다고 한 것은 그가 고의로 했던 안 했던 간에 직업상 세금을 징수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피눈물 나게 한 적이 많았음을 인정했고 또 그 일에 대해 항상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고, 그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음도 싫었고, 너무 볼 품 없는 외모로 수모 당한 것을 세리장이라는 권력과 돈 많은 것으로 자신을 버린 세상에 대해 복수하고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더 미웠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헬라원어의 뜻은 “완전히 파괴하다”, “죽다”, “멸망하다”, “손상시키다”입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행동의 결과가 돌아가는 재귀(再歸)적 용법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자신을 철저하게 부숴버린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고만 구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라야 합니다. 자기는 철저하게 부패되었기에 스스로는 어떤 소망도 없는 자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것으로는 그 부패된 것을 깨끗케할 수단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고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간 후에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영생을 얻는 일은 포기하고 세상 쾌락만 추구했을까요?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많은 선행을 해 사람들로 칭송을 받은 자였고 또 그것만이 세상사는 재미였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려서 그 명성에 금을 가게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이전보다 몇 배로 더 구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세상에서 명성과 칭찬은 쑥쑥 올라가지만 자기 영혼의 평강은 그에 비례해서 늘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우쭐거렸을 수는 있지만 계속 구제해야 한다는 부담만 늘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 눈치만 살피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최소한 영생을 소망하는 자는 사람 눈치와 하나님 눈치를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팔뜨기가 되어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 관원에게 재산을 다 팔라고 한 것은 그에게는 재산과 재산이 주는 결과가 바로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에 눈이 팔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에 방해가 되니 그 방해를 완전히 제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를 거지로 만들어 제자로 데리고 다니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진정으로 자기 영혼이 가난함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정말 진짜 최고로 낮아지는 자리에 한 번 서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 이익과 감정과 자존심에 따라 끼리끼리 버리거나 찾은 것뿐입니다. 그 가운데서 버림을 받았다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버림을 받아 불평과 복수심에만 가득 차 지새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에 대해 전혀 미련이 없어야 하늘로 가는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세상 대신에 하늘을 바라보는 자를 예수님은 찾고 계십니다.
비록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처분 했어도 여전히 보통 사람과 비교 안 될 정도의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와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에게서 대접 받은 것으로 교제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끝없이 눈물과 한숨으로 지샌 그의 영혼을 보았고 또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영과 영이 교통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기가 자신을 철저히 부셔버린 적이 있는 반면에 부자 관원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 그래서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려는 자는 세상에 미련이 없는 자입니다. 세상에만 뜻을 둔 자는 그 분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과 하늘 양쪽에 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은 부자 관원의 경우처럼 말로써만 가르치시지 직접 그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세상을 버리겠다는 자와만 직접, 아니 먼저 찾아와서 만나주시고 교제하시기를 그분이 요청하십니다.
혹시 당신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습니까?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너무 싫습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니 크게 기뻐하셔야 합니다. 가장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 세상의 것에 미련을 갖지 않고 하늘의 신령한 보화를 얻을 소원을 갖고 있다면 말입니다. 세상을 얻은 자는 하늘을 잃고 하늘을 얻은 자는 세상을 다 잃어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얻으려 하고 또 그 대가로 무엇을 잃고 있습니까?
2/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