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0:29-37 너는 누구의 이웃인가?

조회 수 1875 추천 수 33 2009.09.19 15: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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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의 이웃인가?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29-37)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모든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천국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타 종교와는 달리 죽은 후 천국 가는 방도만이 아니라 구원 받은 신자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 안에도 도덕적 가르침이, 그 반대로 도덕적 가르침 안에도 복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영생을 얻는 데는 아무런 자격 제한이 없다는 복음의 말씀이지만  이웃 사랑에 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도덕적 가르침이 그러하듯이 이 비유에는 아주 고급한, 아니 널리 통용되는 일반 상식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는 평소에 이웃 사랑을 율법의 규정대로 잘 실천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할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물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한 이 비유는  구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방법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자신이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길에서 강도를 만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 지금으로 치면 목사 전도사가 외면하고 지나쳐 가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지금으로 치면 불신자가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말하건대 신자와 불신자의 도덕 수준을 비교하거나  선행을 장려 권면하는 내용이 이 비유의 초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율법사에게 되물었습니다.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인가?”로 물었는데, 예수님은 “너는 누구의 이웃인가?”라고 바꾸어 물은 것입니다. 즉 율법사는 도움을 주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의 범위를 정해서 이웃으로 삼아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도움을 받을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를 이웃으로 삼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바꾸었습니다.

다른 말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웃을 정하는 것이지 도움 주는 자가 이웃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까닭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더 정확하게 풀이하면 이웃의 범위를 자기가 한정짓지 말고 모든 자를 다 이웃으로 삼아 섬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이까?”는 신자에겐 아예 성립될 수조차 없는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사는 지리적, 혈통적, 사회적, 경제적, 신분적으로 자기와 비슷하거나 우월한 일부 계층만 따로 구분지어 이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구분은 영생을 얻는 길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데는 절대로 적용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웃 사랑이 영생을 얻는 조건이 아니며, 주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자는 당연히 당신처럼 누구든지 다 이웃으로 삼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신자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생각처럼 베푸는 쪽에서 정해서 베풀어주면 베품을 받은 자는 자연적으로 베푼 자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옳게 보이려고 질문한 것처럼 자기 자랑과 의가 개입됩니다. 또 자기가 도울 자를 정해 도와주려면 누구라도 자기 여유분으로 어렵지 않게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정과 적선이지 참된 선행과 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선행과 구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그 도움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는 자의 의도나 형편과는 아무 연관이 없고 오직 도움을 받을 자에 달렸습니다. 또 그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자기 가진 모든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필요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는데 도움을 그만두면 사실은 온전한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자기는 죽더라도 상대는 살리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보살폈고, 또 볼 일이 있어 잠시 갔다 오는 사이에도 주막 주인에게 돈을 맡기고 돌봐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극 정성으로 가진 것 모두 희생하며 최고의 선행을 베풀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중간에 자기 볼 일도 보러 갔습니다. 돈을 준 것은 그 동안 주막에서 먹고 자는 비용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혹시 돌아와서 계산이 더 나왔으면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필요한 것을 끝까지 채워준 것입니다. 그 말은 혹시라도 그 사이에 완쾌되면 나머지 돈은 당연히 자기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웃 사랑은 감정적인 호불호나 사회적 교제의 충실한 이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아가 무조건 지극 정성으로 갖다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 나에게 있다면 바로 그것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역으로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웃으로부터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 간에 사랑의 빚을 지며 초대 교회처럼 서로의 소유를 통용하는 참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시간, 장소, 여건, 사람, 그 어느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아야만 합니다. 아무리 많은 양으로 도와주었다고 해서 바로 곁에 더 필요한 사람은 외면하고 크게 필요치 않는 사람에게 주었다면 사랑도 구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네 편 내 편으로 편 가르기 한 것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분리시키는 영인 사단이 작용한 것입니다.  

독일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유대인을 핍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유대인 아이가 어떤 교회를 찾아가 숨겨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교회를 맡은 성직자는 그 아이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을지 모른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코리텐 붐 여사의 아버지가 “당신은 이 아이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이 일로 우리 가족에게 최고의 명예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숨겨 주었습니다.

그 성직자는 도움을 주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반면에 코리텐 붐의 아버지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습니다. 바로 율법사와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이해하는 차이였습니다. 다른 말로 성직자는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아버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 가운데도 이런 차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나치 정권의 강압적인 통치가 두려웠을 수 있습니다. 그 성직자의 말대로 그 아이로 인해 모두 죽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할 위기에서 왕을 알현해야 했던 에스더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녀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망설일 때에 삼촌인 모르드개가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3,14)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온전한 믿음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런 큰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모르드개의 말을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입해봅시다. “네가 길가다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으면 지갑이 축나지 않고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때에 네가 지나치면 그 불쌍한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다른 도움의 손길을 붙여 줄 것이나 네와 네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하필이면 바로 이때에 이 장소를 지나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일지 누가 아느냐?”

남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은 상대의 필요가 실제로 보여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의협심과 종교적 의무감만으로는 남의 필요를 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와 모든 자들이 불쌍한 죄인으로 보일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그것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쉽사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고 나서기 이전에 과연 내가 주님 안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먼저 되어 있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과 구제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 누구이든지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웃에 절대 경계나 제한을 두지 말고 누구든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이웃을 본인이 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이 나를 기꺼이 자기의 이웃으로 삼기를 원합니까? 전자는 아직도 복음 밖에 있고 후자라야 복음 안에 제대로 들어와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1/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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