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1-4 사탄이 노리는 인간의 최고 약점

조회 수 103 추천 수 0 2019.05.21 16:39:32

(민14:1-4) 사탄이 노리는 인간의 최고 약점

구약성경강해 (24) / 민수기강해 (14) - 가데스바네야의 반역 (4)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14:1-4)

 

믿음과 관계없는 반역

 

그 엄청나고도 많은 이적을 받아 누린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하나님께 계속 거역하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중에 가장 이상한 일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일본에 강점되었던 한국이 연합국이 일본에 승리를 함으로써 해방이 되었는데 당분간 국가체계가 혼란해서 먹고 사는 일이 이전보다 더 힘들어지자 일본더러 다시 지배해달라고 요청하는 꼴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거역인지라 가데스 바네야에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욕심도 가장 강력하게 드러냈습니다. 밤새 울부짖었고 본문 4절에선 장관을 세워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려 시도까지 했습니다.

 

이는 믿음을 적용할 필요 없이 상식과 이성으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배역 사건도 단순히 이스라엘이 믿음이 약해져 하나님의 권능을 쉽게 잊었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연결해서 따져봐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믿음은 기독교 신자가 교회활동에 성실히 임하고 신학과 교리를 숙지하여 실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도 훨씬 더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에 관해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진술은 참으로 정미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13:30에 따르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켰습니다. 모세의 믿음에 함께 동참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라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려 한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은 13:32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땅을 악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백성을 향해 서서 말하며 그들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상대할 가나안의 군인 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 골리앗 같은 슈퍼 거인이니까 패배는 기정사실이고 그 땅도 거민을 삼키므로 차지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새빨간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그 선동의 결과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탄이 조종하는 집단 광기

 

백성들이 밤새도록 곡(哭) 즉, 마치 누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통한과 슬픔에 잠겨 울부짖었습니다.(14:1) 그런데 1절에선 온 회중과 백성, 2절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다와 온 회중이라고 한 명의 예외가 없는 전부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시간적으로도 1절에 밤새도록 즉, 한시도 쉬지 않고 곡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 어법에 아주 많다는 것을 ‘모든’ ‘온’이라는 단어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네다섯 번이나 강조한 것은 실제로 모든 백성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상대적 열등감에 사로잡힌다고 전백성이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려서 전쟁을 지레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없습니다.

 

당시 상황을 따져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닥쳐서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할 것이 걱정되면 안 치르면 그만이지 밤새도록 곡을 하며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거짓의 아비로 처음부터 살인한 마귀가 이스라엘 진영에 죽음의 그림자로 덮어서 집단 패닉에 빠트린 것입니다.

 

이로부터 약 1500년 후 십자가 사건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방인인 빌라도 로마 총독마저 예수님에게서 사형시킬만한 죄는 눈곱만치도 없고 오히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일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살인 반란죄인 바라바를 사형시키고 예수님을 대신 풀어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라고, 그것도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라고 요즘말로 떼 창을 했습니다. 주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자기들과 자기들 후손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그랬습니다. 알다시피 십자가는 역사상 최고로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이 또한 사탄이 예루살렘 성 중에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어 집단 광기에 빠트렸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권능을 믿음으로 회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켜서 이성으로 전후 사정만 따져보면 열 명의 악평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밤새 울부짖었습니다. 사탄이 그들의 영을 완전히 농락했기에 이성마저 왜곡 파괴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류 역사상 출애굽 전후만큼 하나님이 엄청난 기적을 많이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홍해의 마른 땅을 건넌 후에는 인류 최대의 찬양 집회로 하나님께 감사 경배했습니다. 시내 산에선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는 역사상 최대의 서약식을 거행했습니다. 지금 그 언약에 싸인한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최대의 거역을 했습니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모든 인간은 심지어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교인들도 순간적으로 집단적으로 사탄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 분쟁에서 보듯이 집단으로 서로 자기 쪽에만 하나님이 있다고 강변하면서 양쪽이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도 유대인들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심심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며 하나님을 거역한 본문의 사건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아무리 사탄이 조종하는 집단 패닉에 빠졌다 해도 자존심도 없는지 하필이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유입니다. 노예근성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듯이 이스라엘이 배알도 없을 만큼 비굴하고 치사하지는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포기한다면 이스라엘이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만약 북한에 급변사태가 벌어져 대량 탈북이 일어나면 같은 동족인 남한이 그들을 받아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자기들 가진 것 나눠주며 자기 영토에 받아줄 나라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실제로 친척 족속인 에돔 모압 암몬부터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있는데 바로 애굽입니다. 비록 탈출해서 괘씸하지만 모세 같은 주모자만 본보기로 처형하고 백성들은 전부 노예로 다시 부려먹으면 됩니다. 한국이 해방 후에 일본더러 다시 지배해 달라고 했다면 거절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절대로 비겁하거나 어리석지 않았고 대신에 아주 영악했고 너무나 현실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생존 본능은 세계에서 최고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역한 즉,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 3절 후반에 자기들 입으로 정확히 밝혔습니다. 우리의 처와 자식이 사로잡히느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나라의 남자는 죽거나 노예로 팔려갑니다. 노예 생활은 애굽에서 이골이 나서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 명 정탐꾼들이 모두 네피림 후손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잔인하게 죽이거나 노예가 되어도 애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창세기의 맥락에 따르면 네피림은 가인 그중에서도 라멕과 연결됩니다. 사로잡힌 처자들도 아주 비참한 대우를 당할 것이 뻔합니다. 한마디로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는 비정상이나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꼭 정죄 받을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도 결국은 가족들이 새 땅에서 평안한 삶을 살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호와도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올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라나고 했지만 다시 그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지금 가족이 그 반대 상황에 빠질 것이 뻔하고 반대로 가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너무나 손쉬운 방안이 있는데 구태여 불을 지고 화약고에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인간 이성으로 가장 무리가 없는 적합한 판단과 결정을 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그들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면?

 

그런데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아비와 어미를 또 아들과 딸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10:37) 직계 가족은 모든 인간이, 당연히 신자도 포함해서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의미와 기쁨입니다. 그런데 당신 즉 하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원수는 자기 식구라고 전제한(36절) 후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가족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비참한 고통에 처해지더라도 하나님과 언약한 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야만 당신께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절박한 계명으로 여겨집니까? 한국과 미국에 사는 우리에겐 이전 같은 대량 살상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거의 없고 또 로마 시대처럼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당하는 종교적 핍박도 없으므로 솔직히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은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비교우위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그렇게 실천하고 있거나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마음은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원수가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과연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은데 특별히 가족에게 원수라는 표현을 사용했기에 그 중에도 가족이 가장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가족을 원수로 여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주님 사랑에 100, 가족 사랑에 70의 힘을 쏟아도 당신께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합니다. 가족을 아예 원수처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 인간이 평생토록 견지해나가야 할 삶의 근본 목표 방향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며, 가족의 사랑은 그 바탕 위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최종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가치의 의미를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순전(pure)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은 오직 그분께로만 온다는 것을 알기에 실제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 모두를 오직 그분의 품 안에만 위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족을 포함한 세상의 다른 모든 것에는 참되고도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없음을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자신과 일대일로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행하는 바탕 위에서만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에 가족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결정적인 도움과 영향을 미치게 해선 안 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한 인간이 살고 죽는 구원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마누라 치마 자락 잡았다고 천국을 못 가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 출석한들 하나님의 실제적인 권능이 나타나는 관계를 못 맺는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모태에서 내 혼자 알몸으로 왔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도 내 혼자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일생을 통해 말하자면 욥이 겪은 그 말도 안 되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을 때에도, 그 고난을 통해 완전하고 영원한 주권과 섭리로 자신을 거룩하게 주관하고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욥1;21)

 

제가 60대 후반에 접어드니까 욥의 고백이 점점 피부에 와 닿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 표현대로 가족이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을 더욱 사랑하고 있고 더할 수 없이 나에게 귀중한 존재라는 것도 실감합니다.

 

그러나 가족 사랑과는 전혀 별개로 그 동안 세상에서 맺고 있던 여러 모양의 관계들이 어느 샌가 없어지고 결국 하나님 앞에선 나 혼자 남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종종 든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따라오는 당연한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실체적 존재(實在)는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세상의 옷들을 하나씩 벗으며 하나님 앞에 혼자서 알몸으로 설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믿음을 딱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이자 전부임을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항상 그분 중심으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활동과도 상관없이 나라는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붙들려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어도 예수 십자가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인생이 정말로 완전히 뒤집어졌다면 제 뜻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잎 하나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고 새롭게 보입니다. 현실의 삶이 아무리 궁핍하고 내가 이름도 빛도 없었을지라도 예수님 안에만 있어도 너무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밖으로는 죽으며 죽었지 다시는 나가지 않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순전해지고 완전한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누려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여전히 연약하여서 현실의 고난과 인간관계의 상처와 태생적 죄의 본성과 세상과 사탄의 시험과 유혹들에게 수시로 훼방 받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넘어지기에 아직도 내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지 부끄럽고 한심해서 회개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확실히 아는 사항이 두 가지는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우리를 끊을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도 이스라엘 이상으로 하나님께 의심 불만 원망 심지어 분노가 자주 많이 생기지만 그래도 그분의 손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때로는 우리를 두들겨 패서라도 당신의 품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까지도 압니다.

 

예수로 인생이 뒤집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신령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고도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일일이 비교해 본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른 이의 삶을 일일이 알 수도 없습니다.

 

이전의 나에게는 아예 없었던 기쁨이 생겼고 또 그 기쁨이 생전 처음으로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본인만은 아는 것입니다. “어! 이 편안하고 온유해지는 마음은 뭐지,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고 놀랍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혼자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기꺼이 나가길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면 기쁨이 배로 충만해지는 것을 자꾸 체험합니다. 아무리 힘든 현실적 고난 중에도 주님이 먼저 나만이 아는 방식으로 인격적으로 찾아와 주시면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가족까지 포함해서 포기할 수 있어도 하나님만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기도할 힘조차 없고 이 고난이 언제 해결될지 전혀 감이 안 잡히고 심지어 앞으로도 엄청난 고난이 닥칠 것이 눈에 뻔히 보여도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한 인간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정말로 참된 인간으로 서는 문제입니다. 그분 밖에선 절대로 참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정말로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육신의 살고 죽음과 상관없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죽은 이후에도 욥의 고백처럼 정말로 하나님 앞에 알몸으로 담담하게 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래서 그분 앞에서 잘 죽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일대일의 교제 동행 정확히 말하면 거의 그분과 씨름하는 일로 보냅니다. 그 씨름에 당연히 가족도 개입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그분만이 나에게 정말로 유일하고 순전한 가치가 있는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실패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절대적인 무엇을 붙잡은 자가 신자입니다. 그래서 가족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을 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 이유로도 가족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없으며, 영적 이유로는 인간에 불과한 가족이 하나님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잘못은 우선 하나님 대신에 가족의 안위를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종교적 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인생을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만이 부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가족의 안위를 생각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장정들은 자기들이 죽기 싫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치르면 어차피 죽을 자는 남자들입니다.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광야나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먼저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가족이 사로잡히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럼 가족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죽는 것이 정말 두려워서 정말로 장례식처럼 밤새도록 목 놓아 슬피 곡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죽는 것도 애굽을 먼저 말하고 다음에 광야를 거론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선 노예로 고생해도 당장 죽을 염려가 없고 자연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광야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왕이면 애굽에 돌아가 죽는 것이 좋지만 광야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자기들 생명만 부지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거기다 광야는 좀 불편해도 하나님이 만나와 생수를 주어서 계속 살려주리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역하면서도 그분이 주시는 복은 놓치지 않겠다는 정말로 치사한 탐욕이자 죄입니다.

 

성경이 온 회중이라고 표현한데 주목해야 합니다. 회중이 이스라엘 전 백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종교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원칙적으로 성전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어쩌면 전쟁을 직접 치를 남자 장정들만, 아니면 그들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곡을 한 것입니다. 이젠 가족은 뒷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너무나 가난하고도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죽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최고의 최후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살고 죽는 믿음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잠간 동안 살아갈 이 땅의 썩어질 것들에 자기 목숨을 건 것입니다. 입술로만 여호와를 불렀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이 땅에서의 안위만 도와주는 도우미(helper)였을 뿐입니다.

 

스스로 평생 노예가 된 자들

 

모라비안 형제단이 19세기 말에 인도에서 선교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예들만 사는 공동체에 전도하러 들어가려고 정부당국에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정부에선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너희도 노예 신분이 되고 절대 바뀔 수 없다. 평생을 그 신분으로 지내야 하고 누가 지시해도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도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면서 노예 촌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도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스스로 자진해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비록 육신은 멍에와 사슬에 묶였지만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는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제일 먼저 붙잡아야 하고 끝까지 그 하나만은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인 하나님을 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그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들에게 자기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소개하고 나눠주고 싶어서 자기들도 평생 육신적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한 영혼을 구원해주려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들은 자기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가족의 안위,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육신적 생명은 포기 할 수 없어서 밤새 곡을 하면서까지 다시 애굽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습니다. 육신이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야하는 궁극적 구원과 심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아무리 흘러도 당장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라도 단 얼마간이라도, 아니 내일 전쟁에 나가면 죽으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목숨만이라도 부지해야겠다고 작심한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루살이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았지 직접 일대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 편에 선 자는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그분만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는 인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족을 포함해 자기도 죽을지 모르는 전쟁도 주님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흔들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의하는 믿음은 가족은 물론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가족과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종교적 의식과 행동에 성실히 앞장서고 성경에 능통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밤새도록 이스라엘 온 회중이 곡할 정도로 집단 패닉에 몰아넣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사탄은 대부분의 인간이 하나님보다 가족 아니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간보다 더 잘고 있기에 그 부분만 살짝 건드리면 머리로만 아는 하나님 정도야 손쉽게 거역한다는 것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바울 사도는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 즉, 가족과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인 사탄과 싸워야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장 크고도 너무나 손쉬운 약점을 항상 건드립니다.

 

믿음의 삶은 바로 그 가장 자주 받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은 사탄에게 바로 그 점에 넘어가 집단 패닉에 걸린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스스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자기에게 물어보길 원합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분 앞에 혼자서 알몸으로 돌아갈 자신이 있습니까? 현재 그런 준비를 하면서 살아갑니까?

 

5/1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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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민14:26-35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master 2019-07-20 98
45 민14:20-25 하나님도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 master 2019-06-10 463
44 민14:13-19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가? master 2019-06-10 200
43 민14:10-12 하나님이 언제 은혜를 주시는가? master 2019-06-10 44
42 민14:4-10 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master 2019-06-10 64
» 민14:1-4 사탄이 노리는 인간의 최고 약점 master 2019-05-21 103
40 민13:28-33 메뚜기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master 2019-05-06 274
39 민13:25-33 역사상 최대 불순종의 진짜 이유 master 2019-05-06 612
38 민13:17-24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붙잡으라 master 2019-05-06 127
37 민12:1-10 목사가 잘못하면 고소하라. master 2019-04-16 195
36 민11:24-30 예수님을 정말로 시기하는가? master 2019-03-28 326
35 민11:10-15 하나님의 숙명과 신자의 숙명 master 2019-02-24 119
34 민 11:4-9 자족의 비결을 알고 있는가? master 2019-02-24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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