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이 우상이 되는 이유?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민 11:4-7)
흔히 신자들이 목사에게 “신자가 벤즈를 타면 안 됩니까?” 또는 “수백 만 불짜리 저택에 살아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신자란 항상 과도한 낭비를 하지 말며 호사스러운 것을 멀리 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질과 양을 수치로 환산하여 어떤 한계치를 적용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크리스찬 사업가라면 큰 저택에 살면서 최고급 차를 여러 대 굴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자꾸 어떤 수치적 한계를 정해 보려는 숨은 의도는 오히려 그 한계를 최대한 늘려서 자신도 그 최대한 늘린 한계까지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신자답게 검소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는 평소 때에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는 법입니다. 목사가 신자라도 벤즈 타도 됩니다라는 대답만 해주면 아무런 양심과 신앙에 가책 없이 그날로 바로 벤즈를 사 보란 듯이 타고 다니겠다는 심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탐욕의 의미는 단순히 질과 양을 일반적인 평균보다 과도하게 원하고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 가지기를 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을 원한다고 해서 특별히 호사스럽고 사치스런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가 너무 밋밋하고 단조로운 맛이라 싫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매일 똑 같은 음식을 주니 싫증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먹을 것 마실 것 제대로 없어 굶주리고 갈증이 났을 때는 무엇을 먹고 마셔도 꿀 맛이요 생수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름휴가 가듯이 제대로 모든 것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전쟁 통에 피난 가듯이 광야로 내몰렸는데, 하늘에서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가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 세상에 최고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먹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니 짜증나고 신경질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은 다시 노예가 되더라도 싱거운 생활보다는 뭔가 화끈한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에 나가 어떤 부정한 방법을 취하든 심지어 큰 죄를 짓든 세상이 주는 편리, 풍요, 자극을 누릴 수 있는 자원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육신과 영혼이 자유와 평강을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자신의 정력만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신자가 항상 반복되는 단조로운 생활을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특별히 지금 그 자리, 여건, 신분, 소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것임을 믿는 자가 신자임에도 그것이 도무지 화끈한 맛이 없다는 불평이 바로 탐심입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는 아무리 작아 보여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천직과 소명으로 알고 끝까지 인내하며 충성하지 못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의 불평과 불만은 자기가 미처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것보다는 정작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것-내 가정, 내 교회, 내 직장들에 대한 것이 원초적이며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들로 공급해 주었지만 도대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이 탐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골3:5)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단조롭고 고된 일이 사람의 성품을 평가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새로이 뭔가 펼쳐지기나 감격으로 인한 전율은 아예 없고 단지 매일 되풀이되는 평범한 일만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일상적인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감화력으로 간간이 우리를 구제해 주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 언제나 짜릿한 전율의 순간만을 기대하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조로우면서도 고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
사람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해 취할 태도는 둘뿐입니다. 감사와 불만이 그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케세라세라”(될대로 되라) 하면서 수수방관하는 것뿐입니다. 이는 살아 있되 죽은 것과 방불합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둘 중에 한 가지 태도를 갖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입니다.
불신자 중에 검소하게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족(自足)하는 수준에 머뭅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노력하여 이룬 것이기에 자기가 자기에게 혹은 주위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불만도 자신의 능력과 주위 사람과 여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감사는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진정한 감사입니다. 당연히 신자의 어떤 불만도 기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됩니다. 신자가 단조로운 삶에 지쳐 짜증나고 심하면 우울증까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신자 스스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만인 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수로든 불만을 해소 해버리는데 반해 신자는 감히 하나님에게 불평을 터트리고 스트레스를 풀 수는 없고 또 이전처럼 세상적 방법으로 그것을 해소할 수도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됩니다.
그런 신자를 보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신자보다 더 쓰라리고 애처롭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그런 형편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가 아닙니다. 그럴 때에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불평을 터뜨리고 따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타시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처음에는 거의 전부 하나님에 대한 불평 심지어 욕까지 하면서 부르짖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그분의 품 안에서 영혼이 소생되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차라리 자신에게 나와서 불평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낫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현재의 형편에 대해 불신자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 즉 탐심을 갖지 않는 것을 가장 원합니다.
사람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취할 태도도 둘뿐입니다. 이 또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입니다. 같이 꿈을 꾸긴 꾸되 불신자는 자기가 원하는 헛꿈-탐욕을 추구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속에 심어준 소원을 또 그 분이 직접 이뤄주실 것을 믿는 꿈-소명을 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탐심의 정의가 두 가지라는 뜻입니다. 불신자에겐 자기 능력과 처지 이상으로 과도하게 욕심내는 것입니다. 신자에겐 하나님이 마련해 주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마저 벤즈나 저택을 원하는 것이 탐심인줄 불신자의 정의에 맞추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최대한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는 진짜 탐심을 감추고서 말입니다.
병자호란 때에 강화로 피난 갔던 임금님이 생선이라고는 아무 맛도 없는 목어(木魚) 뿐이라 할 수 없어 먹었는데도 너무 맛있어 이름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습니다.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 그 맛을 도저히 못 잊어 다시 먹어 보았더니 네 맛도 내 맛도 없어 “도로 목어”로 하라고 해서 그 이름이 ‘도루묵’으로 바뀌었다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서 최고로 귀한 만나를 애굽의 특식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권능이 도루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놀랍지 않습니까? 출애굽 때에 따라 나온 이방인 무리들의 불만이 이스라엘에게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탐심의 원인이기 이전에 정확하게는 그 본질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물질을 평균 이상으로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이 탐심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신자의 탐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외에 것을 가지고 있거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부추기고 꾜셔서 우리가 멋모르고 넘어 간 것이 아닙니다. 신자 속에 세상이 하나님보다 더 좋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없애지 않는 한 신자가 탐심, 정확하게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또 그 마음이 살아 있는 채로는 아무리 자족하며 검소하게 살아도 솔직히 영악하지 못해 세상에서 패배한 모습을 종교적으로 치장해 마치 세상을 달관하고 불신자랑 자기는 차원이 다른 양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7/1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