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22,23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

조회 수 1081 추천 수 47 2009.09.10 19:13:44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14:22,23)


가데스 바네야의 반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리라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전염병으로 벌주려 했지만 모세의 중보 기도로 그 벌을 거두는 대신에 광야에서 40년간 유리하다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징벌을 주시는 말씀 중에 진짜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셨으므로”(출9:12)라는 표현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그를 일부러 완악하게 만든 것처럼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자신에게 직접적 피해가 없었고 또 재앙이 끝나면 일단 숨통을 틀 수 있으니까 자기의 본성적인 죄악과 탐욕으로 다시 돌아간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일부러 더 완악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완악한 바로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을 끝까지 배반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아가 그것마저 들어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일관성 있게 주관하셨습니다. 이 땅에 죄악이 만연하고 인간이 죄를 범하는 일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이 부패하여 죄를 향해 달려가기 바쁘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며 엄밀히 따지면 더 완악했습니다. “광야에서 행한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열 번이나” 그분을 시험하면서 그 음성을 청종치 않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을 불신자인 애굽이 열 번을 거역한 것과 신자인 이스라엘도 똑 같이 그렇게 했다면 누가 더 완악한 것입니까?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은연중에 두 가지 본성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절대자에게 도움을 빌어야겠다는 겸손한 마음과 그와 동시에 그분에게 왜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는 반발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좋은 일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두 가지 반응이 생기는데 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자기를 내세우는 자랑입니다.

애굽은 재앙을 열 번 겪었습니다. 애굽과 바로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술객들과 방백들이 나서서 바로에게 빨리 이스라엘의 신에게 항복하자고 권유까지 했습니다. 바로가 혼자 고집을 피우고 나머지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애굽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애굽의 열 번 재앙에서 구별된 것에다 홍해와 광야에서의 이적들을 포함하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아마 여호수아, 갈렙, 아론, 미리암 정도를 포함한 극소수)만 하나님에게 순종하였고 나머지 모든 백성은 그저 불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힘든 일들도 애굽이 겪은 재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굶지 않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어도 심지어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해주겠다는 데도 원망만 앞세웠습니다.

사실은 애굽이나 이스라엘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그렇습니다. 끝도 없이 자기 욕심만 채우려 듭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죽겠다고 아우성칩니다. 열 번의 재앙을 받으나, 열 번의 축복을 받으나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척해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순간적인 쾌락, 죄악, 감정, 심지어 자기 지성의 판단 착오에도, 나아가 영적인 눌림이 있어도 하나님은 자신에게 전혀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나서서도 격정적인(사실은 하나님의 임재 여부와 관계없이 자기감정만 충만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어떤 감동(여전히 진정한 감동이 아니라 감각적 자극)이 없으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자기의 생각, 감정, 의지(그것도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와 하나님을 사정없이 맞바꾸어 버립니다. 지정의로는 하나님을 찾거나 만날 수도 없고 성령으로 인간의 영혼이 바뀌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덜 완악하려면 그들에게 뭔가 더 나은 점이 있었어야 했고 또 하나님이 그런 점들을 보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출애굽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어린 양의 피로 구분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가꾸고  선행을 한 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노예 신분이라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그들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었다는 것만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바로와 애굽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열 가지 재앙을 겪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기들 우상 신으로는 결코 경험 내지 상상도할 수 없었던 너무나 엄청난 일들을 난생 처음 겪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인해 입이 쩍 벌어지고 진정한 두려움과 경이로움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들도 4백년 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를 눈으로 목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의 신이었던 여호와는 단지 이야기 속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를 볼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경이로움에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에게는 애굽과는 별도의 너무나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스키를 타러 갔는데 눈사태가 덮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가족은 자연의 가공할 힘에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같이 스키를 탔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는 그 두려움에다 도저히 말로 표현 못하는 자기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보태집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고센 땅만 구별된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까지 배반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열 번도 넘게 오직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체험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너무 많이 받다보니 그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아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은혜가 아니고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간주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당신의 택하신 거룩한 족속이자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그런 은혜들을 베풀었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시대의 어떤 민족도 받을 수 없는 지극히 큰 은혜와 권능을 맛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권능이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할 테니 이제 마음 놓고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앞뒤 구분도 전혀 없이 하나님 앞에서 투정만 늘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 홍해, 만나, 메추라기, 반석의 생수 사건 등을 다 겪게 한 후에,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고 언약을 맺은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적을 베풀거나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나안 땅도 계속해서 이적으로 차지하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광야에선 이스라엘이 온갖 불평을 해도 아니 불평할 때마다 이적으로 그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마지막이자 가나안 땅의 경계인 가데스 바네야에선 이적이 아니라 징벌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이적을 바라지 말고 대신에 이제 이스라엘더러 당신과 맺은 언약을 책임지고 수행하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하나님이 은혜와 권능을 베푼 것은 이스라엘이 아무 염려 말고 당당하게 진군만 하면 아무리 장대한 아낙 자손이 지키는 견고한 성읍이라도 쉽게 차지할 수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적과 젖과 꿀만 찾고 있었고 또 자기들에게 그런 것들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그분을 얕잡아 본 것입니다.

지금 애굽이나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혹시라도 눈치 채었습니까?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십니까?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불신자가 아니라 저를 포함한 예수 잘 믿는다는 신자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따져 우리가 불신자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선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처럼 더 완악해졌습니다. 신자들이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나 따돌림 받을 왕따가 되어가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7/2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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