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1:24-30 예수님을 정말로 시기하는가?

조회 수 326 추천 수 0 2019.03.28 14:59:35

(민11:24-30) 예수님을 정말로 시기하는가?

구약성경강해 (19) / 민수기강해(9)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더라.”(민11:24-30)

 

하나님의 일회성 해프닝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지겹게 먹게 되자 고기 야채 과일 등을 먹고 싶다고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모세도 반복되는 원망에 지쳐서 하나님에게 개인적으로 너무 괴롭다고 한탄했습니다. 이번에는 백성들의 원망을 단순히 대언하기보다는 지도자로서의 자기 고충을 토로한 것입니다.

 

맡은 책임이 너무 막중하니 혼자서 이 많은 백성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민11:14)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고기를 한 달간이나 먹게 해주었고 모세에겐 70명의 장로들을 세워주었습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에 대한 인자와 긍휼이 무한하심을 보였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지시를 받은(16절) 모세가 장로 70명을 불러 모았더니(25절) 그들이 하나님의 신을 받고 예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왕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었으면 지속적으로 예언을 하게 하지 아쉽게도 금방 그 신을 거둬 가버립니다.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을 부어주어 예언케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장로 70명은 백성들 사이의 일상 일어나는 분쟁이나 소송을 담당하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이미 율법을 수여 받았고 백부장 천부장 제도를 확립했기에 그들이 율법에 따라 판결해 주면 됩니다.

 

지금 백성들의 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시키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역할을 맡을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세도 혼자선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신을 부어주어 예언케 함으로써 당신께서 모세를 대신할, 최소한 모세와 함께 동역할 영적지도자라고 백성들 앞에서 인준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노인 중에 택하라고 지시했습니다.(16절) 신앙은 결코 단기간에 성숙되지 않습니다. 삶의 온갖 문제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씨름하여서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합니다. 인생 연륜이 쌓이면 자연히 삶의 지혜도 그만큼 풍부해지므로 올바른 영적 지도와 상담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당신의 신을 단 번에 거두어간 이유도 간단합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총인원 70명으로 지정해주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완전한 수들인 7 X 10=70명이 됩니다. 이스라엘 중에 단 한명이라도 영적으로 퇴보 타락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뜻입니다. 장로들 더러 전 백성을 다 나눠맡아서 세밀히 돌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더러 선발하라고 한 후에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해주겠다고 합니다.(17절) 비록 모세가 자의로 선발한 것 같지만 당신께서 세우셨다는 점을 백성들더러 확인 시킨 것입니다. 모세에게 사적인 욕심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충성 헌신하는 종임을 인정하고 그의 영적인 분별력을 신뢰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80년간 기나긴 부재 내지 침묵할 동안 모세의 갈등과 고뇌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떨기나무 불꽃으로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대면한 이후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를 기뻐하는지도 잘 알기에 모세가 임의로 선발해도 하나님의 선발인 셈입니다.

 

성령이 한번만 임했다가 떠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비록 70명에게도 하나님의 권위가 임했지만 여전히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선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그 70명의 영적지도자들의 대표라는 것입니다.

 

장로 70 명이 항상 예언을, 성경에 구체적 설명은 없지만 방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 하면 당신 백성의 공동체에 질서가 서지 않고 혼란해집니다. 한 성령이 한 계시를 주어서 영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거기다 모두가 항상 예언하면 틀림없이 그들 중에 모세와 지도자 자리를 다투려는 자가 나설 것을 미리 방지한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고라당의 반역이 그랬고 심지어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거역하는 사건을 본문 바로 다음인 12장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영에 머문 두 사람

 

놀랍게도 모세의 지도력에 시비를 거는 그런 일이 바로 오늘의 본문 사건에서도 발생했습니다. 모세가 지명한 사람 중에 엘닷과 메닷 두 명이 진에 머물고 회막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앞뒤 행간의 의미를 살피면 모세에게 불만의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26절)라고 기록합니다. 그들 자의로 불참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했어도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도 그런 뜻을 뒷받침합니다. 성령이 임해야 할 조건 자격이 안 되었는데도 임했다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거기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중병에 걸렸거나 집안에 위급한 일이 생겼다면 지금의 상황을 전했던 자가 그런 소식도 함께 전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회막에 고의로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여호수아도 예언을 중지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행비서로 후계자가 될 훈련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여호수아가 평소에 그 두 사람의 행적이나 태도를 알고서 그들이 모세의 부름이 못마땅해서 나오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모세도 그런 점을 알고도 그 두 사람을 영적 지도자로 세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모세의 결정을 승인하고 지지해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가 과연 모세처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사건건 자신을 반대하며 목회 방침에 불만을 표하는 자를 장로로 임명해서 당회에 참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직회에서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교인들 100%가 목사를 좋아하여 교회 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꼭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용서 받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교인들이 믿음은 가졌어도 여전히 죄의 본성과 탐욕이 살아있습니다. 또 목사도 완전하지 않고 연약한 인간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게 아무런 반대가 없다면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상대로 목회하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 안에는 숫자가 많든 적든 목사의 반대파는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목사에겐 눈에 가시 같은 사람들입니다. 목사도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받지만 목사라는 위치 때문에 교인들과 대놓고 싸울 수는 없어서 참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대적을 목사가 장로로 임명해서 함께 동역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과 인품을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더러 노인 중에 영적 지도자를 택하여 세우라고 명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당장에 이 사건에 대한 여호수아와 모세의 반응을 대조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본문의 여호수아처럼 젊은 사람들은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공의를 실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 등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체험한 노인입니다. 노인들이 흔히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고 내 탓이야. 내가 어서 빨리 죽어야지.” 어쨌든 나이가 들면 신체만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긍휼한 마음과 인생에 대한 지혜가 더 많이 생깁니다.

 

나이 들수록 더 똑똑해지거나 인격이 더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많은 실패와 잘못과 죄들을 범해 왔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자기들 잘못과 죄를 회개하고 개선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날로 나아지기는커녕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퇴보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직 주님의 긍휼만을 소망하고 그 긍휼 안에 참여하였고 비로소 다른 이들을 주님의 긍휼한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오래 동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면 아직 젊은 사람들은 더 그럴 것임을 자기들 지난 인생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긍휼의 노인이어야 다른 이들을 영적으로 지도하고 상담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을 위해 시기한 여호수아

 

이 사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조금 더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고 대답했습니다. 우선 자기에게 거역한 그 두 사람을 단순히 모세 스스로의 긍휼로 용서하고 품어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나를 생각해주는 네의 마음은 내가 잘 안다”입니다. 모세도 평소에 그 두 사람의 언행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만약 모세가 그 두 사람을 신뢰하고 좋아했다면 여호수아의 요청에 대해서 “네가 그들을 시기하느냐?”라고 말해야 자연스런 대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하면 “네가 나를 무시하느냐?”라고 꾸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모세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여호수아로선 예언을 중지하게 해달라는 요청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를 위하는 말이니까 여호수아의 요청도 바로 모세의 뜻과 일치해야 합니다. 모세도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뜻만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네와 내 생각과는 다르다고 은연중에 밝힌 셈입니다. 모세는 자기 의견과 달라도, 최소한 내 감정이 어떠하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단순히 그 두 명의 반대자를 포용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의 가족과 친척과 가문도 있습니다. 모세는 그 노인들 70명을 단지 나이순으로 뽑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열두 지파의 두령이나 지도자를 맡고 있는 자들 중에서 인품과 믿음을 감안했을 것입니다. 자기 지파에 영향력이 끼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럼 단순 계산으로 이스라엘 이백만의 2/70, 약 오만칠천 명의 반대파를 품어준 것입니다.

 

틀림없이 모세도 그 두 명을 뽑을까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명을 놓고 갈등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물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뜻으로 계시 받은 것이 29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두 사람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고, 아니면 반대하는 장로들은 어떻게 하나요라고 기도했더니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선지자 되길 원한다는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 모세가,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 두 명의 예언을 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싫어해도 하나님이 독선적으로 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 두 사람보다 5만7천명의 반대자를 감안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70명의 장로뿐 아니라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예언하여 선지자가 되기 원했던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피 제사로 헌신한 제사장 나라의 언약

 

본문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단지 나를 대신하거나 함께 도울 동역자를 세워달라고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답은 이스라엘 이백만 명이 다 그런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들 모두가 모세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실은 하나님으로선 본 사건 이전에 이미 그런 뜻을 명백히 밝혔고 이스라엘도 그에 동의했습니다. 사백 년간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인데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본문으로 따지면 모든 백성이 예언을 하는 선지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할 때에 제사장 나라로 세우겠다는 뜻을 확약했고 이스라엘도 피 뿌림의 제사로 그 언약을 준행할 것이라고 헌신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유대교나 기독교라는 종교 왕국을 세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계가 다 당신께 속했고 이스라엘은 열국 중에서 당신의 소유가 된다고 합니다. 소유이므로 항상 그분의 자녀입니다.(출19:5,6) 제사장은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 첫째 역할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를 통해 열국을 당신께 나오게 해서 그들과 화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의 소유이자 자녀가 된 이스라엘은 다른 종족들도 하나님과 자기들과 같은 관계가 되도록 이끄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 열국에는 얼마 전까지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무참히 패배 시킨 애굽은 물론 앞으로 쫓아낼 가나안 족속들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들 모두를 여호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그 앞에 엎드려 감사 찬양 경배하게 할 그 일을 이스라엘더러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하겠다고 피 뿌림의 제사로 헌신했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오늘날의 교회 상황에 대입하면 이렇게 됩니다. 담임 목사와 가장 가까운 부교역자가 목사의 지도 노선에 자꾸만 반기를 드는 장로 한두 명에 대해 공동총회를 열어서 장로직분에서 면직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간언한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전체가 조용해지고 목사님도 소신껏 목회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담임 목사는 물론 교회 전체를 염려해서 선한 의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담임 목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내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하나님이 세운 장로를 아무리 목사라도 인간인 내가 파면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로뿐 아니라 우리 교인 2천명 전부가 다 장로 나아가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훈련 양성시키는 것입니다.

 

일차로 장로들부터 주일 대예배 때에 대표기도만 시킬 것이 아니라 강단에 세워 설교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구를 맡겨서 교회 안의 여러 작은 교회들의 목자장이 되게 하고 구역장들도 구역모임에서 목사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본문 식으로 하면 구역원인 일반 성도들 모두가 그 모임의 목자로 설교하고 가르칠 정도가 되게끔 교육시키고 그대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동일한 말씀을 하신 예수님

 

본문 사건을 통해 지도자인 모세의 인품이 인자하고 그 그릇이 참 크다고 이해하고 치우면 안 됩니다. 결론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가 목사 그 이상이 되라고 합니다. 이는 결코 이단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원리를 모르고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실현하지 않는 것이 반성경적이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순히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제자들더러 제자로 만들라고 했으니 새로 제자로 배움을 받은 자들도 사도들이 맡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명령을 직접 들은 사도들도 어차피 주님처럼 얼마 있으면 천국으로 가서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제자 삼는 모두가 사도들처럼 되길 원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뜻입니다. 두 분이 동일하신 하나님이므로 동일한 뜻을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뜻을 더 확실히 증명해주는 신약시대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마16:16) 최초의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듣자 주님은 비로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 일이 스승에게 일어나게 할 수 없으며 제가 목숨 걸고 막겠다고 나섰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시기한 것입니다. 스승을 너무나 사랑하고 염려하는 아주 선한 동기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게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야단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죽으셔야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죄인에게 비로소 빛이 비취고 참 생명으로 살려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려서 십자가에 올라가지 못하면 그 구원이 이뤄지지 않고 모든 인류가 사탄의 노예가 된 채 죽음의 절망에 남겨지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 꾸중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과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소명의 그 막중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하속들을 앞장서서 막고는 그중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잘라버립니다. 이때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를 위해서 행한 일인 줄 잘 안다. 인간으로 온 나도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이가 예언하고 선지자 되길 원했듯이 나 또한 모든 신자가 다 사도가 되길 원한다. 그러려면 내가 저들에게 체포되어 능욕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지 않겠느냐?”

 

너무나 엄청난 지상 명령

 

지금 아주 엄청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예언을 하는 선지자로 열방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소명에 실현하지 못했고 제대로 알지도 못해 나라가 없어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선지자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나안 땅에 제대로 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뜻을 더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당신의 사역으로 실제로 실현해 보였습니다. 당신을 따른 제자들 모두가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 각자가 세상 사람들 앞에 목사로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이 지상에 계셨던 주님을 대신했다면 오늘날의 신자들도 예수님 대신에 서야만 합니다. 또 그래야만 하늘과 땅의 권세로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복음을 순전하게 전해서 죄인들로 십자가에 무궁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앞에 항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 곳곳에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를 개척하여 세워야 합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사탄의 도성인 로마에 십자가 복음의 폭탄을 투하한 그대로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자신들의 삶을 통해 인간 사회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평생을 노예 해방에 헌신한 윌버포스처럼 말입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죄악과 타락에 찌든 세상으로부터 격심한 거역 대적 핍박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무참하게 패배시켰고 승천하신 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신자 각자에게 임재 내주케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세상을 제자들도 이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때에 핍박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럼 신자가 땅 끝까지 복음 들고 가지 않으면 그 권세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의 권세가 초자연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죄인을 구원하신 뜻 즉,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자들이 주님처럼 십자가 성육신의 원리로 즉, 내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자에게 주님의 권능이 있어야만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그 진리대로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다른 죄인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권능이 단순히 신자를 고난과 핍박에서 건져서 보호 인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만약 주님의 권능이 그런 차원으로만 머물면 순교는 하나도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실제로 그런 모습이 실현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여 회막에 나오지 않고 진영에 머문 두 사람이 예언하는 것을 여호수아의 간청에도 중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모세와 나머지 68명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다고 본 사건을 끝맺었습니다. 거역하는 자들을 오히려 찾아가서 아무 문제 삼지 않고 화해하고 세워주었다는 뜻입니다.

 

주변에 천국을 실현하라.

 

신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에만 대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 사건의 결론처럼 자기와 가까운 주변의 한두 명부터 긍휼로 품어주고 섬기면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조금씩 번져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쌓아서 모든 백성으로 예언하는 선지자가 되게끔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감사하고 또 두렵지 않습니까?

 

반면에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많은 교회의 당회가 목사를 추종하는 장로 편과 반대하는 장로 편으로 나눠서 서로 다투기 바쁩니다. 종종 목사와 교인들이 맞서 싸웁니다. 서로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쪽에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강변합니다. 주님께 야단 맞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목사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심지어 신자들이 성경을 많이 알면 머리만 커져서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너무나 완악한 말을 하는 목사마저 있습니다. 작금 대체로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깊이 가르치지 않고 설교 중에도 성경은 겉만 핥고 치웁니다.

 

예수님은 엄연히 모든 신자를 사도로, 오늘날의 목사로 세우라고 명했습니다. 모두가 설교도 하고 다른 이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악 된 세상에 맞서서 승리하여서 거룩하게 변화시키라고 합니다.

 

바꿔 말해서 신자들로 교회 밖으로 자꾸 내몰아내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복음 들고 땅 끝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만 모여서 병이 낫고 사업이 번창하고 자식들 일류대학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기도만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권능이 함께 하실 리가 없습니다.

 

본문에 비추면 교인들 전부, 교회 전체가 회막에 나아가지 않고 진영에 남아 있는 꼴입니다. 모세 때만 해도 70명 중에 68명이 나가고 2명만 남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모세 때에 모두 진영에 남아 있었다면 여호와의 신이 아예 아무에게도 임하지 아니 했을 것이며 그런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목사로서 작금 교회와 신자들을 볼 때 날이 갈수록 안타까운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같은 목사로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땅 끝까지 가는 것은 둘째 치고 십자가 진리조차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아예 그런 주님의 명령은 알지도 못합니다. 신자 각자가 세상 앞에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처럼 서있어야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만약 한두 명이라도 진실로 그렇게 하면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할 것이고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은 기독교, 목사, 예수 믿는 신자가 가장 신망이 없고 심지어 가장 부패하고 욕을 들어 먹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본문 29절의 말씀을 새기도 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감사하고 두려운지 새삼 깨닫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나 가르침에만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 스스로 성경을 깊이 파고들며 연구해야 합니다. 정말 살아 역사하는 진리의 말씀임을 삶에서 실천하여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 모두가 선지자와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성도들의 작은 모임에서부터 설교하고 가르치십시오. 주변의 불신 이웃과 만날 때도 단순히 일반 신자가 아니라 목사로 서시고 목사답게 행하십시오. 교회 안의 목사나 성도들을 시기하지 말고 정말로 예수님만을 온전하고도 순전히 시기하시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3/2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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